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달마시오 모네르, 루스티코, 안도키오, 제라르도 사그레도, 제레마로, 티르소, 파치피코, 파프누시오, 펠릭스, 헤르쿨라노, 총 10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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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9월 2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달마시오 모네르
- 가톨릭 성인 이름
Dalmatius Mon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291-1341년
달마시오 모네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달마시우스, 달마씨오, 달마씨우스, 달마우, 달마티오, 달마티우스.
달마시오 모네르 자료
설교자회(도미니코 수도회)의 고해신부로 일생을 지낸 달마티우스 모네르(또는 달마시오)는 수도원의 일상적인 의무를 수행하면서 조용히 지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많지 않다.
그는 스페인의 카탈루냐(Cataluna) 지방 헤로나(Girona) 인근의 산타 콜로마 데 파르네르스(Santa Coloma de Farners)에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헤로나와 프랑스 남부 해안가에 있는 몽펠리에(Montpellier)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한때 무절제한 생활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잘못된 생활을 청산하고, 학업을 마친 뒤에 열다섯 살의 나이로 헤로나에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후에 종신 서약과 사제품을 받고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수련장이 되었다. 그는 수도 규칙을 설명할 때마다 자발적인 금욕과 고행을 역설했고, 금주는 물론 의자에서 그냥 잠을 자는 등 자신이 먼저 수많은 고행을 자발적으로 실천했다.
그는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최상이라 여겨 밖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달마티우스 모네르가 사라져서, 다른 형제들이 그를 찾고 보니 깊은 탈혼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 안에서 ‘천사와 이야기하는 형제’로 불렸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날을 마르세유(Marseille) 인근 알프스 산중에 있는 생 막시망 라 생트 보메(Saint-Maximin-la-Sainte-Baume)에서 보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곳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호 성녀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7월 22일)가 30년 동안 지낸 동굴이 있는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 기도와 미사에 참여할 때를 빼곤 동굴을 나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고독 속에서 보냈다. 1337년 그는 수도원의 부름을 받고 헤로나로 돌아와 여생을 수도원에서 보내다가 1341년 9월 24일 선종해 그곳에 묻혔다.
그는 1721년 8월 13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13세(Innocentius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35년 그의 유해를 헤로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그는 달마우 모네르(Dalmau Mon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스티코
- 가톨릭 성인 이름
Rust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클레르몽
루스티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스띠꼬, 루스띠꾸스, 루스티쿠스.
루스티코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 지방 클레르몽의 주교이자 고해사제인 성 루스티쿠스(또는 루스티코)가 선종했다고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클레르몽의 교구 신부로서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을 통해 주교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전임인 베네란두스(Venerandus) 주교가 선종한 뒤에 후임자 선택을 위한 치열한 논쟁을 벌어지고 있을 때, 어느 수녀가 “주님께서 선택하시면 그분이 오실 것”이라고 외쳤다. 그때 문이 열리고 교구의 본당신부인 성 루스티쿠스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교구 출신 본당 사제로서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와 개입으로 주교직을 맡은 후 446년경에 선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24일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의 주교인 성 루스티쿠스가 그 도시의 사제로서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주교직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안도키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doch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솔리외
안도키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도치오, 안도치우스, 안도키우스.
안도키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안도키우스(또는 안도키오) 신부와 성 티르수스(Thyrsus) 부제와 성 펠릭스(Felix)는 스미르나(Smyrna)의 주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에 의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리아(Gallia)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오늘날 프랑스의 오툉(Autun)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총독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채찍과 곤봉으로 심하게 두들겨 맞고, 온종일 불 위에 매달아 놓았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자 결국 무거운 막대기로 그들을 목을 부러뜨리는 형벌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전승에 따르면 성 안도키우스 신부와 성 티르수스 부제는 성 폴리카르푸스 주교의 제자로 디종(Dijon)의 성 베니뇨(Benignus, 11월 1일) 신부와 함께 갈리아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론강(Rhone R.)과 손강(Saone R.)을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고, 성 안도키우스와 성 티르수스는 오툉 근처의 솔리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성 펠릭스라는 상인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며 그를 개종시켰다. 그 후 그들 모두 체포되어 총독의 심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24일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 오툉 지방의 솔리외에서 성 안도키우스와 성 티르수스 그리고 성 펠릭스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제라르도 사그레도
- 가톨릭 성인 이름
Gerard Sagred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80-1046년 베네치아
제라르도 사그레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라르도, 게라르두스, 제라드, 제라르두스, 제라르드.
제라르도 사그레도 자료
이탈리아 베네치아 태생의 귀족이었던 성 게라르두스 사그레도(Gerardus Sagredo, 또는 제라르도)는 산 조르지오 마초로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하였으며, 뛰어난 학덕을 소지하고 있었고 후에 원장이 되었다.
그는 성지에서 고적한 은수자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곳을 향하다가 악천후로 인하여 배가 달마티아(Dalmatia) 해안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헝가리에 정착하게 되었고 더욱이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020년경 헝가리의 국왕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는 그를 자신의 유일한 왕자인 성 에메리쿠스(Emericus, 11월 4일)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 후 7년 동안은 백코니 숲 속의 은둔소에서 고적한 생활을 하다가 이번에는 국왕이 크사나드 교구를 설정하고 그를 첫 주교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 활동하였다.
그의 복음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성 스테파누스 왕이 1038년에 서거함과 아울러 이방인들이 물밀듯 쳐들어 왔을 때 성 게라르두스는 부다(Buda)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1083년에 라디슬라스 1세 왕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의 허가를 받아 헝가리의 주교들과 수도원장, 고관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성 스테파누스 왕과 성 에메리쿠스 그리고 성 게라르두스의 유해를 장엄한 예식으로써 공경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는 베네치아의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헝가리의 사도'로서도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제레마로
- 가톨릭 성인 이름
Gerema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58년경
제레마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레마로, 게레마루스, 제레마루스.
제레마로 자료
성 게레마루스(또는 제레마로)는 프랑크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의 궁중에 들어가서 아내 도미나(Domina)를 만났고, 두 딸과 외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는 가족을 버려두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수도자였다. 엄격성과 관대함을 고루 갖춘 그는 고향 가까운 곳에 수도원을 짓고 원장이 되었다. 그는 하느님과 늘 대화하였고, 손수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인근 주민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곧 원장직을 사임하고 동굴 속에서 은수생활을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 따라 죽을 때까지 원장직에 머물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티르소
- 가톨릭 성인 이름
Thyr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솔리외
티르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띠르소, 띠르수스, 티르수스.
티르소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안도키우스(Andochius) 신부와 성 티르수스(또는 티르소) 부제와 성 펠릭스(Felix)는 스미르나(Smyrna)의 주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에 의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리아(Gallia)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오늘날 프랑스의 오툉(Autun)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총독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채찍과 곤봉으로 심하게 두들겨 맞고, 온종일 불 위에 매달아 놓았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자 결국 무거운 막대기로 그들을 목을 부러뜨리는 형벌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전승에 따르면 성 안도키우스 신부와 성 티르수스 부제는 성 폴리카르푸스 주교의 제자로 디종(Dijon)의 성 베니뇨(Benignus, 11월 1일) 신부와 함께 갈리아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론강(Rhone R.)과 손강(Saone R.)을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고, 성 안도키우스와 성 티르수스는 오툉 근처의 솔리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성 펠릭스라는 상인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며 그를 개종시켰다.
그 후 그들 모두 체포되어 총독의 심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24일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 오툉 지방의 솔리외에서 성 안도키우스와 성 티르수스 그리고 성 펠릭스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파치피코
- 가톨릭 성인 이름
Pacif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653-1721년 산 세베리노
파치피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치피꼬, 빠치피꾸스, 파치피쿠스, 파키피코, 파키피쿠스.
파치피코 자료
성 파치피쿠스(또는 파치피코)는 안토니우스 디비니와 마리아 브루니의 아들로서 세례명은 가롤루스 안토니우스(Carolus Antonius)였다. 다섯 살 때에 양친을 잃은 그는 거칠고 난폭했던 외삼촌댁에서 자랐다.
외삼촌은 그를 마치 하인인 양 마구 다루었으나 어린 파치피쿠스는 17세가 될 때까지는 오로지 참기만 하였다. 1670년 그는 포라노에 있던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서 파치피쿠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그는 25세 때에 사제가 되었으며, 회원들에게 2년간 철학을 가르치다가 인근 마을이나 교회가 없는 곳을 골라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강론은 지극히 부드럽고 단순했으므로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넉넉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인하여 그는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조차 불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오로지 기도와 보속에만 전념하다가 운명하였다.
특히 그는 사보이아(Savoia)가 터키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한다는 예언을 적중하여 큰 공경을 받았고, 또 미사 중에는 자주 탈혼에 빠졌는데 가끔 탈혼 상태가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1786년 8월 4일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파프누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phnu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파프누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파프누시우스, 파프누씨오, 파프누씨우스, 파프누티오, 파프누티우스.
파프누시오 자료
성 파프누티우스(또는 파프누시오)는 이집트의 은수자로서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와 동료들의 순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솔리외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안도키우스(Andochius) 신부와 성 티르수스(Thyrsus) 부제와 성 펠릭스는 스미르나(Smyrna)의 주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에 의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리아(Gallia)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오늘날 프랑스의 오툉(Autun)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총독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채찍과 곤봉으로 심하게 두들겨 맞고, 온종일 불 위에 매달아 놓았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자 결국 무거운 막대기로 그들을 목을 부러뜨리는 형벌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전승에 따르면 성 안도키우스 신부와 성 티르수스 부제는 성 폴리카르푸스 주교의 제자로 디종(Dijon)의 성 베니뇨(Benignus, 11월 1일) 신부와 함께 갈리아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론강(Rhone R.)과 손강(Saone R.)을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고, 성 안도키우스와 성 티르수스는 오툉 근처의 솔리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성 펠릭스라는 상인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며 그를 개종시켰다.
그 후 그들 모두 체포되어 총독의 심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24일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 오툉 지방의 솔리외에서 성 안도키우스와 성 티르수스 그리고 성 펠릭스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헤르쿨라노
- 가톨릭 성인 이름
Hercul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헤르쿨라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헤르꿀라노, 헤르꿀라누스, 헤르쿨라누스.
헤르쿨라노 자료
성 헤르쿨라누스(또는 헤르쿨라노)는 로마제국의 군인으로 교황 성 알렉산데르 1세(Alexander I, 5월 3일)에 의해 개종한 후 오래되지 않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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