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아나스타시아 여자세례명 6인 목록

피어나네 2023. 2. 7. 16:00
반응형

 

여자세례명 아나스타시아는 아나스따시아, 아나스타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아나스타시아 6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아나스타시아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아나스타시아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세례명 찾기

아나스타시아
천주교 여자세례명
6인 목록

 

 

 

 

아나스타시아 여자세례명 목록

 

  1. 아나스타시아 (3월 10일)

  2. 아나스타시아 (4월 15일)

  3.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5월 29일)

  4.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5월 29일)

  5. 아나스타시아 (10월 28일)

  6. 아나스타시아 (12월 25일)

 

아나스타시아 천주교 여자세례명 6인 목록

 

 

1. 아나스타시아

 

  • 세례명 축일
    3월 1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a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아나스타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아,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자세한 생애는 알 수 없지만 성녀 아나스타시아가 이집트 출신으로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궁중의 시녀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녀의 미모가 지극히 뛰어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황후 테오도라의 질투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녀는 온순하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고 또 늘 하느님을 두렵게 여기며 살았으므로, 황제의 총애와 황후의 질투를 피할 양으로 밤중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피신하여 수녀원으로 숨어버렸다.

황제는 밤낮으로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테오도라가 죽은 뒤에 그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 때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사막으로 은신하여 지내다가 다니엘(Daniel) 원장이 지도하는 공동체에 들어갔는데, 다니엘은 그녀를 어느 동굴에서 지내도록 배려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와 고행에 전념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 후 그녀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대하게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아나스타시아

 

  • 세례명 축일
    4월 1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a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5년경 로마

 

 

아나스타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아,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근거는 희박하지만 로마에 사는 성녀 바실리사(Basilissa)와 귀부인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로 사도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한 두 성인의 시신을 발견하여 장사지냈는데, 이 일로 인해 그들 역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후 네로 황제의 명에 따라 참수되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召史 Anastasia

  • 신분과 직업
    양인,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9-1839년 한국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아나스타시아, 김아나스타시아, 아나스따시아, 아나스타샤.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김조이(金召史)*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본디 김 아나스타시아는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로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더욱더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다.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였으니, 그녀의 권면은 그들에게 아주 유익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때에, 김 아나스타시아 부부는 다행히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들 부부는 피신한 곳에서 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를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때 그들 부부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딸 이 아나스타시아는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녀의 가정에 다시 박해의 위협이 닥쳐온 것은, 1839년 기해박해 때였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 아나스타시아의 남편은 집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밀고된 상황이었으므로 피신을 하기는 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딸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같이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에 도착한 뒤 김 아나스타시아는 여러 차례 신문을 당하였으나, 어떠한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주를 배반하고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라.’는 강요를 줄곧 거절하였으며, 이 때문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다시 형벌을 받은 뒤에 옥에 갇혔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언하고 옥으로 끌려왔다.

어느 날 김 아나스타시아는, 딸 이 아나스타시아가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오자, 짐짓 딸의 신앙을 의심하는 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

그러자 딸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마침내 김 아나스타시아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곤장을 맞고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으니,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의 상처로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조이는 그 남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익혔고,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을 고칠 줄을 모르니, 참수를 하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조이’는 과부 또는 나이 많은 여성을 젊잖게 가리키는 이두로, 한자로는 ‘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a

  • 신분과 직업
    양인, 소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7?-1839년 한국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아, 아나스타샤, 이 아나스타시아, 이아나스타시아.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이성삼 바오로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모들은 정해박해를 피해 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은 이 아나스타시아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귀여운 신심을 지닌 한 작은 천사였다.

그녀는 열 살 무렵에 교리 문답과 아침, 저녁 기도를 배운 다음, 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선교사는 그녀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그 마음에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아나스타시아의 덕행과 신심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가운데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 아나스타시아는 이내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서양 선교사가 간 곳을 묻자, 그녀는 나이가 어려 선교사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 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포졸과 옥리들은 이 아나스타시아의 나이가 어린 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녀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또한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위협을 당하였지만,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였다. 그녀는 이제 의지할 데조차 없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천주 안에서 힘을 얻어, 끝까지 자신의 영웅적인 결심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자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5일(음력 10월 30일)에서 6일 밤(음력 11월 1일)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나스타시아

 

  • 세례명 축일
    10월 2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3년 로마

 

 

아나스타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아,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한 성녀 아니스타시아는 동정녀였다. 그녀는 총독 프로부스(Probus)에게서 불과 매로 고문을 받았으나 끝끝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총독은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치아를 뽑았으며 손발을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 숨을 쉬면서 배교하지 않자 박해자는 하는 수 없이 참수시켰다는 것이다.

성 키릴루스(Cyrillus)는 그녀가 목말라하는 것을 보고 물을 갖다 주었다가 순교하였다. 그 당시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훌륭한 집안의 딸로서 동정을 지키려고 혼자 서원을 했고 순교할 당시 20세였다고 한다.

현재 이 두 성인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나스타시아

 

  • 세례명 축일
    12월 2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시르미움

 

 

아나스타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아,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판노니아(Pannonia) 지방 시르미움[오늘날의 세르비아 북부 사바(Sava) 강 유역 스렘스카 미트로비차(Sremska Mitrovica)] 태생으로 알려진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시르미움으로 갔다가 붙잡혀 같은 해 12월 25일 팔마리아(Palmaria) 섬에서 참수당했고, 유해는 훗날 성당으로 바뀐 아폴로니아(Apollonia)의 집에 안장되었다.

전설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로마의 귀족 프레텍사투스(Praetexatus)와 시르미움의 성녀 파우스타(Fausta, 12월 19일)의 딸로서, 어려서 아퀼레이아의 성 크리소고누스(Chrysogonus, 11월 24일)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방인이던 푸빌리우스(Pubilius)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선교여행을 떠나 아퀼레이아에서 시르미움까지 갔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그녀 역시 체포되었다.

그녀는 배에 실려서 이탈리아 서북부 리구리아해(Ligurian Sea)의 팔마리아 섬으로 끌려갔는데, 그 배에는 죄수들이 가득해 괴롭힘을 당하다가 성녀 테오도타(Theodota)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구출되기도 했다.

성녀 아나스타시아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많지 않고, 그 근거 또한 확실하지 않은 여러 이야기가 섞여 있지만, 그녀는 이미 5세기부터 로마에서 큰 공경을 받았다.

5세기 말 로마 미사경본의 감사기도(제1양식) 안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 중 한 명으로 추가되었고, 전통적으로 치유자와 구마자로서 공경을 받아왔다. 그녀의 유해는 크로아티아의 자다르(Zadar)에 있는 성녀 아나스타시아 주교좌성당에 모셔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

 

이름순 가톨릭 세례명

본받고 싶은 가톨릭 성인 찾기

pieonane.com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날짜순 천주교 세례명

어떤 세례명이 좋을까?

pieonane.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