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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지타 여자세례명 2인 목록

피어나네 2023. 10. 3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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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지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2인 목록

 

 

 

 

비르지타 여자세례명 목록

 

  1. 비르지타 (7월 23일)

  2. 최 비르지타 (5월 29일)

 

비르지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2인 목록

 

 

1. 비르지타

 

  • 세례명 축일
    7월 2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Birgitta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3-1373년 스웨덴

 

 

비르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브리지따, 브리지타, 브리짓다, 비르지따, 비르짓다, 비리시다.

 

 

비르지타 이야기

1303년 스웨덴 우플란드(Uppland)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비르거(Birger)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인게보르크(Ingeborg) 사이에서 태어난 성녀 비르지타는 12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는데, 그때부터 계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훗날 네레시아 지방의 총독이 된 18세의 귀족 울프 구드마르손(Ulf Gudmarsson)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이다.

1335년 그녀는 스웨덴의 왕 마뉴스 2세와 막 결혼한 왕비 나무르의 불랑쉬(Blanche)의 시녀가 되었다. 비르지타의 큰딸이 결혼에 실패하고 또 그녀의 막내아들 구드마르(Gudmar)가 1340년에 죽게 되자, 그녀는 노르웨이 트론디엠의 성 올리프 경당으로 순례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궁중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재차 순례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라스에서 병을 얻었고, 이때 그녀는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환시를 보았다.

1344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알바스트라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4년을 지냈다. 이때에도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고, 고해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이러한 계시에 따라 그녀는 1346년에 바드스테나(Vadstena)에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를 세웠고, 마뉴스 왕도 여기에 거처하였다. 이것이 '삼위일체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다. 바드스테나는 15세기 스웨덴의 지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그녀는 라트비아(Latvia)와 에스토니아(Estonia)의 이교도들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려는 국왕 마뉴스의 지원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당시 아비뇽(Avignon)에 유배 중이던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환시 내용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교황은 안전하게 로마(Roma)로 돌아올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에 교황이 중재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빈민구제에 온 정열을 쏟았으며, 당시의 심각한 교회와 정치사이의 제 문제에 대하여 기탄없는 충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엄격한 생활과 성덕,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에 대한 관심 및 교황의 로마 귀환에 대한 노력 등이 로마 전체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로마 주변의 수도원을 개혁하였고, 그녀의 예언과 고위직책에 대한 탄핵은 유명하였다. 그녀는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는 문제를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으나, 우르바누스(Urbanus) 교황만이 잠시 귀향하였고 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는 여전히 아비뇽에 있었다.

그녀의 구술로 적은 “계시”라는 책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내용으로 당대에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그녀의 시성과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서 그러하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녀가 정통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역설한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체험들은 모두가 진실하며 교리와도 부합된다고 갑론을박하였다.

그녀의 사후 트렌토(Trento) 공의회는 그녀의 “계시”를 세심히 검토하도록 하였는데, 결국 신자들이 읽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녀는 스웨덴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최 비르지타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崔 Brigid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3-1839년 한국

 

 

최 비르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브리지따, 브리지타, 브리짓다, 비르지따, 비르짓다, 비리시다.

 

 

최 비르지타 이야기

최(崔) 비르지타(Birgitta)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신유박해 때 남편이 교우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 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 요한은 그녀의 조카이다.

최 비르지타의 남편은 유배된 다음에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대세를 줄 교우를 불러올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남편이 다시 살아난다면 남편과 정결을 지켜 남매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 자신이 대세를 주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오빠에게로 돌아왔다. 그 오빠가 곧 최해성 요한의 부친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요한은 가족을 피신시킨 뒤에 집으로 천주교 서적을 가지러 갔다가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최 비르지타는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렵지 않게 조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관원들이 신분을 묻자, 최 비르지타는 “옥에 갇혀 있는 최 요한의 어미요. 아들을 보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관원들이 “그렇다면, 너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냐?”라고 하자, 그녀는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교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원들은 ‘배교하지 않으면 아들을 만날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최 비르지타는 배교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관원은 최 비르지타를 죄인이라고 지목하면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이를 참고 견디어 냈다. 그러자 관원은 그녀를 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최 비르지타는 금방 죽지 않고 4개월 동안 옥중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4개월 뒤에도 최 비르지타가 죽지 않은 것을 본 관원은 다시 똑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3일 안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때 옥리들은 3일 안에는 그녀를 굶겨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에 옥으로 들어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8일(음력 11월 3일)과 9일 밤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최 비르지타가 순교한 뒤, 옥리의 어머니는 옥에 갇혀 있던 한 교우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최 비르지타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거든요.”

최 비르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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