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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타 여자세례명 11인 목록

피어나네 2023. 1. 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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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아가타는 아가다, 아가따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아가타 11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아가타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아가타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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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11인 목록

 

 

 

 

아가타 여자세례명 목록

 

  1. 권진이 아가타 (9월 20일)

  2. 김아기 아가타 (9월 20일)

  3.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5월 29일)

  4. 아가타 (2월 5일)

  5. 윤점혜 아가타 (5월 29일)

  6. 이 아가타 (9월 20일)

  7. 이간난 아가타 (9월 20일)

  8. 이경이 아가타 (9월 20일)

  9. 이조이 아가타 (9월 20일)

  10. 전경협 아가타 (9월 20일)

  11. 한신애 아가타 (5월 29일)

 

아가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11가지

 

 

1. 권진이 아가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權珍伊 Agath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9-1840년 한국

 

 

권진이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권 아가다, 권 아가타, 권아가다, 권아가타, 아가다, 아가타.

 

 

권진이 아가타 이야기

성녀 권진이 아가타는 당대에 문장과 명필로 뛰어났던 학자이며 몰락 양반인 권 진사와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의 딸로 태어났다.

권 진사는 중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외교인 아내인 한영이에게도 가르쳐 입교시켰으나, 그 당시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임종 때 가서야 영세를 받고 가족들도 함께 세례를 받게 했던 것이다.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는 과부가 된 후 가진 것이 없어 무척이나 고생을 하였으나, 남편의 간곡한 유언에 따라 수절함과 동시에 정성을 다하여 권 아가타를 양육하였다.

그러나 권 아가타는 차차 성숙하면서 미모가 빼어났고 굳은 신앙심을 가진 아름다운 규수로 꼽혔기에 교우들 중에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권 아가타는 13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모든 예절을 갖추어 식은 올렸지만, 시골에 살던 그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집에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 집에 기거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보게 되었다.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왔을 때 아가타는 그의 처소에 살림꾼으로 들어갔는데, 아가타는 타고난 미모와 민첩한 지혜와 여러 가지 재주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온화한 여자였으므로 신부는 그를 매우 귀여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가타가 동정을 지킬 의향이 있음을 말하자, 혼인식만 하고 동거하기 이전임으로 혼인을 무효화시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위험에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 되어 한 동안은 좋지 않은 소문으로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때 모방 나 신부가 입국하여 모든 소문을 없앴음으로 아가타는 모방 신부의 어버이다운 권고와 충고를 듣고 용기를 내어 새 출발을 하였다.

아가타는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데 전심하고, 보속과 열렬한 기도로 과거의 자기 행동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졌던 이들을 오히려 덕의 길로 권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기워 갚고 하느님께 그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아가타는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이러한 속죄와 신심생활을 하던 중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아가타를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1839년 7월 17일 밤 어머니와 이 아가타 그리고 권 아가타가 붙잡혔는데, 관원은 어머니만 옥에 가두고 두 아가타는 사관청에 두고 옥졸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때 배교자 김여상이 아가타를 꾀면서 그와 함께 도망치자고 하였으나 아가타는 멸시하는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포교들이 아가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아가타는 며칠 후 이 아가타와 함께 도망하였다.

결국 이 사건이 탄로되자 포장이 파직되고 군졸 하나는 사형을 당했으며 둘은 귀양을 갔다. 이윽고 권 아가타는 재차 체포되어 온갖 형벌을 받을 수 없이 받았지만 그녀의 신앙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그 후 형조로 옮겨져 3차에 걸쳐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최초의 마음을 꾸준히 지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도를 봉행하는 것이 뼈 속에까지 배었고 귀신을 공경하는 것이 본성이 되어 여자 중에 놀랄만한 요술쟁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녀는 1840년 1월 31일 먼저 순교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당고개에서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그녀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김아기 아가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阿只 Agath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0-1839년 한국

 

 

김아기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아가다, 김 아가타, 김아가다, 김아가타, 아가다, 아가타.

 

 

김아기 아가타 이야기

성녀 김아기 아가타는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미신을 몹시 섬기던 어느 외교인에게 출가하여 오랫동안 미신을 숭상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친정 언니가 신자였음으로 제사의 무익함과 우상숭배의 헛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의 꾸지람을 무릅쓰고 집에 꾸며 놓았던 우상과 그림을 불에 태워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워낙 우둔하여 비록 신앙과 열심은 지극하였지만, 끝끝내 아침과 저녁기도의 기도문과 12단조차 외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에 아가타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포장이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사실이냐?”라고 묻자, 김 아가타는 “저는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만약 너를 형벌하여 죽게까지 된다 하여도 예수 마리아를 배반하지 않겠느냐?”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으므로 포장은 그녀를 형조 옥으로 이송하였다.

김 아가타가 들어가자 신자들은 웃으며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타가 왔군.” 하고 말하며, 그녀의 굳은 믿음을 칭찬한 후 중요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3년간의 이러한 옥중생활 속에서 수많은 형벌과 고통을 받았지만 김 아가타는 이 모든 것을 달갑게 받고 1839년 5월 24일에 서소문 밖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允德 Agatha Magdalene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5?-1815년 한국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아가타 막달레나, 김아가타 막달레나, 마들렌, 막딸레나, 아가다, 아가따.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이야기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Agatha Magdalena)는, 장성한 뒤에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김 아가타 막달레나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문초하던 관헌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조물주이신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김 아가타 막달레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

이내 감사는, 그녀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고, 그녀는 막 감영의 대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김 안드레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힘써 권면하였다.

김 안드레아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 아가타 막달레나의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갔다. 놀란 관장이 ‘방금 나갔는데, 왜 다시 들어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

관장은 화가 나서 미친년으로 몰아 내쫓게 하였다. 그러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다시 들어와서 이전의 배교를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취소하였고, 관장은 화가 나서 심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그녀의 살점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으며, 얼마 되지 않아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내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끌려갔는데, 옥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1815년 음력 4월 말, 또는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가타

 

  • 세례명 축일
    2월 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gath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49/251년? 카타니아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아가타 이야기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녀 아가타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카타니아 혹은 팔레르모(Palermo)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하고 스스로 정결 서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선(善)’ 또는 ‘좋음’을 뜻하는 ‘아가토스’에서 유래한 이름만큼이나 착하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미모에 반한 그 지방 총독 퀸티아누스(Quintianus)가 그녀에게 청혼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는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일 때였다. 청혼을 거절당한 총독은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으로 박해를 이용하였다. 성녀 아가타가 끝까지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퀸티아누스는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그녀를 매음굴에 보내는 등 협박과 회유를 그치지 않았다.

그 어떤 고통에도 성녀 아가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퀸티아누스 총독은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성녀 아가타는 “내 육체는 도려낼지라도 내 영혼을 도려낼 수 없을 것이오.”라고 당당히 말했다.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성녀 아가타는 환시 중에 성 베드로(Petrus)를 보았고, 성 베드로는 천사와 함께 나타나 성녀 아가타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결국 총독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글거리는 석탄불에 돌리면서 구워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보통 교회 미술에서 성녀 아가타는 한 쌍의 집게나 접시에 담은 자신의 가슴을 들고 있거나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훗날 이것이 잘못 전해져 접시 위의 빵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래서 성녀 아가타 축일에 빵을 축복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

성녀 아가타를 공경하는 신심은 일찍부터 시칠리아 전역으로 퍼졌고, 나아가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에 의해 로마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로마 전문)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공경을 받아왔다.

특별히 성녀 아가타는 출생지이자 순교지인 시칠리아 섬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 산(Etna) 인근 지역에서는 화산 폭발로 유황과 돌들이 분출했을 때 성녀의 무덤에서 나온 베일이 마을 사람들을 위험에서 보호해주었다는 기적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성녀 아가타는 처녀, 양치는 여자, 종 만드는 사람, 유리 제조공, 광부, 알프스 등반 안내자, 유방 관련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자 불과 날씨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윤점혜 아가타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尹占惠 Agatha

  • 신분과 직업
    양반,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윤점혜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윤 아가타, 윤아가타.

 

 

윤점혜 아가타 이야기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려고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자 옷을 지어 숨겨 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 오빠 윤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윤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가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5년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으며, 2년 뒤에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야고보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하게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윤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뒷날 그녀는 윤점혜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하였다.

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윤점혜 아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이 아가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Agath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3-1840년 한국

 

 

이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이 아가다, 이아가다, 이아가타.

 

 

이 아가타 이야기

성녀 이 아가타는 서울에서 출생했고, 앞서 순교한 이광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회장과 권희 바르바라(Barbara)의 딸로서 온 가족이 함께 1839년 4월 7일에 체포되었다.

당시 80세의 할머니와 8세의 남동생은 석방되고, 이 아가타는 17세의 어린 처녀의 몸으로 부모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는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다.

당시 그녀의 집은 남명혁 다미아누스(Damianus)의 집과 이웃하여 있었는데, 배교자의 밀고로 양쪽 집안 식구들이 모두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 아가타는 포도청에서 형조로 옮겨 갔다가 다시 처음 갇혔던 포도청으로 끌려왔다. 형조판서는 어린이들을 형조에서 심문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다는 구실로 남명혁 다미아누스의 아들과 이영희 막달레나(Magdalena)의 조카딸과 이 아가타의 남동생과 함께 포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들은 부모와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포청에 끌려온 이 아가타는 주림과 목마름뿐 아니라 고문까지 거듭 당했는데, 3백 대 이상의 태장과 곤장 90대를 맞았다.

형리들은 그녀에게 부모가 배교하고 석방되어 집에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때 아가타는 동생의 대답까지 대신하여 “저희 부모님이 배교를 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는 늘 섬겨 온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신앙을 더욱 분명히 했다.

이 아가타는 9개월 이상이나 옥중에서 온갖 고통을 당했고 또 파렴치한 옥졸 손아귀에 혼자 갇혀 있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순결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김 테레사(Teresia)와 함께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때는 1840년 1월 9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이간난 아가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干蘭 Agath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4-1846년 한국

 

 

이간난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이 아가다, 이 아가타, 이아가다, 이아가타.

 

 

이간난 아가타 이야기

성녀 이간난 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 시집을 갔으나 3년 후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혼자 생활하였다.

1834년에야 비로소 천주교 이야기를 들은 후 그녀는 재가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신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간청하였다. 다행히 친척 중에 신자 한 명이 있어 쉽게 원을 풀 수 있었다.

이 친척이 아가타와 그 어머니와 오라비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여 믿게 하였고,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는 천주교를 매우 싫어했는데, 집안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알자 크게 노하여 아내와 아들은 경상도로 쫓아버리고, 아가타는 남편이 죽고 없는 시집으로 돌려보냈다.

아가타는 아버지의 뜻대로 남편도 없는 시집으로 되돌아가서 온순하고 친절하게 시집 식구들을 대한 결과 시집 식구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시누이 한 사람까지 입교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시집에서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으므로 아가타는 약간의 돈을 모아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사서 가까운 여교우들과 함께 이사하였다.

이사한 집에서 아가타는 열렬한 신앙으로 여러 가지 고신극기를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단식하여 신자들로부터 “거울과 같이 맑고 눈과 같이 희다”는 평판을 들었다.

1846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얼마동안 자신의 집에 숨어 지냈으나, 7월 15일에 현석문 카롤루스(Carolus)의 집에 있다가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테레사(Teresia), 정철염 카타리나(Catharina)와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아가타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포졸들에게 “우선 내 집에 가서 옷가지를 가지고 떠납시다.”라고 말할 정도로 순교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당해야 했던 고문과 형별을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어느 증인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한 동안 배교의 유혹을 받아 약간의 내적 동요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인내하여 마지막으로 곤장 50대를 맞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33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이경이 아가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璟伊 Agath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3-1840년 한국

 

 

이경이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이 아가다, 이 아가타, 이아가다, 이아가타.

 

 

이경이 아가타 이야기

성녀 이경이 아가타는 원래 천주교를 믿는 시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후에는 궁녀를 감독하던 내시에게 속아서 출가하였지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그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라는 선언을 받았다.

그래서 남편과 헤어졌지만 친정어머니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와 그녀의 딸인 권진이 아가타의 집에 의지해 함께 살았다. 이 아가타는 같은 처지이던 그들과 함께 항상 기도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기해박해가 극에 달했던 1839년 7월 17일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잡혔는데, 포장은 그들의 성명을 물은 다음 같이 잡힌 한 막달레나만 옥에 가두고 권 아가타와 이 아가타는 이웃집에 남겨두고 지키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을 감옥에 가두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는데, 배교자 김여상이 찾아가서 권 아가타를 감언이설로 꾀어 함께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포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막기 위하여 이 이가타를 풀어주었다.

한편 조정에서도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고 난 다음 관원을 파면시키고, 여러 포졸들을 귀양 보내고, 그들을 다시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아가타와 권 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초라한 신자 집에 숨어 있었는데, 함께 탈출했던 여종이 먼저 잡혀서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다시 붙잡히게 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으로 압송된 이 아가타는 무서운 형벌을 받았지만 불굴의 인내심으로 형벌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형조로 옮겨져서도 새로운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순교의 의지를 더욱 굳혔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27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이조이 아가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召史 Agath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4-1839년 한국

 

 

이조이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이 소사, 이 아가다, 이 아가타, 이 조이, 이소사, 이아가다, 이아가타.

 

 

이조이 아가타 이야기

성녀 이조이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의 구월에서 태어났고, 1838년에 순교한 이호영 베드로(Petrus)의 누님이다. 그녀는 17세의 나이로 어느 외교인에게 출가하여 3년을 살다가 남편과 사별했는데, 현석문 카롤루스는 기해일기에서 아가타의 생활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얼마 아니 되는 가산마저 없이 한 후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과 함께 근근이 살았는데, 그때에 그녀가 당한 고난은 필설로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곤궁 중에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 화평한 기색과 기쁜 웃음이 떠나지 아니 하였으니. 그녀의 착하고 아름다운 언행을 모두 기록하기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1835년 2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 아가타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어서 그녀의 올케마저 잡아가려 하자, “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내버려두시오” 하고 말하여 올케만은 어린애들과 노모를 돌보게 하였다고 한다.

판관 앞에 불려나간 이 아가타는 모진 매를 맞고 주리를 틀리었으나, 조금도 겁내는 빛을 보이지 않았고 또한 그녀의 용기는 조금도 꺾이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3년 남짓 오랜 옥고를 치른 끝에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39년 5월 24일, 그녀는 여덟 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달구지에 태워져 포청을 떠나 형장으로 향했다. 아가타는 우마차 위에서도 다른 때와 같이 온화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고, 우마차에서 내리면서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았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전경협 아가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全敬俠 Agatha

  • 신분과 직업
    궁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0-1839년 한국

 

 

전경협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전 아가다, 전 아가타, 전아가다, 전아가타.

 

 

전경협 아가타 이야기

성녀 전경협 아가타는 서울의 외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살 때, 안형광이라는 궁녀가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때 그녀는 궁녀이던 박희순 루치아(Lucia)를 만났고, 그녀의 감화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훌륭히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편안하고 사치스런 궁중 생활을 용감히 박차고 병을 빙자하여 루치아에게 가서 함께 살았다.

아가타는 성품이 점잖고 강직하며 또한 뛰어나게 영리하였으므로 교우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 기도와 독서와 묵상과 덕행에 전심하며 상냥함과 겸손한 태도로써 많은 외교인들의 마음까지 감동시켜 이들을 회두시켰다고 한다. 그녀는 자주 병을 앓으면서도 불평을 말하는 법이 없었고, 궁중의 사치와 맛있는 음식을 그리워하는 일도 없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붙잡힐 줄 미리 알고 집에서 태연하게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4월 15일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포장이 “너는 궁녀로서 다른 부녀들과는 다른데 어떻게 사도에 혹하였느냐?” 하고 묻자 아가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요 주재이십니다. 이 천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기르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며,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니 그분은 우리의 대군대부이십니다.”

다른 문초 중에 위와 비슷한 질문에 대하여 그녀는 아래와 같이 재치 있고 힘찬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재목 없이 어떻게 집이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대들보가 집에 가장 중요한 재목이라면 우리를 보존하시는 천주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이유로 그분을 공경하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포장은 그녀의 신앙을 꺾기 위하여 형벌을 가하기도 하고 혹은 감언으로 달래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포장은 아가타를 형조로 보냈고 형조판서도 포장과 비슷한 질문을 하였다. 아가타는 다섯 차례나 삼릉장으로 몹시 맞아 살아 헤어져 떨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피가 땅을 적시었으나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아니하여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하였다고 한다.

아가타에게는 조그마한 관직을 가지고 있던 비신자 오라버니가 있었는데, 그는 관직을 잃고 패가망신할까 두려워 동생에게 배교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아가타가 그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자 그녀의 오라버니는 동생을 독살할 생각으로 꿀과 계란과 연백으로 만든 과자를 동생에게 보냈다.

아가타는 수상히 여겨 비녀로 그것을 찔러보니 비녀의 색깔이 금방 변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실패한 것을 안 오라버니는 포졸에게 뇌물을 주며 몽둥이로 쳐 죽여 달라고 하여 아가타는 여러 차례 삼모장으로 맞았다고 한다.

이렇게 6개월가량 옥에 있던 아가타는 마침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때는 1839년 9월 26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한신애 아가타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韓新愛 Agath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한신애 아가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다, 아가따, 한 아가타, 한아가타.

 

 

한신애 아가타 이야기

한신애(韓新愛) 아가타는 충청도 보령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장성한 뒤에 한양에 살던 조례산의 후처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다가 1795-1796년경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전교 덕택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 아가타는, 전처의 딸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강 골룸바의 집을 오가면서 정복혜 칸디다 등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고, 자신의 종이었던 소명을 강 골룸바의 집으로 보내 교리를 배우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 여름,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한 아가타는 그동안 다른 가족과 종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을 천주교에 입교시킬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열심히면서 교리에 밝은 남자 교우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먼저 종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김연이 율리아나를 비롯하여 많은 여성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강완숙 골룸바와 함께 여성 공동체를 이끌어 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정 칸디다가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거두어 오자, 한 아가타는 이를 자신의 집 곳간에 숨겨 두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면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한신애 아가타는 형조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지만,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강완숙 골룸바, 김연이 율리아나 등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그녀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신애는 천주교에 빠져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천해 왔으며, …… 강완숙과 체결하여 주문모를 찾아보고 세례와 세례명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각처의 남녀 무리들을 집으로 불러들였고, 서적과 교회 물건들을 곳간에 숨겨 두었다. 그러다가 체포된 후에는 ‘스스로 지은 죄를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하였다.”

한신애 아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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