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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1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14.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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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삶을 나누려는 마음으로 연결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 것’이라는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부터 태어난 삶’은 제 자신의 변화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삶임을 배웁니다.

 

나의 것에만 머무르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보다, 다시 태어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시는 성령님께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1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4장 32-37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한마음 한뜻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6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37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3장 7ㄱ,8-15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14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6:0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나눔이 만드는 공동체

오늘 독서가 전하는 초대 교회는 그리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능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가진 것을 서로 ‘나누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단호히 거부하신 것 가운데 하나도 바로 ‘나눔이 없는 폐쇄성’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문제도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배제하며 자기 안에 갇혀 버린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곧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라고(요한 3,3.5 참조) 말씀하시며, 종교적 행위를 더 하고 윤리적으로 조금 더 나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기준을 하느님 쪽으로 옮겨 놓기를 요청하십니다.

이것이 파스카, 곧 옛 사람을 떠나 새 사람으로 건너가는 부활의 삶입니다. 익숙한 세상의 논리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선택하는 삶입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그러나 세상의 기준과 다르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람의 아들”(3,13)이라 부르신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안에서, 신앙과 삶,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세상과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그저 보여 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다양한 생각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현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그 중심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간직한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영에서 태어난 이”(3,8)답게 살아가도록 다짐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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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 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팔일 축제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또 분명 죽었음에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3장 13절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추락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땅의 거인이 될 것인가, 하늘의 아기가 될 것인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요한 3,7)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 속에 우리는 어제에 이어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인생의 근본적인 '태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번은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합니다. 땅의 것과 결합하여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과 결합하여 위로부터 새로 태어날 것인가!

성경 창세기 6장을 보면 인류 타락의 본질이 나옵니다.

"세상에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예쁜 것을 보고, 저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창세 6,1-2).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땅의 욕망과 결합한 것입니다. 그 결과 "네피림", 즉 '거인'들이 태어났습니다.

이 거인들은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커지기를 원했습니다. 자아를 한없이 부풀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커지려는 욕구'를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 6,6)라고 기록합니다. 아래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세상의 물질, 돈, 명예를 사랑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속으로 내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상의 것들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의 법칙을 따릅니다. 거인이 되려 할수록 우리는 무거워지고, 결국 그 무게 때문에 침몰하게 됩니다.

1857년 9월, 캘리포니아의 황금 21톤을 실은 센트럴아메리카호가 침몰하던 순간의 기록은 이 '아래로부터의 결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줍니다. 당시 배에 탔던 광부들은 평생을 바쳐 캔 금화를 가죽 주머니에 담아 허리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들은 금과 하나가 되어 세상의 '거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담은 게리 킨더의 저서 『황금의 바다』에 따르면, 한 남자는 마지막 구명보트를 향해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보트와의 거리는 불과 1미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면에 닿는 순간, 마치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그대로 수직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금 주머니, 즉 그를 거인으로 만들어줄 줄 알았던 그 무게가 사실은 그를 바다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무덤의 닻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황금과 결합하여 아래로부터 태어났기에, 황금의 운명과 함께 영원히 가라앉았습니다. (출처: 게리 킨더, 『황금의 바다』)

이렇게 내 자아를 키워 거인이 되려는 욕망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내가 무엇에 순종하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내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물 속으로 가라앉은 모든 거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살려면 더 나와 하나가 되기 전에 잘라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순종하며 그것과 한 몸이 됩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 『빨간 구두』 (1845)에서 주인공 카렌은 빨간 구두를 사랑하여 그 구두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합의 끝은 잔혹했습니다. 구두가 카렌의 의지를 삼켜버렸고, 구두는 살갗과 한 몸이 되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카렌은 자신의 욕망인 구두를 벗기 위해 사형집행인을 찾아가 자신의 발목을 잘라달라고 애원해야 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것과 하나가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출처: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 전집』)

반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노아의 길입니다. 노아는 어떻게 위로부터 탄생할 줄 알았을까요? 그는 세상 사람들이 거인이 되려 할 때, 하느님의 말씀 아래서 작아지기를 선택했습니다. 땅의 거인이 아닌 하늘의 아기가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판단을 버리고 산 위에 배를 지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려면 반드시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위'를 알아보는 법은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는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만이 진짜 '위'입니다. 위를 만나면 나는 ‘아래’가 됩니다. 나를 작게 만들어주는 분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요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구리뱀이 장대 위에 매달려 죽은 것은 '순종'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행위는, 나를 살리기 위해 독을 제거하신 하느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구조가 바로 삼위일체 구조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희생을 통해 전달되고, 그것을 믿는 이에게 성령의 생명이 주어지는 원리입니다. 오직 이 삼위일체 사랑만이 하늘이고, 그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늘의 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가이오비니체크 대신 굶주림의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가이오비니체크가 콜베 신부님의 희생을 단순히 '재수 좋게 살았다'고만 생각했다면, 그는 평생 수용소의 트라우마와 증오라는 아래의 중력에 갇혀 폐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이오비니체크는 자신을 위해 피 흘린 그 사랑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삼위일체 구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처럼 부활을 믿었고, 그 부활은 성령에 의해 가능하며, 그 성령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그는 평생 전 세계를 돌며 증언했습니다. "나는 이제 가이오비니체크가 아니라, 콜베 신부님의 생명으로 사는 덤의 인생입니다." 그는 94세로 선종할 때까지 원수를 용서했고, 콜베 신부님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후예들입니다. 그의 자녀와 손자들은 아버지를 살린 그 신부님의 피가 자신들의 가문에 흐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약 콜베 신부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가이오비니체크의 후예들은 수용소 생존자의 자녀라는 상처 입은 정체성으로 살았겠지만, 이제 그들은 '성인의 사랑으로 탄생한 가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대대로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지켰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어 콜베 신부님의 사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죽어준 이의 양식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 그것이 한 가문 전체를 하느님의 본성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출처: 안드레아 리카르디, 『요한 바오로 2세: 성자의 삶』; 가이오비니체크 유가족 인터뷰 자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자신의 피를 내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당신이 부활의 주님이심을 증명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 피 흘린 사랑 아래 설 때 비로소 땅의 중력에서 벗어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남의 정점은 나의 소속을 땅에서 하늘로 옮기는 결단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피를 수혈받아 살고 있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 세상의 옷을 벗고 하느님의 날개를 달다」 1206년, 아시시의 광장에서 청년 프란치스코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립니다.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 "내 돈으로 산 옷과 재산을 다 내놓아라!"라고 소리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자리에서 자기가 입고 있던 화려한 옷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 하늘을 향해 외쳤습니다.

"모두 들으십시오! 지금까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 불렀으나, 이제부터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느님만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문의 명예와 상속권이라는 아래로부터의 태생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세상의 옷을 입고 거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자가 되었지만, 그 순간 하늘의 아버지는 그에게 성령의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그는 지상의 어떤 중력에도 묶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출처: 보나벤투라,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될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1서 강해』 2, 2).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요즘에 사람들은 낯선 장소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이 있고,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이용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를 잘 이용하기에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우리나라 전국 성지 순례 완주를 위해 제주도 추자도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처음 가는 곳이지만, 스마트폰이 있으니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배에서 내려 성지까지 6km 정도 되는 거리여서 기도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제대로 잘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배터리가 거의 방전된 것입니다. 아마도 수신이 되지 않는 바다에서 스마트폰이 계속 수신지를 찾다가 방전된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관광 안내소에서 받은 지도가 한 장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목적지에 제대로 가려면 먼저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있는지 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지 못했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열심히만 바쁘게 살면 될까요? 열심히 산다고 말하지만,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정확한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통해, 자기 자리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율법학자이자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는 단순히 종교를 정해진 규칙과 인과관계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에서 태어나는 것’은 인간의 통제나 예측을 벗어난, 전적인 하느님의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은총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이야기하시며, 오직 자신만이 하늘의 신비를 땅에 온전히 계시할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하다가 불 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는 것, 즉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고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방식은 철저히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의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다다를 수 없습니다. 철저히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진실의 가장 큰 친구는 시간이고, 진실의 가장 큰 적은 편견이며, 진실의 영원한 반려자는 겸손이다(찰스 칼렙 콜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불어오는 바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붙잡을 수 없지만 분명히 지나갑니다. 우리의 삶도, 하느님의 은총도 그러합니다. 그 바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바람처럼 사는 삶은, 애써 이루려는 삶이 아니라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내어 맡겨드리는 삶입니다. 바람을 붙잡지 않고 그저 지나가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비로소 머물게 됩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바람처럼, 삶의 의미 또한 고정되지 않고 계속 새롭게 생성됩니다. 삶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연결되는 여정입니다. 불고 있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믿음입니다.

불고 있는 바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또한 이 바람은 우리의 계획을 넘어섭니다. 흔들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깨어있는 삶,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바람처럼 거부하지 않고 깨어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게 됩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은 우리를 가장 깊이 살게 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숨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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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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