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모든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게 참 쉽지 않아요.
빈 무덤 앞에서 제자들은 아직 다 깨닫지 못했지만, 보고 믿었습니다. 부활은 이해의 끝에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먼저 마음을 여는 이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마음이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는지도 함께 돌아보게 되고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어도, 주님께서 이미 새 아침을 열고 계심을 믿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5일,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명동성당 실시간 생중계입니다. 오늘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지금 여기에서 바로 볼 수 있는 평화방송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절 미사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절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0장 34ㄱ, 37ㄴ-43절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콜로새서 3장 1-4절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20장 1-9절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명동성당과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실시간 생중계 주님 부활 대축일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2026년 4월 5일 12:00
✚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 명동성당 실시간 생중계 부활절 미사
✚ 2026년 4월 5일 17:00
✚ 레오 14세 교황 집전
✚ 바티칸 실시간 생중계 부활절 미사
2026년 4월 5일 오늘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6:2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지금, 여러분의 시간은 아침인가요?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시간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과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입니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같은 때이지만, 부활을 믿는 이는 새 아침을 맞았고, 믿지 못하는 이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묻게 됩니다.
“내 마음은 ‘지금’ 어느 시간에 있는가?”
부활은 죽음 뒤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여전히 우리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부활의 기쁨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이 길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 삶은 어둠 속에서도 빛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줍니다. 이 희망이 있기에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활을 기념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던 그 부활의 힘을, 오늘 우리 삶으로 불러오는 일입니다. 이기심과 절망을 무너뜨리고, 서로 평화를 건네는 순간마다 부활은 우리 안에 새롭게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일상을 부활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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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빈 자리의 자유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빈 무덤’을 봅니다. ‘빈 무덤’,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어떤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죽음 안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빈 무덤’은 ‘지나간’ 자리입니다. ‘무덤’이 생명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자리라면, ‘빈 무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간, ‘파스카’의 자리입니다.
“파스카”의 의미를 성경과 교부전통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해석해왔습니다.
하느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히브리인들의 집을 치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갔다고 할 때, 파스카는 ‘위를 지나감’(hyperbasis)이요, 이집트로부터 약속된 땅으로, 곧 종살이에서 자유로 지나간 백성들을 가리킬 때, 파스카는 ‘통과해 지나감’(diabasis)이요, 인간이 아래의 것들로부터 위의 것들로 지나갈 때, 파스카는 ‘위를 향해 지나감’(anabasis)이요, 인간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때, 파스카는 ‘밖으로 지나감’(exodus), 곧 ‘엑소더스’(탈출)요, 인간이 선과 거룩함에 있어 진보할 때, 파스카는 ‘앞을 향해 지나감’(progressio)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다섯 가지의 파스카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빈 무덤’은 혹 부활의 근거는 될지언정,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나 부활이 사건으로 체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은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본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부활의 참 뜻을 우리가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상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죽은 이를 묻는 곳이라면, ‘빈 무덤’은 죽음 그 자체를 묻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빈 무덤’, 그것은 예수님마저 죽어 사라져버린 예수님의 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신 분을 넘어,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이 되게 하는 ‘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하시면서 당신 이름에 구속되지 않으신 것처럼, 자신을 비워버린 ‘빈자리의 자유’입니다. 사실, ‘빈 무덤’, 그것은 당신의 본래의 자리인 동시에 우리의 본래의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본래의 이 자리로,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십니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우리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십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1-3)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빈 무덤’으로 비어 있어 볼 수 없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은 우리의 믿음을 요청합니다.
그러기에, ‘무덤’이 죽은 이들의 공간이라면, ‘빈 무덤’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의미의 빈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덤’이 ‘예수님은 죽었다’는 생각의 공간이라면, ‘빈 무덤’은 ‘예수님은 죽었다’는 생각을 놓는 빈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에스트로 엑카르트는 앎의 틀 안에 갇혀있지 말고 벗어날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해지려는 사람은 ~더 나아가 그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앎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정신적로 가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에 대해서도 피조물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모든 것에서 가난해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다면, 이미 죽은 예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빈 무덤’을 본다면 부활을 체험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다름 아닌,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의 탄생일인 것입니다.
주님의 파스카를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여러분들의 생일도 축복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20장 8절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부활을 믿으면 성경을 읽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20,9)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반전의 날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삼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생명이 죽음을 집어삼킨 부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결론은 묘하게도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무지(無知)'에 대한 지적으로 끝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았지만, 아직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부활을 눈앞에 두고도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경이 우리에게 '소리'에서 '말'로, '말'에서 '말씀'으로, 마침내 '진리'로 변화되는 부활의 영성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소리(Sound):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성경은 배경 소음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리는 우리 귀를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진동일 뿐입니다. 뜻을 모르는 외국어나 숲속의 바람 소리는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이렇습니다. 내가 그 소리를 낸 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Word): 유다인들에게 성경은 지식과 정보였습니다
그 소리에 뜻이 담기면 비로소 '말'이 됩니다. 유다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달달 외우기까지 했지요. 그들에게 성경은 조상의 역사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법전이며, 풍부한 정보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 '말'들이 그들을 바꾸지 못했을까요? 왜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정작 그 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그것은 그 말이 여전히 '나를 바꾸는 힘'이 없는, 객관적인 정보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정보는 나를 똑똑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내 자아를 죽이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차를 몰 때 GPS에서 나오는 "우회전하세요"라는 소리는 정보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따르지만, 그 기계와 사랑에 빠지거나 그 기계를 위해 목숨을 걸지는 않습니다.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보는 여전히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함이지, 나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The Word):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피 섞인 생명입니다.
'말'이 '말씀'이 되는 순간은 그 말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분의 입에서 나올 때입니다. 부모가 해주는 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형제끼리 우애 있게 지내라"라는 부모의 말은 자녀에게 귀한 '말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 안에 부모가 나를 먹이고 입히며 쏟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말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가 말로는 "사랑해라" 하면서 행동으로는 이기적이라면, 그 말씀은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진리'로 확증하시기 위해 가장 무거운 무게를 더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피'입니다.
「피로 쓴 유언장」
어떤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유산으로 막대한 보물을 남겼다고 칩시다. 그리고 유언장에 "서로 싸우지 말고 공평하게 나눠라"라고 썼습니다. 평소에 아버지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아버지가 죽자마자 유언장을 무시하고 재산 싸움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평생 자식들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자신의 피로 그 유언장을 썼다면 어떨까요? 그 종이에는 아버지의 생명이 묻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그 유언장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며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아버지는 그 말씀에 당신의 성령, 곧 피와 생명을 섞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당신이 하신 모든 '말'이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생명'임을 증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진리(Truth): 하느님 자녀에게 성경은 살아있는 통치자의 음성입니다
하지만 '피 섞인 유언'도 시간이 지나면 잊힙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지나면 형제들은 다시 재산 때문에 법정으로 갑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죽은 분이 뭘 어쩌겠어?"라며 말씀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메마르고 힘을 잃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자녀에게만 허락된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이 등장합니다. 만약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거실 소파에 앉아 형제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어떨까요? 형제들은 서로 욕하고 싸우려다가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신 부모님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즉시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부활을 믿는 하느님 자녀에게 성경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고 사라진 위인이 아니라, 지금 성체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지금 내 곁에 살아계셔서 내 삶을 보고 계신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분이 하신 말씀이기에,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권능을 가진 '진리'가 됩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보고 계신데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무시한 채 내 욕망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그분이 죽었다고 믿거나, 혹은 그분의 눈을 피하고 싶다는 영적인 거부입니다.
소리에서 진리까지: 부활의 빛으로 읽는 성경
오늘 복음에서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제자들은 이제 겨우 '말'의 단계에서 '말씀'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서야 스승님이 하셨던 말씀에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성령이 오셨을 때, 그 말씀은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성경이 그저 귀를 스치는 배경음악인 '소리'이고, 유다인들에게는 머리로만 이해하고 지키려 했던 지식인 '말'이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분의 사랑이 담긴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 하느님 자녀에게 성경은 내 삶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스리고 이끄는 '진리'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체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자녀는 부모님의 눈에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느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을 믿는 우리는,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내 삶에서 헛되이 돌아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리빙스턴의 낡은 성경」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낡을 대로 낡은 성경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그 성경 책 여백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다. 그분은 이 약속을 지키셨다. 그러니 나도 이 말씀을 끝까지 믿는다." 리빙스턴이 사자에게 물리고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누빌 수 있었던 힘은, 성경 속의 글자가 아니라 그 글자 뒤에서 자신을 보고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데이비드 리빙스턴 전기)
결론: 말씀 안에 머무는 삶
부활 대축일에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화려한 꽃봉헌도 좋지만, 일 년 내내 먼지가 쌓여 있던 성경 책을 펴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성경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죽은 위인의 전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왕의 칙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분과 눈을 맞추십시오. "너는 지금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라고 묻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과 '톨레 레게(Tolle Lege)'」
가톨릭의 위대한 성인이자 교회 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이 바로 이 '살아있는 진리'의 힘을 증명합니다. 서기 386년, 그는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자신의 방탕한 생활과 지독한 영적 갈등 때문에 죽음과 같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그때 담장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Tolle Lege! Tolle Lege!)"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단순히 아이들의 장난 섞인 '소리'가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직접 내리시는 '생명의 명령'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즉시 집으로 달려가 성경을 펴서 눈에 들어오는 첫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행동합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내다보지 마십시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수십 년간 그를 옭아매던 의혹의 안개와 정욕의 사슬이 단숨에 녹아내렸습니다. 성경 속의 글자가 수백 년 전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심장 소리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성경 안에서 마주했을 때, 세기의 탕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살아계신 분을 믿는 자에게 성경은 이처럼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도구가 됩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8권).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요, 부활을 믿으면서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을 앞에 두고 눈을 감는 것과 같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삶에서 그분의 말씀이 부활할 차례입니다. 믿지 않는 이의 소리를 넘어, 유다인의 말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말씀을 넘어, 하느님 자녀의 '진리'로서 성경을 대합시다. 그 말씀의 빛 안에서 기쁘고 복된 부활 시기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문득 7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가 생각났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정 환경 조사를 하셨는데, ‘가족은 몇 명인가?’라고 물어보셨고 여기에 집에 무슨 가전제품이 있는지를 물어 손들게 했습니다.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 전화기, 곤로 등등…. 아마 지금에야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가전제품이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가전제품이 없는 집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전제품이 우리 집에는 다 있었습니다. 이때 들은 생각은 “우리 집, 부자구나.”였습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우리 집 부자지?”라고 물었습니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상, 중, 하로 따진다면 ‘중’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가전제품이 다 있고, 친구 집에 놀러 가도 우리 집이 더 크고 좋았는데도 말입니다.
부는 상대적입니다. 긴 연필 1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긴 연필 2번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긴 연필 2번을 보고서, 긴 연필 1번은 ‘나는 작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더 긴 연필 2번도 자기보다 더 긴 연필을 보면 ‘나는 작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비교하지 않아야 자기의 행복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바라보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어둠을 이기시고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깨닫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게 하는 주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부활이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깨닫고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만으로도 세상 안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계속 비교하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미 세 번이나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음에도 그들은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신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서 말씀 자체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상징인 수의(아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을 무덤에 남겨두셨습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으셨지만, 부활의 흔적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 부정적인 생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기준, 나의 부정적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
오늘의 명언
신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절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일깨우기 위해 그것을 보낸다(헤르만 헤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실은 하느님의 일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생명을 가로막는 돌을 우리가 치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치우십니다. 부활은 단순한 ‘빈 무덤의 확인’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이렇듯 부활은 인간이 만든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돌 앞에서 멈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돌을 넘어 일하십니다. 막고 있던 것이, 닫고 있던 것이, 가두고 있던 것이 이미 치워져 있습니다. 무덤은 고정된 상태를 의미하지만 치워진 돌은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더 이상 과거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부활의 자녀들입니다.
부활의 삶은 힘으로 여는 삶이 아니라 맡김으로 열리는 삶입니다. 변화는 인간의 노력 이전에 은총으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치워졌고, 이제 우리의 삶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은총의 나날들입니다.
부활은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신비입니다. 찾으러 가는 삶에서 발견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비교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답을 찾는 삶이 아니라, 예상과 다른 현실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사랑과 믿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닫혀 있다고 생각하는 무덤 앞입니까, 아니면 이미 열려 있는 사랑 안으로 기쁘게 들어가는 삶인지요. 하느님의 일이 뜨겁게 시작되는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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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