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마르티노는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마르티노 15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마르티노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마르티노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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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노
천주교 남자세례명
15인 목록
마르티노 남자세례명 목록
- 마르티노 (1월 12일)
- 마르티노 (1월 31일)
- 마르티노(승천의) (2월 6일)
- 마르티노 (3월 20일)
- 마르티노 1세 (4월 13일)
- 양재현 마르티노 (5월 29일)
- 이중배 마르티노 (5월 29일)
- 인언민 마르티노 (5월 29일)
- 마르티노 (6월 21일)
- 마르티노 (7월 1일)
- 마르티노 (7월 19일)
- 마르티노 (8월 3일)
- 마르티노 (10월 24일)
- 마르티노 데 포레스 (11월 3일)
- 마르티노 (11월 11일)
1.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1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03년 레온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에스파냐 북부 레온에서 태어났다. 그는 산 마르셀로(San Marcelo)에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한 다음 레온의 성 이시도루스(Isidorus) 수도원으로 옮겼다. 그는 다작의 금욕주의적 저자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1월 3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56년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누엘,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Coimbra) 근교에서 태어난 성 마르티누스 마누엘(Martinus Manuel, 또는 마르티노)은 시우레(Siure) 성당의 수석사제로서 헌신하던 중 사라센인들에게 체포되어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Cordoba)의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혹독한 취급을 받은 그는 결국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르티노(승천의)
- 세례명 축일
2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of Ascension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67-1597년 일본
마르티노(승천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이나스, 로이나즈,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르틴, 마틴, 말딩.
마르티노(승천의) 이야기
승천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de la Ascension, 또는 승천의 성 마르티노)는 1567년에 에스파냐 북부 기푸스코아(Guipuzcoa)의 베아사인(Beasain)에서 태어나 마르틴 데 로이나스 이 아무나바로(Martin de Loinaz y Amunabarro)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바스크(Basque) 지방 출신이라는 것 외에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마드리드(Madrid)의 알칼라(Alkala)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586년 아우뇰(Aunon)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서원하면서 ‘승천의 성 마르티노’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의 산 베르나르디노(San Bernardino) 수도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590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으로 인해 수도원에서 교수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마침내 1592년 초에 멕시코로 가는 선교단에 포함되어 세비야(Seville)로 이동해 배를 탔으나 강한 폭풍을 만나 원정이 중단되고 말았다. 수도원으로 돌아와 다시 새로운 함대가 구성되기를 기다리던 그는 1593년에 멕시코로 떠나는 함대에 올라 멕시코시티(Mexico City)에 도착해 수도원에서 교수로 잠시 활동한 후 이듬해에 필리핀 마닐라(Manila)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에게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면서도 일본 선교에 대한 뜻을 놓지 않았는데, 맡은 바 책임 때문에 쉽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허락을 얻어 제자인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Franciscus Blanco)와 함께 1596년 초에 일본으로 향하는 포르투갈 배를 탔다.
제자와 함께 나가사키(長崎, Nagasaki) 항구에 도착한 그는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의 수도원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병자를 돌보는 일을 시작했고, 얼마 뒤에 오사카(Osaka, 大阪)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옮겨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과 병든 사람들을 돕는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그리스도인의 수도 크게 늘었고, 그로 인해 지방 영주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다.
사실 그 무렵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예수회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593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는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마닐라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의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 신부를 대사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파견하였다. 성 베드로 밥티스타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상을 평화롭게 이끌어 미야코에서 선교 활동에 필요한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1596년 여름 필리핀의 마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 호가 태풍으로 항로를 벗어나 일본 해안까지 밀려와 좌초하면서 스파이로 오해를 받는 등 일본과 에스파냐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게다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일정한 제한을 무시하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 결과 1596년 말부터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과 함께 박해가 시작되었고, 승천의 성 마르티노도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3일, 오사카에서 미야코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었던 승천의 성 마르티노 신부와 동료들은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長崎, Nagasaki)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승천의 성 마르티노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승천의 성 마르티노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승천의 성 마르티노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3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9년 브라가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프랑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기록에 의하면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당대의 최고 학자였고, 그리스도인 시인 포르투나투스는 그를 은혜를 수없이 입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원래 헝가리 판노니아(Pannonia) 지방 사람인데, 팔레스티나(Palestina)를 순례한 후에는 에스파냐의 갈리시아(Galicia)까지 갔다. 그는 여기서 국왕 테오도미르를 개종시켰다. 그 결과 수많은 다른 아리우스파(Arianism) 사람들과 배교자들을 로마 교회와 화해시켰다.
그의 선교 중심지는 두미오(Dumio)였다. 그는 '왕가의 주교'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자신의 생활은 지극히 엄격하여 은수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브라가 교구의 주교로서 죽을 때까지 교구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다. 선교사의 직무 외에도 그는 저술로도 교회에 기여하였으니, "올바른 생활양식들"이란 저서를 비롯하여 "거친 사람들의 교화에 대하여"라는 윤리 서적도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르티노 1세
- 세례명 축일
4월 1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I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56년
마르티노 1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1세 이야기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토디(Todi)에서 태어난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로마로 온 뒤부터 그의 학덕과 신심이 널리 알려졌다.
부제 때 그는 교황 테오도로 1세(Theodorus I)의 대사 자격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갔었고, 649년 5월 14일 교황이 선종한 후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교황 선출 후 황제에게 승인받던 관행을 지키지 않고 같은 해 7월 5일 교황좌에 올랐다. 그럼으로써 종교 문제에 관한 한 황제로부터 독립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황제가 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교황이 된 후 가장 먼저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us) 이단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의를 확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즉위한 해에 바로 라테라노(Laterano)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해 단의설 이단을 단죄하고, 단의설 이단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고 교회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자 한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칙령 엑테시스(Ecthesis)와 콘스탄스 2세 황제의 칙령 티포스(Typos)를 거부했다. 아울러 교회 회의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바오로(Paulus)와 그의 선임자들을 파문했다. 그리고 정통 교의를 담은 20개의 규정을 발표했다.
성 마르티노 1세 교황의 결정은 아프리카와 영국 그리고 에스파냐의 주교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테살로니카의 주교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부터는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미 파문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바오로 총대주교는 콘스탄스 2세 황제의 티포스 칙령에 서명하도록 더욱 강력한 정책을 사용할 것을 황제에게 요구했고, 황제 또한 자신의 종교 정책에 도전한다고 생각해 즉시 교황을 체포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도록 라벤나의 총독인 올림피우스(Olympius)를 파견했다. 하지만 올림피우스는 교황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황제의 명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신임 총독 테오도루스 칼리오파스(Theodorus Calliopas)를 군대와 함께 로마로 파견하며, 교황이 비합법적으로 선출되었기에 파문되어야 한다며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해 오도록 했다.
당시 병중에 있던 교황은 라테라노 대성당에 은신했으나, 653년 6월 17일 총독과 군인들이 대성당까지 들어오자, 자신 때문에 로마의 대중들이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 항거하지 않고 황제에게 간다고 선포했다. 그는 6월 19일 병든 고령의 몸을 이끌고 에게해를 출발해 길고도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했다.
낙소스(Naxos)에서 거의 1년 정도 머물렀지만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654년 9월 17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는 오랫동안 대중의 조롱과 모욕을 받았다. 감옥으로 이송된 후에도 거의 3개월 정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그해 12월 19일에는 정통 교의에 대한 심문이 아닌 올림피우스의 반역에 동조했다는 반역죄 혐의로 심문을 받고, 갖가지 정치적 죄목들을 부과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후 감옥에서 다시 3개월 정도 지낸 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간청으로 황제에 의해 유배형을 받고 크림(Kyrm) 반도에 있는 케르소네수스(Chersonesus)로 유배를 떠났다.
유배지에 도착한 교황 성 마르티노 1세는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잔혹한 대우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656년 9월 16일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다. 그의 시신은 유배지 인근 성모 성당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로마의 성 마르티노 성당(San Martino ai Monti)으로 이장해 모셨다.
로마 교회는 정통 교의를 지키다가 유배지에서 온갖 수난을 겪고 삶을 마감한 그를 순교자로서 공경했는데, 그는 교황 중에서 순교자로 공경 되는 마지막 인물이다. 그의 축일은 과거 11월 12일에 기념했으나,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동방 교회와 함께 4월 13일에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4월 13일로 목록으로 옮겨 교황이자 순교자인 성 마르티노 1세에 대해 기록했다.
즉 그가 라테라노 교회 회의에서 단의설 이단을 단죄했고, 단의설을 지지하는 콘스탄스 2세 황제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유배형으로 감형된 후 2년 정도 케르소네수스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갔다고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양재현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梁在鉉 Martin - 신분과 직업
좌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7-1868년 한국
양재현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양 마르티노, 양마르티노.
양재현 마르티노 이야기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 마르티노(梁在鉉, Martinus)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 요한(李廷植, Joannes)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며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한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였기에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
양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옥졸은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며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양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곧장 다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양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후에도, 양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요한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양재현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1세로 1868년 9월이었다. 당시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양재현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이중배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李中培 Martin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1?-1801년 한국
이중배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이 마르티노, 이마르티노.
이중배 마르티노 이야기
이중배 마르티노(李中培, Martinus)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본디 용기와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호쾌한 기개가 있었다. 반면에 그에게는 난폭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도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마르티노가 처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797년이었다. 이때 그는 사촌인 원경도 요한(元景道, Joannes)과 함께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 요사팟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하였고, 이후로는 교회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특히 그는 누가 알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는데, 그의 용감한 성격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1800년의 예수 부활 대축일에 이 마르티노는 사촌인 원 요한과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며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던 여주의 관장이 포졸들을 풀어 은밀히 신자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고, 관장은 곧장 포졸들을 그곳으로 보내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하였다.
관청에 끌려가자마자 이 마르티노 일행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은 자주 이 마르티노의 굳센 용기와 격려로 힘을 얻어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마르티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함께 있는 신자들이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또 그는 사촌인 원 요한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찾아와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자 엄하게 꾸짖어 보냈으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아버님, 저는 효의 근본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저와 같은 신자이시니, 부자의 정을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바라본다면,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디 이 마르티노는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옥중에서 보여준 그의 의술은, 평소 같아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적 같은 효험을 나타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병을 치료받으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옥이 장터 같을 정도였고, 모든 이가 그 효험에 놀라워했다고 전하였다.
1800년 10월에 이 마르티노와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마르티노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 마르티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이에 앞서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이중배 마르티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없앴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중배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인언민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印彦敏 Martin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7-1800년 한국
인언민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인 마르티노, 인마르티노.
인언민 마르티노 이야기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 마르티노(印彦敏, Martinus)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인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남겨 두었으며, 얼마 뒤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李步玄, Franciscus)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 마르티노에게 가져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인언민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인언민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6월 2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50년 통에런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성 마르티누스(또는 마르티노)는 오늘날의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에 속한 림뷔르흐(Limburg) 지방 통에런의 제7대 주교로서 벨기에 북동부 에스베(Hesbaye) 사람들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7월 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4세기 비엔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1일 목록에서 프랑스 비엔의 주교이자 사도들의 제자인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들의 제자로서 교황 성 알렉산데르 1세(Alexander I, 5월 3일)에 의해 파견되어 프랑스 남동부 비엔의 제3대 주교가 되었고, 일부 전승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 재위) 때에 순교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의 후임 주교인 성 베로(Verus, 8월 1일)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4년에 소집한 제1차 아를(Arles) 공의회에 참석한 것으로 확인되기에, 성 마르티노의 주교직은 적어도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일 목록에서 프랑스 비엔의 주교인 성 마르티노의 이름만 간단히 전해주며 그의 선종 시기를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로 기록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7월 1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10년 트리어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로마 순교록의 기록에 의하면 독일 남서부 트리어의 제10대 주교였다. 그러나 그 기록에 그의 순교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8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80년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코, 마르쿠스, 마르티누스, 마크, 마틴, 말구,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24일 목록에서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에서 은수자로 살았던 성 마르쿠스(Marcus, 또는 마르코)에 대해 전해주면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고 전해주었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는 그의 이름을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라고 적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성 마르티노는 몬드라고네(Mondragone) 근처 몬테 마시코(Monte Massico)의 조그마한 동굴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살았다.
그가 처음 동굴에 도착했을 때 바위에서 수맥이 솟아 매일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 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또한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 매일 나타나서 3년 동안이나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확고한 믿음과 인내로써 그 모든 시련을 견디어 냈다.
그 후에 그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로 옮겨 동굴 속에서 은수자로 지내며 기도와 참회 생활에 전념했다. 그는 자기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 바위에 감아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529년경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을 떠나 몬테카시노로 이주한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가 그를 만났을 때, “만일 그대가 하느님의 종이라면 쇠사슬로 묶지 말고 그리스도의 영적 사슬로 묶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성 마르티노는 즉시 쇠사슬을 풀고 은수 생활에 전념하다가 580년 8월 3일 선종하였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가 행한 기적에 대해서도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3일로 기념일을 옮겨 캄파니아 지방 몬테 마시코의 매우 좁은 동굴에서 수년 동안 고독한 삶을 살았던 성 마르티노 은수자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10월 2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부제,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베르투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프랑스 낭트(Nantes) 출신인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프랑크계이며 성 펠릭스(Felix)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프와투(Poitou)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선 자신이 머문 집 주인 부부를 개종시켰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낭트 부근의 강변 숲 속으로 들어가서 은둔소를 지었는데, 이것이 베르투 대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에 대한 자세한 전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마르티노 데 포레스
- 세례명 축일
11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de Porres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79-1639년
마르티노 데 포레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데 포레스 이야기
성 마르티누스 데 포레스(Martinus de Porres, 또는 마르티노 데 포레스)는 1579년 12월 9일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에스파냐계 기사인 후안 데 포레스(Juan de Porres)와 페루 원주민 여자인 안나 바스케스(Anna Vasquez)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친자로 입적하지는 않았으나 양육과 교육에 있어서는 소홀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신앙심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보였던 그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당시 외과 의사를 겸하는 이발사 교육을 받았고, 3년 뒤에는 리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 재속 3회원으로 입회하였다.
9년 뒤에 도미니코회 수사가 되어 전 생애를 수도원에서 보냈다. 수도원 내에서 그는 이발사, 외과 의사, 의류수선, 진료소 관리 등 여러 직책을 담당했지만 혼자서 그 많은 일을 아무런 무리 없이 처리하였다. 그럼으로써 그의 영혼 속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또는 리마의 가난한 환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고, 자신이 받은 물품을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줌으로써 선종 전에도 이미 살아 있는 성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해외 선교지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기를 자주 열망하였으나 자기 ‘육체에 대한 순교’로써 만족해야만 했다. 대신 그에게는 많은 초자연적 은혜가 내려졌다. 그는 미물인 벌레조차 사랑했고 쥐조차 그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한번은 그의 수도원장이 빚에 몰려 곤경에 처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그저 가련한 종이고, 수도원의 재산이니 저를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
그가 복음 정신 안에서 애덕을 실천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단식 같은 금욕 생활을 꾸준히 실천한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늘 겸손한 자세로 남들이 꺼리는 청소 등을 도맡아 실천해 ‘빗자루 수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는 리마의 성녀 로사(Rosa, 8월 23일)와 가까운 친구였고 성 요한 마치아스(Joannes Macias, 9월 16일)와도 가까웠다. 그는 일생을 평범한 수사로 살다가 선종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이 참석해서 그를 운구했을 만큼 이미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1837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62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교황은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마땅히 훨씬 더 엄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장 쓰라린 모욕까지도 용서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으로 죄인들을 속량하려고 애썼다. 그는 사랑으로 병자들을 위로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과 의약품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농장의 노동자들과 흑인들 그리고 그 당시 노예와 비슷하게 간주하던 혼혈아들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붙여주었듯이, ‘애덕의 마르티노’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는 사생아라는 모욕과 피부 색깔로 인한 갖가지 경멸을 받았지만, 기도와 봉사를 통해 이를 극복했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3일 목록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가 사생아이자 혼혈인이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수사가 되어 페루 리마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희생을 실천하며 참회와 단식, 기도와 사랑으로 빛나는 단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마르티노
- 세례명 축일
11월 1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16?-397년 투르
마르티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이야기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는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316년경 헝가리 판노니아(Pannonia)의 사바리아(Sabaria)에서 태어났다.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로마제국 군대의 장교인 아버지가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로 전속되자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전기작가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는 “마르티노의 생애”(Vitae Martini)에서 이미 이탈리아 생활 중에 성 마르티노가 그리스도교를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는 얻었으나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는 여전히 제국 내에서 소수일 뿐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자기 뜻과는 달리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에 입대했지만 이미 마음은 그리스도를 따랐다고 기록하였다. 로마로 유학 간 그는 그곳에서 예비신자가 되었다.
성 마르티노가 속한 부대가 프랑스의 아미앵(Amiens) 근처에서 주둔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한 걸인을 만났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던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그 절반을 걸인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자기가 걸인에게 준 반쪽 망토를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교회 미술에서 즐겨 다루는 이 신비 체험을 한 후 그는 18세에 세례성사를 받고 얼마간 군대에서 더 생활한 후 제대하였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이민족이 갈리아 지방으로 침략해 오자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Julianus)는 출전을 앞둔 병사들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그들을 소집했다.
그때 스무 살 즈음의 성 마르티노는 황제 앞에서 봉급 받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군인으로서 황제를 섬겼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섬기려 한다면 제대를 요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군인 신분을 떠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 날 아침 무장 해제하고 십자가 하나만 들고 홀로 적진으로 가겠다고 했고, 놀랍게도 다음 날 적군의 사신이 황제에게 평화 제의를 해와 다행히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군대에서 제대한 성 마르티노는 푸아티에(Poitiers)의 성 힐라리오(Hilarius, 1월 13일)를 찾아가 그의 지도하에 은수자 생활을 하다가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먼저 어머니를 개종시키고 또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인도했으나 아버지만은 끝내 개종시키지 못했다. 일리리쿰(Illiricum, 오늘날의 발칸 반도 서부 지역)으로 가서는 공개적으로 아리우스파(Arianism)와 대적해 매를 맞고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고,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서는 아리우스파에 속한 밀라노(Milano)의 주교에 의해 추방을 당했다.
그는 한동안 리구리아해에 있는 갈리나리아(Gallinaria) 섬을 피신처 삼아 지내다가 360년경 아리우스파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던 푸아티에의 성 힐라리오 주교가 교구로 돌아오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푸아티에에서 8km 정도 떨어진 리귀제(Liguge)에서 성 힐라리오의 도움을 받아 은수자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은수자들이 그곳으로 몰려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갑자기 큰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 공동체가 결국 프랑스의 첫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투르의 주교가 선종하자 투르의 주민들은 성 마르티노에게 주교가 되어 주기를 간청했다. 수도 생활을 위해 주민들의 청을 거절했지만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받아들였다. 그는 371년 7월 4일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한동안 주교좌성당에서 활동하던 그는 투르 외곽의 마르무티에(Marmoutier)에서 80명의 제자와 함께 작은 골방에서 수도 생활을 하며 정열적으로 주교직을 수행했다.
교구의 각 본당을 일일이 걸어서 방문하고 전교에 힘을 쏟자 프랑스 지방 곳곳에서 이교도 신전의 파괴와 사람들의 개종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는 병자를 고쳐주고, 죽은 아이를 살리며, 짐승을 감화시키는 등 많은 기적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환시와 예언의 은사로도 유명했다.
그는 또한 프리실리아누스(Priscillianus) 이단을 격렬히 반대하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황제에게 이단자인 프리실리아누스의 생명을 구해 주길 청할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이단자라는 모함까지 받았지만, 성 마르티노는 이단자들을 성교회로 인도하고자 모든 것을 참아냈다.
술피키우스 세베루스의 편지에 보면, 성 마르티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교구 성직자들 간에 발생한 불화를 해결하고자 캉드(Candes) 지방 사목 방문을 떠났다.
그곳에서 성직자들 간의 화목을 이루고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던 중 병에 걸려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며 눈과 손을 하늘을 향해 드높인 채 기도했다.
그곳에 모인 성직자들이 몸을 돌려 편히 하시라고 청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마쳤을 때 악마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소리쳤다.
“피에 얼룩진 짐승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냐? 이놈아, 네가 받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아브라함의 품이 지금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이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397년 1월 8일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렸다.
그는 살아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고, 죽은 후에도 그의 무덤 위에 건립된 작은 경당은 수많은 순례자로 가득했다. 그는 프랑스 최고의 성인이며, 그의 유해가 모셔진 경당은 프랑스 최초의 순례지로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대표적인 순례지로 꼽히게 되었다.
그가 걸인에게 반쪽을 나눠준 외투 또한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Cappa Sancti Martini)로 불리며 중세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였고,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의 한 명인 그는 군인, 재봉사, 가난한 이, 가축과 목동의 수호자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유럽 교회에서 특별히 대림 시기에 기억되는 대표적 성인으로도 꼽힌다. 한 걸인에게 자기 망토를 나눠준 그의 사랑과 선행을 기억하며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1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전해주었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특히 이교도 출신 군인에서 걸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신자로서, 수도자로서, 사제로서, 주교로서 착한 목자의 길을 걸은 성 마르티노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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