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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여자세례명 2가지

피어나네 2023. 11. 2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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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아피아, 체칠리아, 총 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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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남자세례명 마르코, 스테파노, 프라그마시오, 필레몬,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1월 22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2가지

 

 

 

 

11월 22일 여자세례명 목록

 

  1. 아피아

  2. 체칠리아

 

11월 22일 여자세례명 2가지

 

 

1. 아피아

 

  • 가톨릭 성인 이름
    Apphi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바오로의 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아피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삐아, 압삐아, 압피아.

 

 

아피아 자료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ia) 지방의 콜로새(Colossae)에 살던 성 필레몬(Philemon)은 성 바오로(Paulus)에 의하여 아마도 에페수스(Ephesus)에서 개종한 듯하며, 사도 바오로의 편지를 받은 인물이다.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와 우리 형제 티모테오가 사랑하는 우리의 협력자 필레몬에게, 그리고 아피아 자매와 우리의 전우 아르키포스, 또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인사합니다."(필레 1,1-2)로 바오로의 편지가 시작된다.

전승에 따르면 성 필레몬은 성 오네시무스(Onesimus, 2월 16일)를 해방시켰고, 콜로새에서 아내인 성녀 아피아와 함께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체칠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Cecili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30년경

 

 

체칠리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실리아, 쎄실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체칠리아 자료

여러 필사본으로 전래된 성녀 체칠리아(Caecilia)의 순교록은 5세기 중엽에 기록되었다. 그 전승들에 의하면, 그녀는 로마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면서 평생 동정을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

성녀 체칠리아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이교도인 성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4월 14일)라는 귀족 청년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식이 끝난 후 그에게 자신은 동정 서약을 하였으며 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음을 말하였다.

성 발레리아누스는 그 천사를 보게 해 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성녀 체칠리아는 먼저 그를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Urbanus I, 5월 25일)에게 보내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는 백합으로 장식된 관을 쓴 두 천사가 성녀 체칠리아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결국 그녀의 동정서약에 동의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인 성 티부르티우스(Tiburtius, 4월 14일)도 후에 천사를 보고 교황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성 발레리아누스와 성 티부르티우스 형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멀리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활동과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총독인 알마키우스(Almachius)의 미움을 사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에 희생 제사를 바치라는 총독의 강요를 거절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수하여 심한 매질을 당한 후 로마 근교 아피아 가도(Via Appia)에서 참수형을 받고 성 막시무스(Maximus, 4월 14일)와 함께 순교하였다.

총독의 시종이었던 성 막시무스는 성 발레리아누스와 성 티부르티우스가 그리스도에 대해 보여준 굳은 신앙과 용기에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해 순교하였다.

성녀 체칠리아는 이들 세 명의 순교자들의 장례를 지내주고 그들의 시신을 아피아 가도에 있는 프레테스타투스(Praetestatus) 카타콤바에 안장하였다.

순교자들의 장례를 지낸 후 체포된 성녀 체칠리아는 총독으로부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녀는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알마키우스 총독 앞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밝혔다. 총독은 도저히 그녀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해 결국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 방법은 그 당시 흔히 사형수에게 적용된 것으로 목욕탕에 가두고 쪄서 죽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목욕탕에 가둔 지 24시간이 지났음에도 성녀 체칠리아가 죽지 않자 당황한 총독은 목을 베어 죽이기로 재차 결정하였다. 그러나 형리의 서툰 솜씨 때문에 세 번이나 칼로 목을 베인 후에도 성녀는 3일 동안이나 숨이 붙어 있어 모진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중에도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오른손 손가락 3개와 왼손의 검지를 펴서 자기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에게 자기 집을 성당으로 사용하도록 봉헌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시신은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에 모셔졌고, 곧 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성녀 체칠리아에 대한 공경은 여러 세기를 지나며 교회 안에서 보편화되었고, 그녀의 행적들이 수많은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순교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옛 “로마 순교록”이 성녀 체칠리아와 성 발레리아누스 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222-235년 재위) 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기에 그들의 순교 연대를 어느 정도 추정할 뿐이다.

9세기에 교황 성 파스칼 1세(Paschalis I, 2월 11일)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 있던 성녀 체칠리아의 집터에 그녀를 기념해 새로 성당을 건립하고 카타콤바에 있던 성녀 체칠리아의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 모셨다(821년).

그리고 1599년 이 성당을 재건축하면서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도 성녀의 유해는 부패하지 않고 마치 살아 있는 듯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녀 체칠리아는 교회 음악과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원치 않았던 결혼식 때 성녀 체칠리아는 결혼 음악과 환호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오히려 내심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순교록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음악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여겨졌고, 1584년 로마에 음악원이 세워질 때 그 학원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체칠리아를 교회 음악의 수호자로 공경하는 것이 점차 보편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녀 체칠리아의 문장은 오르간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 천사들 곁에서 오르간이나 비올라 등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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