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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남자세례명 10가지

피어나네 2023. 10. 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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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리노, 베드로, 비오(오상의), 소시오, 아담난, 안드레아, 안토니오, 요한, 즈카르야, 콘스탄시오, 총 10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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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여자세례명 엘리사벳, 크산티파, 테클라, 폴리크세나,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9월 23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리노

  2. 베드로

  3. 비오(오상의)

  4. 소시오

  5. 아담난

  6. 안드레아

  7. 안토니오

  8. 요한

  9. 즈카르야

  10. 콘스탄시오

 

9월 2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1. 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9년?

 

 

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누스.

 

 

리노 자료

성 리누스(또는 리노)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첫 번째 후계자로서 로마 교회를 이끌었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리옹의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는 자신이 저술한 “반이단론”(反異端論, Adversus Haereses)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가 티모테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4장 2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리노스가 교황 성 리누스와 동일인물이라며, 그의 후계자는 아나클레투스(Anacletus)라고 기록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 연도가 불확실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 이후 로마 교회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연대 교황표”에 성 리누스가 순교자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증명되지는 않는다. 축일이 9월 23일로 결정된 것 또한 “연대 교황표”에 근거한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81년 이후 아프리카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 목록에서 성 안드레아(Andreas)와 성 요한(Joannes)과 성 베드로(Petrus)와 성 안토니우스(Antonius)가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간단히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Sicilia Is.)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체포되어 무어인에 의해 아프리카로 추방되어 고문을 당한 후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순교 시기는 881년 이후로 보았는데, 당시 시칠리아섬은 이슬람의 지배에 있을 때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비오(오상의)

 

  • 가톨릭 성인 이름
    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887-1968년 피에트렐치나

 

 

비오(오상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비오(오상의) 자료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동부의 베네벤토(Benevento) 대교구에 속한 피에트렐치나에서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Grazio Forgione)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Maria Giuseppa Forgione)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다음 날인 26일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즐겨 했다. 10살 때 그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한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 6일 16세의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조네는 모르코네(Morcone)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 종신 서원을 하고,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五傷, Stigma)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간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 6일 군에 소집되어 1918년 수도원에 복귀하기까지 성 비오 신부는 1년 혹은 6개월의 병가를 여러 차례 받았고, 1918년 3월 16일 기관지염 때문에 군 복무 불능 판정을 받고 3월 18일 산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성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다시금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지도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급속히 퍼져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 6월 17일에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했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 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 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기꺼이 순명하였다.

격리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 집전과 기도로 시간 대부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이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했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해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적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 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그가 선종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 5월 29일)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뜻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신자들의 영적 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십자가의 주님과 일치하도록 보살핀 그의 성덕을 칭송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os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경 미세노

 

 

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소시우스, 소씨오, 소씨우스.

 

 

소시오 자료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진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후대의 몇몇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Benevento)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야누아리우스는 오랜 친구이자 나폴리 북쪽 해안 도시인 미세노(Miseno)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또는 소시오)와 나폴리 서쪽 교외에 있는 항구도시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성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을 증거하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들을 만나러 용감하게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Festus)와 독서직(讀書職)을 받은 성 데시데리우스(Desiderius)가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수행해 함께 갔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구할 방도를 찾던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와 그 일행 또한 캄파니아의 총독에게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총독은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들을 포추올리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내던져 주었으나 맹수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결국 군중들의 소요를 우려한 총독은 그들을 고대 화산 분화구가 있는 인근의 솔파타라(Solfatara)로 끌고 가서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베네벤토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야누아리우스가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다고 9월 18일 목록에서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베네벤토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와 독서자인 성 데시데리우스는 9월 7일 목록에, 미세노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는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음을 맞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9월 23일 목록에 따로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도 성 소시우스에 대해서는 9월 23일 목록에서 별도로 기록하였다. 나머지 포추올리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와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와 성 아쿠티우스는 10월 18일 목록에서 포추올리에서 순교자로서 공경받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성 야누아리우스와 동료 순교자들의 유해는 나폴리의 요한(Joannes) 주교에 의해 나폴리의 카포디몬테(Capodimonte) 카타콤바에 모셔졌다.

그 후 머리를 제외한 성 야누아리우스의 유해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왕자였던 베네벤토의 시코네 1세(Sicone I)에 의해 831년 베네벤토로 옮겨졌고, 1154년 베네벤토의 안전이 위태로울 때 몬테비르지네(Montevirgine)의 대수도원으로, 그리고 1497년에 다시 나폴리로 되돌아와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면서 성 야누아리우스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게 되었다.

현재 나폴리 대성당 내 아름다운 성 야누아리우스 경당에는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로 여겨지는 검은색 물체가 작은 유리병에 담겨 보관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우세비아(Eusebia)라는 여인이 순교자들의 피를 모으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를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포추올리에서 나폴리의 카타콤바로 성인의 유해를 옮기는 중에 나폴리의 주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딱딱하게 굳은 피가 1년에 여러 번, 특정한 시기에 액화되어 묽은 피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이 기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시험과 분석을 시도했으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며 성 야누아리우스의 혈액을 나폴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성 젠나로(Gennaro)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담난

 

  • 가톨릭 성인 이름
    Adamn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저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624-704년 이오나

 

 

아담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난.

 

 

아담난 자료

아일랜드 더니골(Donegal)의 드럼홈(Drumhome)에서 출생한 성 아담난은 그곳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으며, 679년에는 이오나의 제9대 원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알드프리드의 부왕 오스비가 사망한 후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위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알드프리드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686년에 알드프리드가 왕위에 오르자 아담난은 왕을 방문하여 아일랜드 포로들의 석방을 호소하였다.

2년 후 그는 영국의 수도원을 두루 방문하였으며, 성 체올프리두스(Ceolfridus)로부터 부활절에 관한 로마력 채택을 도입하였다. 아담난은 끊임없이 활동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수많은 아일랜드계 수도자를 얻었고,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켈트족(Celts)의 관습을 물리치고 로마 전례를 도입한 것 등이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성공은 여자들은 전쟁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또 여자와 어린이들은 포로가 되거나 살해할 수 없다는 소위 비르(Birr) 회의를 성공시켜 '아담난 법'이라는 협정서를 만든 일이었다.

또한 그는 성 콜룸바(Columba)의 생애를 기술했는데, 이것은 중세 초에 나온 가장 중요한 전기 중의 하나였다. 또한 그는 “성소에 대하여”(De Locis Sanctis)라는 책도 저술하였다. 아담난은 아일랜드에서 성 에우난(Eunan)으로도 불려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Andrew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81년 이후 아프리카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안드레아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 목록에서 성 안드레아(Andreas)와 성 요한(Joannes)과 성 베드로(Petrus)와 성 안토니우스(Antonius)가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간단히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Sicilia Is.)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체포되어 무어인에 의해 아프리카로 추방되어 고문을 당한 후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순교 시기는 881년 이후로 보았는데, 당시 시칠리아섬은 이슬람의 지배에 있을 때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81년 이후 아프리카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 목록에서 성 안드레아(Andreas)와 성 요한(Joannes)과 성 베드로(Petrus)와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한 안토니오)가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간단히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Sicilia Is.)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체포되어 무어인에 의해 아프리카로 추방되어 고문을 당한 후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순교 시기는 881년 이후로 보았는데, 당시 시칠리아섬은 이슬람의 지배에 있을 때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81년 이후 아프리카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 목록에서 성 안드레아(Andreas)와 성 요한(Joannes)과 성 베드로(Petrus)와 성 안토니우스(Antonius)가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간단히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Sicilia Is.)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체포되어 무어인에 의해 아프리카로 추방되어 고문을 당한 후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순교 시기는 881년 이후로 보았는데, 당시 시칠리아섬은 이슬람의 지배에 있을 때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즈카르야

 

  • 가톨릭 성인 이름
    Zechari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예언자, 사제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즈카르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가리야.

 

 

즈카르야 자료

마리아의 사촌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성 즈카르야(그리스어와 라틴어 Zacharias)의 아내이자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 6월 24일)의 어머니이다.

루카 복음서 1장에 따르면, 성녀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Aaron)의 자손으로 남편과 함께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부부가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 즈카르야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님의 성소에 분향하러 들어갔다가 주님의 천사를 만났다.

주님의 천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성 즈카르야에게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며 자신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러 파견된 가브리엘(Gabriel, 9월 29일) 천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았던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말문이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동정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 마리아의 응답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렇듯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여는 주도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성녀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척들은 모두 기뻐하며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다.

그때 성녀 엘리사벳은 아이 이름을 요한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성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고,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68-79)

‘즈카르야의 노래’(Benedictus)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 · ‘시메온의 노래’(Nunc Dimittis, 루카 2,29-32)와 함께 루카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찬가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매일 시간 전례(성무일도) 기도를 바칠 때 아침기도에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저녁기도에서 ‘마리아의 노래’를, 그리고 끝기도에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5일 목록에서 사제이자 예언자이며 성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인 성 즈카르야와 선구자의 어머니인 성녀 엘리사벳의 기념일을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로 기념일을 옮기고, 루카 복음 1장이 전해준 주님의 선구자인 성 요한 세례자 부모의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하였다. 정교회에서는 이들 부부의 축일을 9월 5일 또는 6월 24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콘스탄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onsta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성당지기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안코나

 

 

콘스탄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꼰스딴씨오, 꼰스딴씨우스, 콘스탄시우스, 콘스탄씨오, 콘스탄씨우스, 콘스탄티오,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시오 자료

성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또는 콘스탄시오)는 이탈리아 안코나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성당의 성당지기(제의방지기)로 그곳에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겸손하고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로 기적의 은사를 입기도 했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는 그를 성인으로 생각했고, 그의 일화를 자신의 “대화집”에 기록하기도 했다. 한번은 성당 제대 위의 등에 기름이 다 떨어졌는데, 그가 물을 가득 채웠음에도 온종일 기름이 있는 것처럼 심지에 불이 붙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선종 후에 베네치아로 옮겨져 현재는 성 게르바시우스(Gervasius)와 성 프로타시우스(Protasius)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안코나 대성당에는 1760년에 베네치아의 대주교가 기증한 그의 유해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 목록에서 안코나에서 교회의 사람으로서 기적의 은사보다 겸손으로 더 빛난 성 콘스탄티우스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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