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복음이 나올 때마다 토마스를 보며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참된 평화는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과 상처를 안은 자리에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토마스는 보고 만져봐야 믿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갈망의 끝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저도 제 한가운데 머물러 계신 그분의 사랑 앞에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2장 42-47절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형제들은
42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44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47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베드로1서 1장 3-9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20장 19-31절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12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6:0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의심 끝에서 만난 믿음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사실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심과 확신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토마스 사도의 말은 단순한 불신의 표현이라기보다 정말로 부활을 믿고 싶다는 간절한 절규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갈망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제자들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거로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 안에서, 인간의 미움과 폭력까지 떠안으신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신 말씀처럼 죽음까지 이겨 낸 사랑의 증거로서 상처를 본 것입니다.
이 상처를 통하여 부활을 만난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고립과 두려움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삶으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도 교회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살아 있습니다. 상처 없고 문제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볼 때, 우리는 부활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사랑의 하느님, 그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간, 말과 행동으로 기쁘게 부활을 고백하며, 사도들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삶으로 울려 퍼지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활의 공동체
오늘 주제는 부활의 공동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합니다.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형제적 친교의 공동체, 기도와 성찬의 공동체, 포기와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기쁨이랄까 충만함이 가져다준 선물입니다.
기쁨이 충만할 때 우리는 그 기쁨을 나누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기쁨을 나누게 되는데 맨입에 나눌 수 없으니 먹을 것을 나누고 가진 것을 나누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손주 봤다고 한턱내고, 딸 결혼했다고 한턱내는 것이 좋은 예지요. 반대로 슬픈 사람은 슬픔을 같이 나눠주길 바랄 뿐 결코 한턱낼 수 없고요.
그런데 인간적인 기쁨과 충만도 이러한데 부활의 기쁨과 충만은 어떠하겠습니까? 훨씬 더 기쁘고 훨씬 더 충만하기에 더 완전하고 더 대단하고 더 오래 가겠지요?!
부활의 기쁨과 충만은 그야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쁨이고 성령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된 기쁨이니 그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임사체험(臨死體驗)이라는 것이 있지요.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 말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체험을 하는데 대부분 빛과 황홀을 체험한다고 하고, 그것이 너무도 황홀하기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다고 하지요.
꼭 이런 임사체험이 아니더라도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의사마저 포기한 사람이 기도로 살게 된 경우 하느님 체험을 하면서 인생이 달라지지요.
자기는 원래 죽은 목숨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신 인생이니 이제 더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기로 하고 재산도 좋은 일을 위해 쓰라고 다 희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더 높은 가치를 체험한 결과 전에 가치 있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되고, 욕심부리고 집착하던 이 세상 것들을 사랑을 위해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내놓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경지를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썩지도 더러워지지도 시들지도 않는 하늘의 상속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 상속 재산을 육신의 아버지께 다 돌려주고 어디에도 또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님을 섬긴 프란치스코처럼 한편으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자유롭게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자비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 곧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거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들이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노래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베풀어진 자비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어,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곧 당신의 생명이신 성령을 건네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을 넘어 성령으로 용서하셨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동시에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우리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주며, 짊어져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는,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주고 걸머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20장 27절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실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에게 나타나셔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보면 더 잘 믿을 텐데, 그러면 더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정반대를 말씀하십니다. 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겠습니다. 행복은 곧 '만족'입니다. 그런데 이 만족은 내가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작아지느냐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 때문에 낙원의 모든 것에 불만족을 느꼈고 결국 불행해졌습니다.
「로또 당첨자들의 비극과 쾌락 적응의 법칙」 실제로 수백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80% 이상이 이전보다 더 불행해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뇌는 강렬한 도파민의 자극을 금방 기본값으로 설정해버립니다. 공돈이 생기니 "나는 이제 남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는 교만이 커지고, 교만해지면 관계는 깨지며, 만족의 기준치는 끝없이 높아져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진정한 행복은 많이 가지는 방향이 아닌 내가 작아져 지금 가진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언제 작아질까요? 사랑받을 때 작아집니다.
19세기 프랑스의 한 교만한 귀족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품위와 지위를 지키는 것을 인생의 최대 가치로 여겼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숲에서 길을 잃고 사흘 동안 굶주림에 지쳐 쓰러졌습니다. 그때 한 더러운 산골 노인을 만납니다. 그 노인은 자신의 곰팡이 핀 빵 조각을 그녀에게 내주었습니다.
부인은 평소라면 침을 뱉었을 그 빵을 받아 먹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습니다.
"내가 평생 화려한 연회에서 먹었던 진수성찬보다 그 노인의 빵 한 조각이 나를 더 행복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는 내가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비 없이는 단 10분도 살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처절하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완전히 깨졌을 때, 인간은 비로소 단 하나의 숨결에서도 하느님의 우주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한순간에 죽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해준 분을 믿고 끊임없이 나아가지 않으면 사랑을 받아도 다시 교만해집니다.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성인식 전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 아들을 커다란 나무에 묶어놓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혼자 견뎌야 진짜 어른이 된다"라는 말만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소년은 처음에는 맹수들의 울음소리와 공포에 떨며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버렸어!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자기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믿는 길뿐입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사랑이 있는데, 그래 믿자. 아버지가 나를 버리실 분이 아니야!’ 이런 자신을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맡기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아버지와 온 마을 사람들이 활을 들고 밤새 그를 지켜주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른은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존심 센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더 큰 존재에게 온전히 의탁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방관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날개를 펴게 하려는 거룩한 전략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무섭다고 울어대는 아들에게 5분마다 나타나 "나 여기 있다, 걱정 마라"라고 했다면 소년은 결코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믿음을 통해 버리는 과정은 오랜 혼자만의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동료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요한 20,25)라고 증언할 때 일주일 동안이나 고독한 의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토마스가 제련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토마스가 자신의 '눈'이라는 오만한 도구를 내려놓고 동료들의 '말씀'을 믿는 겸손한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바람에 일주일밖에 자신을 죽이는 노력을 할 수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의 결핍이 토마스의 남은 인생 전체를 주님께 봉헌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비가 너무 안쓰러웠던 그는 가위로 고치를 살짝 찢어주었습니다. 나비는 아주 쉽게 밖으로 나왔지요. 하지만 그 나비는 날개를 펴지 못한 채 바닥을 기어 다니다 얼마 못 가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사실은 날개에 있는 액체를 온몸으로 보내 날개를 단단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고통 중에 즉시 개입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이라는 날개를 스스로 펼쳐 천국으로 날아오를 힘을 기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겸손해져서 "주님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주님은 방해하지 않고 숨죽여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을 믿고 더 의탁하는 존재가 되도록 믿음을 키워갑시다. 그러면 자아가 작아져 큰 평화와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 믿음의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습을 감추시는 이유는 우리 마음의 눈을 정화하여, 훗날 당신을 대면했을 때 그 기쁨이 영원히 마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클레이튼 M.크리스텔슨은 2007년 11월 심장질환으로 쓰러진 후 암과 뇌졸중을 연이어 앓게 되고, 교수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 능력 장애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계속되는 불행에 한탄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상황과 불행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문제와 욕구,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골몰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을 돕고 봉사하는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봉사하면서 남에게 사랑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건강 문제는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본인의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 사랑 속에 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이 저절로 내게 와서 살포시 앉아 있기를 바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유다인들에 대한 공포로 스스로 문을 굳게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그들 한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평화’로 회복시킨 완전한 구원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라는 말에, 증거를 요구하면서 믿지 않습니다. 철저히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드레 뒤에 다시 예수님께서는 방문하십니다. 토마스가 요구했던 증거를 정확히 짚어내시며,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나약함, 의심의 눈높이까지 기꺼이 내려오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 상처에 손을 넣지 않습니다. 대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라고 외칩니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야훼 하느님을 부를 때만 사용되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의심 많은 제자의 입에서,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하고 높은 차원의 신앙 고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면서 보고서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주님 안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주님 안에 머물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을 갖추고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가장 소박한 것들에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이 집을 행복하게 하고, 삶을 사랑스럽게 만든다(루이자 메이 올컷).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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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