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안나 여자세례명 10인 목록

피어나네 2023. 2. 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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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안나는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안나 10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안나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안나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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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천주교 여자세례명
10인 목록

 

 

 

 

안나 여자세례명 목록

 

  1. 이 안나 (5월 29일)

  2. 이시임 안나 (5월 29일)

  3. 안나 (성 바르톨로메오의) (6월 7일)

  4. 안나 마리아 타이지 (6월 9일)

  5.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 (7월 15일)

  6. 안나 (7월 23일)

  7. 안나 (7월 26일)

  8. 안나 린 (8월 30일)

  9. 김장금 안나 (9월 20일)

  10. 박아기 안나 (9월 20일)

 

안나 천주교 여자세례명 10인 목록

 

 

1. 이 안나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Anna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1-1867년 한국

 

 

이 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이안나.

 

 

이 안나 이야기

이(李)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교우 송(宋)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토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송씨(宋氏) 집안이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게 되자, 이 안나도 남편을 따라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그녀는 1867년 봄에 한양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으며, 진천 관아와 경기도의 죽산 관아를 거쳐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이 안나는 한양으로 압송된 다음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이 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이시임 안나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時壬 Anna

  • 신분과 직업
    양반,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2-1816년 한국

 

 

이시임 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이 안나, 이안나.

 

 

이시임 안나 이야기

1782년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나이가 들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의 집안은 본디 무관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이 안나의 부친은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를 다닐 때면 천주교 신앙을 문제 삼아 자식들에게 악담을 퍼붓곤 하였다. 그러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교리 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다.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족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가족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때, 성이 박씨(朴氏)인 한 교우 뱃사공이 이 안나를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뱃사공은 그녀와 함께 있게 되자 마음이 달라져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안 되어 사망하였고, 그녀는 어린 종악이를 혼자 길러야만 하였다.

과부가 된 다음에도 이 안나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1815년 을해박해를 겪게 되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 안나는 먼저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또한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야 임금의 재가를 얻었다. 이때 대구 감사는 끝까지 신앙을 증언한 신자들을 형장으로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종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이 안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저희를 부르시면서 같이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이 안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시임 안나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이시임 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안나 (성 바르톨로메오의)

 

  • 세례명 축일
    6월 7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ne of St. Bartholomew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626년

 

 

안나 (성 바르톨로메오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안나 (성 바르톨로메오의) 이야기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의 안나(Anna)는 에스파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가 위대한 하느님의 종이라고 칭찬하였던 그녀의 특별한 동료였다.

안나는 아빌라에서 4마일 떨어진 알멘드랄(Almendral)에서 농사짓던 페르디난도 가르시아(Ferdinand Garcia)와 마리아 만자나(Maria Manzanas)의 딸이다. 20세까지 그녀는 양치기로 일하다가 아빌라의 성 요셉 수도원에 입회 허가를 받아 카르멜회 수녀가 되었다.

성녀 테레사는 마지막 7년 동안 늘 안나를 곁에 두고 모든 여행도 함께 하였고, 카르멜의 개혁 사업에 있어서도 안나 만큼 성녀를 협력한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수차례에 걸쳐 안나는 검은 수건을 써야한다고 했으나 그 때마다 거절하여 늘 평수녀로 살았다. 성녀 테레사가 마지막 숨을 쉰 곳도 안나의 품속에서였다. 그 후 6년 동안 안나는 아빌라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때 프랑스에서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 설립을 종용하자, 테레사의 후임자인 예수의 안나 수녀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를 포함하여 5명의 수녀를 파견하였다. 그 후 안나는 퐁투아즈(Pontoise) 수녀원의 원장, 그 다음에는 투르(Tours)의 원장이 되었다.

또 네덜란드에 카르멜 수도원을 세웠을 때 안나는 몽스(Mons)로 갔으며, 1612년에는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en)에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1612년에 안나가 사망하자 2천 명의 주민들이 시신에 달린 묵주에 친구하러 줄을 설 정도로 그녀에 대한 공경은 놀랄 만큼 빨리 일어났다. 1917년 5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안나 마리아 타이지

 

  • 세례명 축일
    6월 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ne Mary Taigi

  • 신분과 직업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837년

 

 

안나 마리아 타이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애나, 애니, 앤, 타이기.

 

 

안나 마리아 타이지 이야기

안나 마리아 타이지(Anna Maria Taigi)는 1769년 5월 29일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약종상이었는데 사업이 망하여 가난에 찌들게 되자 로마(Roma)로 이주하였다.

안나의 부모는 가정부로 들어갔고 안나 자신은 가난한 어린이를 교육하는 단체에 보내졌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그녀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면사 공장에서도 일했고 귀족 집의 하녀로도 일해야 했다.

어느덧 처녀로 성장한 그녀는 1790년에 도미니쿠스 타이지(Dominicus Taigi)라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런데 그 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제에게 총고백을 하고나서 마음을 일신하였다. 그녀는 수년 동안 천주의 종 수도회의 안젤루스(Angelus) 신부에게 고해를 보고 또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늘 갓 회개한 사람처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헛된 것을 끊어버리고 세속적인 모든 쾌락을 추호도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나는 바느질 품삯으로 남편의 적은 수입을 도왔고 가정에 충실하였다. 한편 영신적으로는 굉장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놀라운 기적까지 허락하셨고, 탈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예언하는 힘을 주셨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탄의 간교와 영적인 무미건조함으로 큰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1837년 6월 9일 68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1920년 5월 30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

 

  • 세례명 축일
    7월 15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ne Mary Javouhey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9-1851년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마리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애나, 애니, 앤.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 이야기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의 잘랑주(Jallanges)에서 태어난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Anna Maria Javouhey)는 부유한 농사꾼의 딸로 어릴 때에는 억센 기질과 용기가 굳센 아이였다.

장성한 뒤에 그녀는 수도성소를 느끼고 브장송(Besanion)에 있는 자비회에 들어갔으나, 자신의 성소를 찾지 못하여 다시 스위스 발-생트에 있는 시토 수녀원으로 갔다.

그곳의 지도신부인 아우구스티누스 레스트랑주는 그녀에게 새 수도원을 설립하는 성소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녀는 브장송에 있을 때 환시를 보았는데, 소년 소녀들이 가득 찬 방을 보고 있던 중 "이들이 곧 하느님께서 너에게 맡길 아이들이다." 하는 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로 돌아온 그녀는 샹블랑에 최초의 학교를 개교함으로써 '클뤼니(Cluny)의 성 요셉 수녀회'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그녀의 수녀회는 과달루페, 마르티니크, 생피에르, 퐁디셰리(Pondicherry) 등지에 수도원을 세워 학교와 병원 일을 하였고, 마침내는 기아나(Guiana)의 가이엔느와 뉴 앙굴렘으로 진출하였다. 성녀 안나는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위인'이란 칭호를 받았다.

1843년 64세가 된 그녀는 기아나를 떠났고, 자신이 세운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는 일로 지내다가 선종하였다. 그녀의 수녀회는 주로 신세계로 신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안나

 

  • 세례명 축일
    7월 2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18년경 콘스탄티노플

 

 

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수산나, 수잔, 수잔나, 애나, 애니, 앤.

 

 

안나 이야기

 안나(Anna)라고도 하고 수산나(Susanna)라고도 불리는 성녀 안나는 콘스탄티노플 태생으로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딸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안나는 뛰어난 미모를 갖추었으므로 재산과 지위를 이용하여 결혼하려는 온갖 청혼을 뿌리쳤다.

그러나 황제 집안인 아가레누스(Agarenus)라는 청혼자는 끊임없이 그녀를 들볶고 행패까지 부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도망갈 결심을 하였다. 이것이 그녀가 은수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안나는 우선 레우카디아(Leucadia)로 도망가서, 그곳의 한적한 곳에서 완전한 고독 속에서 하느님만 섬기며 생활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5세였고 50년 동안 은수자 생활을 하였다.

그녀의 무덤에서 기도하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즉시 치유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안나

 

  • 세례명 축일
    7월 2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ne

  • 신분과 직업
    성모의 모친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안나 이야기

성모 마리아(Maria)의 부모인 성 요아킴(Joachim)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70~180년경에 기록된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Jacobi)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Apocrypha)으로 간주하지만, 마리아의 부모에 대해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실제 이 책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도 한몫하였다. 물론 교회에서 위경으로 간주한 만큼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이 역사적으로 실제 벌어졌던 일들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야고보 원복음서”에 따르면, 성 요아킴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녀 안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여겨지기 때문에, 성 요아킴은 늘 시무룩해 있었다.

게다가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준비해 온 제물을 봉헌하려 했지만, 대사제로부터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제단 앞에 나설 자격이 없다는 핀잔을 받고 쫓겨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는 자녀 문제로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할 결심으로 광야에 갔다. 그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성녀 안나 역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의 기도를 바쳤다.

이 부부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을 아이는 온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성녀 안나는 남편이 돌아온다는 전갈을 받고 성문 앞으로 마중 나가서 기쁨의 포옹을 했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성녀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 받도록 맡겼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어머니 성녀 안나와 아버지 성 요아킴의 축일도 생겨났다. 그리고 많은 교부가 “야고보 원복음서”를 즐겨 인용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조되었다.

원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축일은 9월 9일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전례가 6세기 동방 교회를 거쳐 8세기 이후에 로마 교회에 도입되었고,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6세기에 이미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축되었고, 중세에는 유럽 곳곳에 성녀 안나에게 봉헌되는 성당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성모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공경을 확산시켰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Josephus)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모범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 예전에는 대가족 제도가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포함되지 않는 가정의 모습이 낯설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마리아의 부모까지 포함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안나는 주로 영원하고 신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초록색 망토와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며, 책을 들고 있거나 어린 마리아를 교육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반면, 성 요아킴의 상징은 성전에서 행하던 그의 경건한 제사와 관련해서 어린 양, 백합, 새장 속의 비둘기 등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안나 린

 

  • 세례명 축일
    8월 3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nne Line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63?-1601년 영국

 

 

안나 린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안나 린 이야기

성녀 안나 린(Anna Line)은 영국 잉글랜드 동남부 에식스(Essex) 지방의 던모우(Dunmow)에서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윌리엄 하이암(William Higham)의 장녀로 태어나 앨리스 하이암(Alice Higham)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1580년대에 남동생 윌리엄과 함께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면서 안나라는 이름을 사용한 듯하다. 성녀 안나 린은 1583년 2월에 가톨릭 신자였던 로저 린(Roger Line)과 결혼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하였다.

남편인 로저 린과 남동생 윌리엄은 미사에 참례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후 플랑드르(Flandre)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성녀 안나 린은 1594년경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고 건강 또한 좋지 않아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그 무렵 예수회의 요한 제라드(Joannes Gerard) 신부가 런던(London)에 사제들이 숨을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했는데, 성녀 안나 린이 그 집을 운영할 책임을 맡았다.

그녀는 요한 제라드 신부가 런던탑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은신처를 계속 운영했다. 그러던 중 요한 제라드 신부가 런던탑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성녀 안나 린은 당국의 감시를 피하려고 은신처 운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다른 곳에 새로운 은신처를 만들어 사제들을 보호하고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던 중 1601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미사를 준비하며 초를 축성하던 중 발각되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통로를 통해 복자 프란치스코 페이지(Franciscus Page, 4월 20일) 신부를 무사히 탈출시켰지만, 자신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다.

성녀 안나 린은 자신의 고해 사제였던 예수회의 로제루스 필콕(Rogerus Filcock)과 마르코 바크워스(Marcus Barkworth) 신부 등과 함께 고난을 받다가 같은 해 2월 27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두 신부에 앞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 안나 린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순교일인 2월 27일보다는 성녀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Margarita Clitherow)와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Margarita Ward)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8월 30일에 기념한다.

1970년 시성식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함께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김장금 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長金 Anne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9-1839년 한국

 

 

김장금 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안나, 김안나,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김장금 안나 이야기

성녀 김장금 안나(Anna)는 서울 출신이며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된 후로는 늙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머니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하였다. 어머니는 다행히 신부 입국하는 때까지 살아서 타당하게 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고 한다.

김장금은 이광렬 요한(Joannes)의 집 곁에 살았는데 두 집안이 화목하기로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관계로 그 해 4월 7일 이광렬과 같이 체포되어 문초와 고문도 같이 받았다가, 형조로 옮겨져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녀는 옥에 있은 지 석 달 만인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박아기 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朴阿只 Anne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3-1839년 한국

 

 

박아기 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박 안나, 박안나, 애나, 애니, 앤.

 

 

박아기 안나 이야기

성녀 박아기 안나(Anna)는 한강 기슭의 한 작은 촌락에 살던 어느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기억력이 둔하여 교리문답과 기도문 배우기가 매우 힘들어서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을 쓰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18세에 태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2남 3녀를 낳고 자녀들을 매우 열심히 양육하였다.

안나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하여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구세주의 오상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고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자신도 순교를 열망하고 있던 중, 1839년 2월경에 남편과 맏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편과 장남은 곧 배교하여 풀려났지만, 박 안나는 다리뼈가 허옇게 들어나고 몸에 쇠눈 만큼씩이나 구멍이 나도록 혹독히 맞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은 남편 프란치스코가 배교하여 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찾아와서는 집안의 참혹한 형편과 죽어가는 늙은 어머니의 고통이며 엄마를 찾는 어린 것들의 가련한 정경을 말하면서 배교하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이 무서운 유혹을 용감히 물리쳤다.

“아니, 며칠 더 살아 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쓴단 말이오? 나보고 배교하라고 원하기는커녕 끝까지 항구하라고 격려해야 되지 않겠소? 당신들이야 말로 어서 천주께 회두하시오, 그리고 내 행복을 부러워하시오.”

“네 남편과 아들은 옥에서 풀려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 한 마디만 하면 이런 은전은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 조르는데도 너는 도무지 마음을 굽히지 않으니 네 마음은 쇳덩어리 같이 인정이 도무지 없구나. 그래 삶이란 것이 그다지도 나쁜 것이란 말이냐?” 하며 포장이 달래니, “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한 것이 제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고 안나는 말하였다.

1839년 5월 10일 형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청을 올렸다.

“마님이라고 불리는 朴女 아기는 사서 읽는 것으로 집안일을 삼고 추한 그림을 훌륭한 신(神)같이 공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 뒤로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였나이다. … 사형을 선고하였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이리하여 그녀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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