여자세례명 바울라는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바울라 10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바울라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바울라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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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라 여자세례명 목록
- 바울라 (1월 5일)
- 바울라 (1월 26일)
- 바울라 감바라 코스타 (1월 31일)
- 바울라 몬탈 포르네스(성 요셉 데 갈라산즈의) (2월 26일)
- 바울라 (6월 3일)
- 바울라 프라시네티 (6월 11일)
- 바울라 (6월 18일)
- 바울라 (7월 20일)
- 바울라 (8월 10일)
- 바울라 엘리자베타 (12월 24일)
1. 바울라
- 세례명 축일
1월 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318-1368년
바울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이야기
성녀 바울라는 1318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성녀 바울라는 베네딕토회 카말돌리 연합회 수녀원에 맡겨졌고, 그 후 일생을 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피사(Pisa)와 피렌체(Firenze) 간의 불화를 평화롭게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바울라
- 세례명 축일
1월 2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347-404년 로마
바울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이야기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이자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바울라는 15세 때인 362년 율리아 가문의 이교도 톡소시우스(Toxotius)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부부로 존경받았는데, 379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엄격한 절제생활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성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와 안티오키아(Antiochia)의 바울리누스(Paulinus)를 통하여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히에로니무스의 사업에 적극 가담하여 후원하였다.
384년경 그녀의 큰딸인 블레실라의 죽음으로 한때 비통에 잠겼으나, 다음 해에 그녀는 둘째 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과 함께 로마를 떠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더불어 성지를 순례한 뒤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은 구호소와 수도원을 세웠는데, 바울라는 수도원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보조자였으며, 성서 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402년경에 병에 걸려 2년 후인 404년 1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과부들의 수호자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바울라 감바라 코스타
- 세례명 축일
1월 31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Gambara-Costa - 신분과 직업
부인 - 활동 연도와 지역
1473-1515년
바울라 감바라 코스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감바라 코스타 이야기
바울라 감바라 코스타는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에서 태어났고, 12세 때에 베나스코(Benasco)의 루이스 코스타(Louis Costa) 백작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작은 형제회의 유명한 사제였던 키바소(Chivasso)의 안젤루스(Angelus, 4월 12일)의 도움과 자문을 받았으므로, 아내가 자기 집으로 오기 전에 먼저 안젤루스(Angelus) 신부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매일 첫 새벽에 일어나 아침기도와 로사리오를 바쳤고, 그 얼마 뒤에는 인근의 프란치스코 성당에 찾아가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오후가 되면 그녀는 성모소일과를 바쳤고, 저녁에는 밤기도와 로사리오 기도를 또 바쳤다. 그녀는 1488년에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이 젊은 아내는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걸인들에게 많은 음식을 나누어 줄만큼 사랑이 차고 넘쳤다.
한편 남편은 행실이 나쁜 다른 젊은 여자를 사귀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나쁜 사건이 터졌다. 그 젊은 여자가 독살된 듯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바울라는 끝까지 인내하여, 오히려 남편을 감복시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녀의 자선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길을 가다가 걸인을 만나면 입고 있던 겉옷과 신발까지 벗어 주었으므로 가끔 맨발로 걸어가는 그녀를 본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42세에 선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4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바울라 몬탈 포르네스(성 요셉 데 갈라산즈의)
- 세례명 축일
2월 2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Montal Fornes of St. Joseph de Calasanz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799-1889년
바울라 몬탈 포르네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라산스, 갈라상스, 몬딸, 빠올라, 빠울라, 칼라산스, 칼라산즈,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몬탈 포르네스 이야기
성 요셉 데 갈라산즈의 성녀 바울라 몬탈 포르네스(Paula Montal Fornes de San Josephus de Calasanz)는 1799년 10월 11일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부근 해안도시인 아레니스 데 마르(Arenys de Mar)에서 태어나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녀는 겸손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성장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냈다(1799-1829년).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홀로 다섯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를 위해 장녀로서 고된 일을 하며 가사를 도왔다.
동정 마리아께 대한 사랑과 본당에서의 영성생활을 통해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그녀는 그 시대에 소녀와 젊은 여성 그리고 부인들이 교육과 문화를 접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국경도시이자 군사 요새인 헤로나(Gerona) 인근의 피게라스(Fiqueras)에 눈길을 두었다. 1829년 나이 서른에 그녀는 절친한 친구인 이네스 부스케츠(Ines Busquets)와 함께 그 지역의 중심지로 이주하여 소녀들을 위한 첫 번째 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는 기존의 소년들 중심의 학교와는 전혀 다른 학교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서 소녀와 젊은 여성들의 전인적 그리스도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카리스마의 사도직이 탄생하였다.
이 사도직은 여성들이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을 지향하였다. 그래서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교육이라는 네 번째 서원을 발함으로써 다른 이들과 구분되고 있다.
1837년 이후 그녀와 그녀의 공동체는 성 요셉 데 갈라산즈(8월 25일)의 정신을 온전히 따르며 그의 영성과 규칙에 따라 살고자 했다. 그런 목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아레니스 데 마르에 1842년 두 번째 학교를 설립한 이후 그녀는 바르셀로나 인근의 해안도시인 마타로(Mataro)에서 성 요셉 데 갈라산즈가 설립한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일명 Piarist)의 신부들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1846년 바르셀로나 북쪽의 사바델(Sabadell)에 세 번째 학교를 개교했는데, 이 학교는 그녀가 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한 사도직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바델의 학교에서 그녀가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 신부인 야신토 펠리우(Jacinto Feliu)와 아구스틴 카사노바스(Agustin Casanovas)와 함께 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들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형식의 수도회에 대한 교회법적 틀을 갖추게 되었다.
1847년 2월 2일 그녀는 마리아 수녀회(Daughter of Mary, 또는 경건한 학교 수녀회 Pious School Sisters)의 일원으로서 처음부터 함께한 동료인 이네스 부스케츠, 펠리치아 클라벨(Felicia Clavell), 프란치스카 데 도밍고(Francisca de Domingo)와 함께 서원을 하며 성 요셉 데 갈라산즈의 바울라라는 수도명을 택했다.
1847년 3월 14일 사바델에서 열린 총회에서 그녀는 총장이나 부총장의 직책을 맡지는 않았지만 일생을 통해 수녀회를 이끌었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1860년 교황 비오 9세(Pius IX)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1829년부터 1859년까지 그녀는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개인적으로 7개의 학교를 개교하였다. 1829년 피게라스의 학교를 시작으로 해서 1842년 아레니스 데 마르, 1846년 사바델, 1849년 이구알라다(Igualada), 1850년 벤드렐(Vendrell), 1852년 마즈노우(Masnou), 1859년 올레사 데 몬세라트(Olesa de Montserrat)에 학교를 열었다.
그리고 다른 4개의 학교, 즉 헤로나(1853년), 블라네스(Blanes, 1854년), 바르셀로나(1857년), 소예르(Soller, 1857년)의 학교를 설립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수녀들의 교육에 힘썼고, 자신의 일생에서 매우 역동적이며 예언적인 시기를 살았다.
1859년 개교한 바르셀로나 인근 올레사 데 몬세라트(Olesa de Montserrat)의 학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설립한 마지막 학교로,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다. 가난하고 작은 이 마을의 수녀원에서 그녀는 종신서원을 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1859-1889년).
이 30년의 시간은 그녀의 값진 증거와 관대하고 거룩한 삶의 모범으로 혜택을 받은 올레사의 소녀와 젊은 여성들에게 은총의 시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고, 그녀는 수녀회를 위해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명하였다. 그녀의 교육 방법은 그녀가 설립한 학교의 교육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의 영성은 성 요셉 데 갈라산즈의 모범을 따르는 것과 자신들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통해 여성들의 전인적인 그리스도교 교육을 완성하도록 돕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1889년 2월 26일 올레사 데 몬세라트에서 그녀가 선종했을 때 이미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3백 명이 넘는 회원들이 에스파냐 전역에 걸쳐 19개의 학교를 운영하며 설립자의 유산인 교육 이념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1993년 4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11월 25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특별히 19세기의 여성들에게 교육 사도직을 통해 사랑과 희망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룬 이 교육 활동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그녀의 정신을 따르는 수녀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바울라
- 세례명 축일
6월 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3년 니코메디아
바울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이야기
성녀 바울라는 감옥에 갇힌 성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 6월 3일)와 그와 함께 순교한 네 명의 소년 순교자들을 도와주었다. 그 이유로 체포된 그녀는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그녀와 다른 다섯 명의 순교자와의 연관은 후에 그녀는 성 루킬리아누스의 아내이며 다른 네 소년들의 어머니라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바울라 프라시네티
- 세례명 축일
6월 11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Frassinetti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9-1882년
바울라 프라시네티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프라씨네티.
바울라 프라시네티 이야기
성녀 바울라 프라시네티는 이탈리아 제노바(Genova)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가정에서 자라났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 중에서도 가사를 돌보며 아버지와 사제가 된 네 오빠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기관지 관련 병이 심해져 오빠가 주임사제로 있던 시골 마을 귄토(Quinto) 본당으로 갔다. 여기서 건강을 회복하고 식복사로 일하던 그녀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연이어 수도성소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녀 주위에는 뜻을 같이 하는 자매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너무나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그녀는 기도로써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는데 결국은 성공하였다.
1834년 성녀 바울라 프라시네티는 제노바에서 가난한 아동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성 도로테아 수녀회'(Congregation St. Dorothea)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곧 이탈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과 브라질까지 진출하여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1863년에 성좌로부터 인가 받은 이 수녀회는 그리스도교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단체이다. 특히 설립자인 성녀 바울라 프라시네티는 사람들의 내면을 읽고 이해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몇 차례의 뇌출혈로 인해 고생하다가 1882년 6월 11일 로마(Roma)에서 선종하였고, 시신은 로마의 성 도로테아 수녀회 모원에 있는 성 오노프리오(Onofrio)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3월 1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파올라 프라시네티(Paola Frassinetti)로도 불리는 성녀 바울라 프라시네티는 병든 이들의 수호성녀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바울라
- 세례명 축일
6월 1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
바울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이야기
성녀 바울라와 성 키리아쿠스(Cyriac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에스파냐의 항구도시인 말라가(Malaga)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바울라
- 세례명 축일
7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바울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이야기
성 사비누스(Sabinu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막시무스(Maximus), 성 마크로비우스(Macrobius), 성녀 카시아(Cassia), 성녀 바울라와 다른 1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바울라
- 세례명 축일
8월 1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바울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이야기
성녀 바사(Bassa)와 성녀 바울라 그리고 성녀 아가토니카(Agathonica)는 그리스도인 처녀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바울라 엘리자베타
- 세례명 축일
12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a Elisabetta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1865년
바울라 엘리자베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올라, 빠울라, 엘리사베따, 엘리사베타, 엘리자베따, 체리올리, 코스탄차, 파올라, 파울라.
바울라 엘리자베타 이야기
성녀 바울라 엘리자베타는 1816년 1월 28일 이탈리아의 손치노(Soncino)에서 귀족 출신의 부모인 프란체스코 체리올리(Francesco Cerioli)와 프란체스카 코르니아니(Francesca Corniani)의 16명의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코스탄차 체리올리(Costanza Cerioli)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병약했기 때문에 11살까지 집에서 머물다가 비로소 베르가모(Bergamo)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코스탄차는 집을 떠난 외로움으로 큰 고통을 겪었는데, 이 체험은 그녀가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고 홀로 위안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19살 때 고향인 손치노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에 대한 결혼 계획이 서 있었다. 아내를 잃고 홀로 된 59세의 가예타노 부세키(Gaetano Busecchi) 백작이 그녀의 남편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제안을 받아들여 1835년 4월 30일 결혼식을 올렸다.
19년의 결혼 생활 중 뒷부분은 모든 측면에서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까다로운 성격과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리고 3명의 자녀가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장 큰 위안이었던 카를로(Carlo)마저 16살까지밖에 살지 못했다.
1854년 1월 심각한 병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카를로는 마지막으로 “어머니, 울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다른 아이들을 주실 거예요.”라는 예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그해가 끝날 무렵인 12월 25일 남편 가예타노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코스탄차에게 있어 암흑기와 같은 이 시기는 그녀에게 심각한 실존적 위기를 초래했다. 그녀의 인생은 무의미하고 무감각해 보였지만 그녀의 아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계속해서 그녀의 영혼을 울렸고, 결국 이는 그녀를 이끄는 빛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적 지도를 찾았고 자신의 모든 비극과 생애 전체를 하느님의 손길에 내어맡기며 신앙의 힘으로 살기 위한 하느님의 은총을 끊임없이 청하였다.
코스탄차는 카를로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모성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을 계속해서 느꼈다. 결국 38살의 나이에 복음에서 영감을 받은 그녀는 애덕만이 유일하고도 참되며 의미 있는 삶의 길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병든 이들을 찾아 돕고 가난한 이와 고아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기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고아들의 두려움에 젖은 눈은 그녀가 더욱더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과 모든 소유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그녀의 집에 고아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문과 이웃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하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보석까지 팔아 고아원을 위한 물품을 구입하였다. 그녀는 모든 재물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즉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1856년 12월 15일 영속적인 정결 서원을 했고, 1857년 2월 8일 가난과 순명의 서원을 발했다.
곧이어 다른 젊은 여성들이 코스탄차와 함께하기를 소망하여 그녀의 자선사업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하느님의 계획은 가려져 있는 듯 보였지만 그녀는 침묵 중에 기도와 명상을 통해 자선 사업을 위한 규칙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많은 고아들의 어머니’인 코스탄차는 1857년 12월 8일 이탈리아의 코몬테(Comonte)에서 성가정 수녀회를 설립하였고, 바울라 엘리자베타라는 수도명을 선택하였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의 카리스마는 나자렛 성가정에서 찾을 수 있는 겸손과 단순함, 가난과 사랑을 영성의 기초로 하고, 예수 마리아 요셉이 성가정 안에서 실천한 명상과 은둔 그리고 겸손한 노동으로 충만하여 수녀들 스스로 그러한 삶의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라 엘리자베타 원장은 수녀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고, 남성들을 위해 1863년 11월 4일 빌라캄파냐(Villacampagna)에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성가정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이 두 수도회의 모범으로서 나자렛의 성가정을 제시하고, 수도회의 모든 사업을 성 요셉(Josephus)의 특별한 보호하심에 맡겼으며, 고아들을 ‘성 요셉의 아들과 딸들’로 부르며 보살폈다. 그녀는 부모 없는 아이들의 교육과 가난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의 모성은 끝이 없었고, 수도회의 수사와 수녀들을 주의 깊고 적절하게 양성하는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자들의 보살핌에 놓인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 명이라도 방치하거나 잃지 않고 사랑으로써 교육하도록 가르쳤다.
성녀 바울라 엘리자베타 원장은 1865년 12월 24일 49살의 나이에 코몬테의 수녀원에서 갑자기 선종하였다. 그녀는 1950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4년 5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 중에 고아들에게 참된 가정을 주기 위해 헌신한 그녀의 노력을 치하하며 그녀가 퍼트린 신앙의 가치가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가 되도록 했다고 말씀하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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