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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03 성금요일 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생중계

피어나네 2026. 4. 3.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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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난기를 묵상하며 예수님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모습을 먼저 바라보게 됩니다. 배반하는 이도 있고, 외면하는 이도 있으며, 책임을 피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끝까지 곁을 지키는 이들도 함께 있고요.

 

이런 여러 장면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인가 하고요. 십자가 앞에서 속속들이 드러나는 저의 모습을 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3일 평화방송 주님 수난 성금요일 미사 명동성당 실시간 생중계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3일, 평화방송 주님 수난 성금요일 미사 명동성당 실시간 생중계입니다. 오늘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지금 여기에서 바로 볼 수 있는 평화방송 성금요일 미사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3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야서 52장 13절 ~ 53장 12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히브리서 4장 14-16절, 5장 7-9절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5,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8장 1절 ~ 19장 42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물으셨다. “누구를 찾느냐?”

5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두어라.”

9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0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12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13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14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17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아니오.”

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2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하였다.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24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

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나는 아니오.”

26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27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

28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29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30 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31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그러자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32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34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물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8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39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파스카 축제 때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

40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바라빠는 강도였다.

19,1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2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3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4 빌라도가 다시 나와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5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 사람이오.”

6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7 그러자 유다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12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외쳤다.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13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15 그러자 유다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수석 사제들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16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17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18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21 그래서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말하였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22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

23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24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목마르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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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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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인가?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이 전례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일 년에 한 번, 늘 곁에 계시던 예수님의 ‘부재’를 가장 뚜렷이 체험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날을 ‘거룩한 날’이라 부르고, 수난기를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바로 여기서 십자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욕스러운 수난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그 치욕은 모욕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 영광이었습니다.

오늘 수난기에는 여러 인물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와 그분을 배척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책임을 회피한 빌라도, 군중, 그리고 끝까지 함께한 여인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까지 ……. 그들을 보며 우리 스스로 묻게 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와 닮아 있는가?”

우리 삶에도 빛과 어둠, 기쁨과 고통이 함께 존재합니다. 죄와 악이 우리를 상처 입히고, 두려움이 우리를 옥죄는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믿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 부활로, 패배를 넘어 승리로 이끕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재’를 체험하면서도, 오히려 그분의 존재를 가장 깊이 묵상할 수 있는 날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주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 스스로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염치없는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마치시는 오늘 도리어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뜻을 생각합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미 이 죽음은 예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고생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던 양반 집 규수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온 것과 같습니다. 구정물에는 손도 담그지 않고 마님 소리만 들으려면 애초에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집에 시집오지 말아야 하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오직 사랑 하나 때문에 시집온 것과 같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심은 오직 사랑 때문이고 인간의 모든 가난과 고통과 죽음을 각오하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모든 면에서 같아지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동화(同化)입니다. 당신의 모든 호사스러움은 버리고 인간의 구차함을 택하시고 천국의 모든 복락은 버리고 인간의 모든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택하시는 겁니다.

저는 이번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택하심을 묵상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의 모든 짐을 당신이 지시는 겁니다. 내가 지지 않은 나의 십자가도 주님께서 대신 지시고 내가 지지 않은 내 사랑하는 이의 십자가도 대신 지시는 겁니다. 어머니들은 걱정이 운명이십니다.

자식이 걱정하지 않는 거까지 어머니는 대신 걱정을 하십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은 자식의 모든 불행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자식이 그렇게 된 것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렇게 낳았고 그렇게 키웠으니 모든 것이 당신 책임입니다.

우리의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태어난 우리의 모든 것은 당신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모든 책임을 지시는 겁니다. 저는 지금 주님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지심이 그러니까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당신 책임으로 여기시고, 그래서 모든 고통과 죽음도 당신이 것으로 짊어지시는 그런 사랑을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을 핑계 삼아 우리는 너무나도 뻔뻔하게 내 십자가를 주님께 맡깁니다.

키레네의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 오히려 키레네의 십자가를 지신 거지요. 그러니 사실은 키레네의 시몬이 자기 십자가 대신 지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좀 거든 것입니다.

한 번은 제가 천안역에서 기차를 타러 가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너무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셨습니다. 아마 시골 농사 진 거 자식에게 갖다 주시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어다드리겠다고 하니 너무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고 가는데 굳이 당신도 거들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괜찮다고 해도 너무 미안해서 그런다고 하셔서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같이 드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염치없는 오늘이지만, 뻔뻔스럽지 않기 위해서 오늘만이라도 제 대신 지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제가 어떻게 거들어야 하는지 이 새벽 고민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라는 신비입니다.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해야 할 때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안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이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8장 11절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 오늘도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허약함과 죄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알게 하소서.

십자가에 걸려 있는 완성된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그 사랑을 알고, 그 신비를 살게 하소서.

고통에서 기쁨을, 패배에서 승리를,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이끄소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어가고, 패배 당하여도 승리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네 쓰린 가슴에서 사랑을 퍼 올리소서.

무력함이 전능함 안에서, 비참함이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십자가는 또 다른 세족례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신 그 현장에 서 있습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는 단순히 한 의로운 인간의 비극적인 처형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는 거대한 '낳음'의 현장이자, 인류의 찌든 자아를 씻어내는 '두 번째 세족례'의 현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도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아들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아들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은 '죄를 없애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죄란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 뱀은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 즉 '자아'만을 위하며 땅의 것(욕망과 두려움)에만 집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는 그런 마음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 목요일에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오늘 십자가 위에서 옆구리를 열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땅에 붙어 자아라는 감옥에 갇힌 우리의 '발'을 씻겨 하늘로 들어 올리시는 '피의 세족례'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1942년 8월 5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야누슈 코르차크(Janusz Korczak) 박사와 192명 아이들의 마지막 행진은 이 피의 권능을 명백히 증명합니다. 나치가 고아원 아이들을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끌고 가려 할 때, 아이들은 처음엔 극심한 공포라는 '죄'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이들은 구석에 몰려 바들바들 떨며 비명을 질렀고, 박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살려주세요, 무서워요!"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오직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뱀의 발)에 묶여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지요.

그때 코르차크 박사는 도망칠 수 있는 사면권을 찢어버리고 아이들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아이들의 공포를 씻어주기 위해 기적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얘들아, 이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배낭을 메거라. 우리는 지금 소풍을 가는 거란다."

박사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속삭였습니다.

"선생님이 너희 곁에 끝까지 함께 있을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아름다운 나라로 가는 거니 무서워할 것 하나도 없다."

이 '피 끓는 사랑의 선언'이 떨어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까지 땅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울던 아이들이, 마치 새로 태어난 이들처럼 당당하게 일어섰습니다. 목격자 예호슈아 페를레(Joshua Perle)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아들의 행렬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박사님이 만들어준 초록색 '국왕 매트 1세'의 깃발을 앞세우고, 깨끗한 옷을 입은 채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존엄함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박사가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동행한다는 것을 믿었을 때, 비로소 자기 생명에 집착하던 '뱀의 발'을 떼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날개’를 회복하여 그 위엄을 회복했습니다. 이 희생적인 죽음만이 타인을 두려움이라는 죄의 무덤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출처: 베티 진 리프턴, 『아이가 있는 곳이 천국이다: 야누슈 코르차크의 생애』)

자아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세상 것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니 죽어도 된다는 믿음,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보여준다면 자아는 힘을 잃고 죽습니다. 이것이 발씻김입니다. 우리 나라 영화에 이런 예도 있습니다.

1597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부하들은 '두려움'이라는 죄에 압도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뒤로 물리고 머뭇거렸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역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엄명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장군은 비겁하게 뒤에서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대장선 한 척을 몰고 적진의 한가운데로 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들을 깨우려면, 내가 죽어야겠지!"

부하들은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장군이 홀로 적들을 무너뜨리며 피 흘리는 그 '죽음의 헌신'을 목격하자, 그들의 가슴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낡은 자아가 죽고 '용기'라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저분처럼 할 수 있는 존재다.”

이 믿음이 두려움의 죄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장군의 죽음을 각오한 선구자적 행동은 부하들의 발을 땅(두려움)에서 떼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몰아 적진으로 돌진했고, 결국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를 일구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쏟은 땀과 피가 부하들의 비겁한 발을 씻어준 세족례가 되었고, 그들을 진정한 전사로 다시 낳은 것입니다. (출처: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자)

결국 하느님 자녀로서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킬 수 없습니다. 피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오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이 신비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입니다. 이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직접 십자가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현대의 성녀 에디트 슈타인(St. Edith Stein), 즉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의 사례를 보십시오. 그녀는 1939년 6월 9일 자신의 영적 유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해 마련하신 죽음을 저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주님, 저의 삶과 죽음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받아 주소서."

그녀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수송 열차에 실려 웨스테르보르크(Westerbork) 임시 수용소에 머물 때였습니다. 수용소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수천 명의 유다인을 짓눌렀고, 특히 어린아이를 둔 어머니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들은 며칠 동안 넋이 나간 채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고, 아이들은 굶주림과 오물 속에서 울부짖었습니다. 공포라는 '뱀의 저주'가 어머니들의 모성마저 마비시켜버린 것입니다.

이때 에디트 슈타인이 나섰습니다. 그녀는 마치 성 목요일의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어머니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고, 옷에 묻은 오물을 닦아주며,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천상의 평화가 감돌았습니다.

성녀의 이 '피 끓는 세족례'를 목격한 어머니들은 전율했습니다. 성녀가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의연한 희생은 마비되었던 어머니들을 깨웠습니다. 어머니들은 다시 일어나 아이들을 안아주었고,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회복한 채 가스실로 향했습니다. 성녀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공포의 노예였던 이들을 당당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낳은 것입니다. (출처: 성녀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의 『영적 유서』, 1939; 월터 허브너,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순교』)

예수님은 우리에게 멋진 교훈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옆구리를 열어 우리를 낳아주러 오신 참된 어머니이십니다. 자녀를 낳는 어머니의 피 흘림이 있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듯, 예수님의 피 흘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죄의 태반을 끊고 아직 묶여 있는 이웃을 바라볼 수 있고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침상 위에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낳으셨다. 그분의 피는 우리를 씻기는 물이 되었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 (출처: St. 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127).

이번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을 슬퍼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흘리신 피의 무게만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죽어줄 용기를 가집시다. 죽어야 삽니다. 살려고 하면 죽습니다. 낳아서 자녀를 주님께 봉헌해야 그분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비참한 패배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증오를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린 가장 찬란한 승리의 보좌이자, 영원한 생명이 태어나는 거룩한 자궁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요즘 사람들을 보면 화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화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화낼 일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화내면 나만 손해입니다. 옛 우리 조상님들도 “화를 내는 사람은 자신을 먼저 해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가 신체를 병들게 합니다. 혈압이 오르고, 심박수가 올라갑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화내는 사람을 피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 특히 화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 곁에는 자기를 도울 사람도 없어지게 됩니다.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화가 날 상황에서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특히 그 상대를 위해 기도하면서 부정적 감정이 자기를 덮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싸우고 화내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오히려 침묵이 옳습니다. 침묵 안에서 기도하고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다는 무관심과 무시는 잘못입니다. 이 안에서는 기도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사랑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기 위주로 사는 이기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기도하면서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 전례력 중에서 가장 슬픈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감사한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의 절정은 ‘십자가 경배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구원을 이루어가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고통, 실패의 경험들이 단순히 우리를 짓눌리는 형틀이었을까요? 주님을 통해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 군사들과 사람들의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까지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신성으로 피하지 않으십니다. 꿋꿋하게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맡기신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나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짊어져야 합니다. 침묵 속에서 기도와 사랑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그들을 잊기 전까지, 죽은 이들은 결코 우리에게 죽은 존재가 아니다(조지 엘리엇).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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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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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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