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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0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7.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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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붙들지 마라”는 말씀이 멀어짐이 아니라, 관계가 더 깊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초대처럼 다가옵니다.

 

마리아는 다시 만난 기쁨에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붙잡게 하지 않으시고 다시 삶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눈에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위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주시는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아요.

 

오늘 제 삶이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 이끌어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2장 36-41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20장 11-18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7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8:5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이미 곁에 계시는 주님

무거운 짐을 들고 걸을 때 우리는 그 무게에만 매여 주위를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은 허무와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계셨음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라고 전합니다. 여기서 ‘운다’는 표현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통곡을 뜻합니다. 그만큼 그의 슬픔은 깊었습니다. 그래서 무덤 안의 천사조차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여인아, 왜 우느냐?”(20,13)라고 물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부활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전히 절망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가와 “서 계[셨습니다]”(20,14).

요한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요란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성전이나 군중 앞에 나타나시지 않고, 슬픔 속에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며, 두려워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와 평화를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 “뒤로 돌아선”(20,14)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영적 전환을 뜻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습니다. 삶의 고통과 슬픔에 사로잡혀 주님께서 곁에 계심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 곁에 서 계시며 말씀을 건네십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위로와 평화입니다. 이 부활 시기에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20,1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활 시기의 회개

오늘의 독서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꿰찔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회개하십시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부활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하고, 부활 시기에 해야 할 회개는 어떤 것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탄 시기의 회개가 아직 태어나지 않으신 주님이 내 안에 처음 또는 새롭게 태어나시게 되는 것이라면 부활 시기의 회개는 내 안에서 돌아가셨던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어 잃었던 생기와 활기를 내 안에서 되찾는 것일 겁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지금 다른 나무들은 꽃들을 활짝 피웠는데 나만 꽃을 피우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안에 생기와 활기가 없다면 왜 나만 꽃을 피우지 못할까? 성찰과 반성을 하고, 어찌해야 꽃 피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우리는 이것을 사도들과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께 똑같이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막달라 마리아만 나타나셨는데 그것이 주님께서 편애하신 것이거나 차등을 두신 것이겠습니까?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고파 찾아 헤맨 끝에 만나게 된 것에 비해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 모두 빈 무덤을 발견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찾아 헤맨 반면 사도들은 빈 무덤만 보고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께서 안 계신 빈 무덤인데도 찾지 않는 사람일 수 있고, 주님께서 안 계신 빈 무덤인데도 별 문제의식 없이 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부활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안 계셔 활기 없음을 깨닫고 주님을 찾아 활기를 되찾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말자.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에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주채할 수 없는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곧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동시에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20장 17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주님! 제 사랑이 아니라 당신 사랑에 붙들리게 하소서.

보이는 당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모든 것을 통해, 사랑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온통 사로잡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주님 부활은 파견에 기쁨을 더한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요한 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여인의 만남은 '인식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저 '유다 남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다 '선생님'이라 부르고, 자신의 과거를 꿰뚫어 보시자 '예언자'로 인식합니다. 마지막에는 '메시아'임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린 채 마을로 뛰어갑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처음에는 주님을 '정원지기'로 오해했다가, 존재와 인식의 거대한 부활을 경험하며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도로 거듭납니다.

존재의 부활: "마리아야!",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 시작되는 정체성

부활의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존재의 부활'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보았을 때는 세상이 여전히 무덤이었지만,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의 존재는 죽음의 갈증에서 생명의 축제로 건너갑니다. 하느님이 내 이름을 아시고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거울 속의 이방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 조반니 세간티니의 고백」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고아로 자라며 지독한 고독과 정체성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거울 속의 남자가 누구인지 몰라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차가운 세상에 버려졌는가?"라는 질문은 평생을 따라다닌 무거운 쇠사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알프스의 높은 산 위에서 그림을 그리며 대자연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그 뒤에 계신 창조주 하느님의 숨결을 만났을 때, 그는 비로소 거울 속의 자신과 화해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길 잃은 고아가 아니다. 나의 어머니는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아계시며, 나는 지금 그분의 자비로운 눈앞에서 이 아름다운 창조물을 그리고 있다."

세간티니는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심을 느꼈을 때, '길 잃은 고아'라는 낡은 정체성을 벗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존재로 부활했습니다. 이 정체성의 회복이 부활의 시작입니다. (출처: 애니-폴 콰란타, 『조반니 세간티니: 빛의 화가』)

인식의 부활: 정체성이 변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존재가 부활하니 이제 '인식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름을 불리기 전까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회복하자, 눈앞의 '정원지기'가 사실은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즉시 "라뿌니!" (요한 20,16) 즉 '스승님'이라 외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이 말씀은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더 깊은 결합을 위한 초대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Μή μου ἅπτου" (Mē mou haptou)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붙들다'는 뜻의 'ἅπτου' (haptou)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리스어 문법에서 현재 명령형에 부정어 'Μή'가 붙으면 '이미 하고 있는 동작을 중단하라'는 뜻이 됩니다. 즉, "나에게 손대지 마라"가 아니라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그 손을 이제 놓아주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부활 이전의 방식, 즉 '육신으로 곁에 계시는 예수님'으로만 당신을 소유하려는 것을 멈추게 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씀은 역설적으로 "내가 올라가야만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으로 지상에 계시면 오직 그 장소에서만 마리아와 함께하실 수 있지만, 아버지께 올라가 성령을 보내주시면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 모두와 영원히 결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붙들지 마라"는 말씀은 "나를 여기 좁은 자리에 가두지 마라. 내가 올라가야 너희 모두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랑의 요청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풀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만지는 것은 땅에 머무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출처: St.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121, 3).

기쁨의 부활: 지켜보시는 분이 계시기에 샘솟는 환희

주님이 내 곁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 승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기쁨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영혼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복음을 전할 때,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미소 짓는 분이 계신다면 그 일은 더 이상 '고된 노동'이 아니라 '기쁜 보답'이 됩니다.

가끔 본당에는 사제가 알아주기만을 원하고, 사제의 칭찬이 없으면 봉사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인간 사제'에게만 상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봉사는 자기 영광을 위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지금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봉사자들의 영원한 상은 바로 '나를 지켜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시선' 그 자체입니다. 아직 아버지께 완전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곁에 머무시는 주님을 느낄 때, 우리는 더 이상 사제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의 박수에 목매지 않게 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는데 무슨 상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확신이 있을 때 복음을 전하는 파견의 현장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을 전하는 데도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죽은 스승의 유언을 지키는 피곤한 의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절망을 삼킨 부활의 미소 - 페드로 아루페 신부의 실화」

전 예수회 총장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신부님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 아비규환의 폐허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 출신 사제로서 부상자들을 돌보며 밤낮없이 뛰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수천 명이 썩어가는 살점과 함께 죽어가는 것을 보며, 신부님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주님, 이 지옥 같은 잿더미 위에서 당신의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신부님은 성체 조배 중에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를 강렬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적 회고록 『에네르기아 데 로스 포브레스(가난한 이들의 에너지)』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시체를 닦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몸을 닦고 있다는 것을요. 주님은 무덤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 속에서 부활하여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자, 잿더미는 더 이상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그 '기쁨'이 회복되었을 때, 신부님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쁨은 부활의 가장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출처: Pedro Arrupe, 『En el Nombre del Señor』 - 주님의 이름으로)

파견의 부활: 기쁘니까 달려갑니다

부활의 마지막 단계는 '파견의 부활'입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갔듯이, 우리도 세상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붙들고 있는 손을 놓아야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이 '연쇄적 부활'을 몸소 체험한 성인입니다. 그는 만레사 동굴에서 '인식의 부활'을 거쳐 존재가 뒤바뀌었습니다.

"모든 사물이 내 눈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출처: 성 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 30항).

인식이 바뀌니 기쁨이 터졌고, 그 기쁨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라는 거대한 파견의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이냐시오가 세운 예수회가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의무'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걷는 압도적인 기쁨'이었습니다.

결론: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에게 부활의 본질을 가르쳐줍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살아계신 주님과의 '인격적 조우'입니다. 주님은 죽지 않셨습니다! 그분은 승천하시어 우리와 더 온전하게 결합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일을 지켜보시며, 우리가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우리를 대신해 숨 쉬어 주신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여, 그대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으며, 그대의 사명은 이미 축제이다." (출처: St. 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120, 4).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신부가 생명의 빵에 관한 복음 말씀을 주제로 강론하며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미사 중에 어느 때가 가장 좋으세요?”

신부는 “성체를 받아 모실 때요.”라고 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크게 말했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씀하실 때요.”

길고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미사가 끝났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파견은 큰 기쁨입니다. 주님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열의에 기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끝에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 뒤에 “알렐루야, 알렐루야.”까지 덧붙이면서 이 기쁨을 장엄하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전함이 우리 신앙인에게 큰 기쁨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미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급하게 나가시는 분을 봅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멋질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녀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을 보고도, 심지어 예수님을 마주하고도 오직 ‘없어진 시신’에만 마음이 빼앗겨 있던 것입니다. 극심한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과거의 예수님’에 대한 집착이 그녀의 영적인 눈을 가리고 있어서, 정원지기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그 계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에 영적인 눈이 번쩍 뜨여서 곧바로 “라뿌니!”라고 응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지상에서 예수님을 소유하고 붙잡아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죽음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더 높은 영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고 증언합니다. 주님 부활을 경험한 그녀는 더 이상 개인적인 신앙에 머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큰 기쁨 안에서 이웃을 향한 선포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리아처럼 나의 슬픔, 나의 계획에만 갇혀서 바로 곁에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을 들어야 영적인 눈이 떠져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도 마리아처럼 기쁘게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단지 언젠가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가 우리에게 오도록 이 땅에 있는 것이다(클라우스 헴머를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벚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마리아의 증언은 개인의 체험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힘찬 메시지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기억 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부활은 사랑하고 있던 분을 새롭게 알아보는 힘찬 체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으로만 하느님을 찾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계시지만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현재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렇듯 삶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서만 다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긴 설명 대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는 이제 울던 사람이 아니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머무를 수도 있고 현재로 나아갈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우리가 가진 틀을 깨뜨릴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떠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각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시는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순간, 끝이라 믿었던 좌절의 자리에서 새로운 삶이 뜨겁게 시작됩니다. 지금 이 시간은 좌절이 아니라 주님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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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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