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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13.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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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라기보다, 세상을 바라보던 익숙한 시선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라고 느껴져요.

 

니코데모는 이해하려고 질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설명보다 더 큰 초대를 건네십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다 알 수 없어도, 성령의 도우심에 자신을 맡겨 보라고요.

 

제 방식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라, 저의 익숙한 계산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시는 은총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4장 23-31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기도를 마치자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그 무렵

23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24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주님,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25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주님의 종인 저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26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모였구나.’

27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28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

29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0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31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3장 1-8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13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8:1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익숙함을 넘어서는 용기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최고 의회 의원이자 바리사이로 뛰어난 지식과 명예를 지닌 세상의 시선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는 단순히 방문한 시간이 밤이라는 뜻을 넘어, 아직 그가 영적으로 어둠 속에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율법을 모범적으로 지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살아왔지만,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과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물음표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사회생활도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과 영적 목마름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 니코데모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요한 3,3 참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계산법과 논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질서와 논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듯이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분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신앙의 빛」, 18항)입니다.

내 지식과 경험의 틀 안에 판단을 가두고, 심지어 신앙마저도 내 방식대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성령의 바람에 자신을 내맡기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계획보다 훨씬 더 크신 하느님의 이끄심과 은총에 자신을 맡기는 용기, 바로 그 용기를 통하여 우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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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코데모는 최고의회 의원으로서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다 지닌 탄탄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밤에” 그가 찾아온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신중함이나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곧 ‘밤’은 무지와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런 ‘밤’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세상의 기초들이 모두 흔들린다.”(시 82,5)

오늘 <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요한복음>에서 “위”(아노텐: 위, 새로)란 단어는 ‘높은 데, 하늘 혹은 하느님으로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됨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생활 개선이나 악습을 고치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거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의한 전적인 새로운 변화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그 물로 깨끗해지고, ‘예수님의 숨’인 성령으로 죄 사함을 받아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생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선사받은 생명이요, 변화된 생명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3,8)

그처럼, ‘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오히려 ‘변화의 영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 그리하여 변화되는 일, 변화된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현존과 활동, 그분의 사랑을 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저희가 영으로 새로워진 까닭인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3장 8절
영에서 태어난 이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오늘,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다인의 빛으로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새로 태어남과 죄, 그리고 생존법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 속에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를 만납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요한 3,4)

예수님은 니코데모의 생물학적 사고를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오늘은 이 '태어남'의 원리를 통해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전 본성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양식을 먹고 살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도덕적인 실수'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정체성에 맞지 않는 퇴행적 욕구'입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다는 뜻이고, 그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전의 생존 방식을 버리는 '자기 봉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 정체성에 맞는 ‘양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태어남은 세포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난자는 한 달의 주기를 살며 자기 마음대로 떠다니는 독립적인 생명체입니다. 하지만 정자와 결합하여 '수정란'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난자가 아닙니다. 인격체인 '태아'라는 전혀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죄가 생겨납니다. 수정란은 자궁에 안착하기 위해 자기를 봉헌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유로운 유영을 멈추고 자궁벽에 자신을 단단히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수정란의 봉헌입니다. 그러면 신비롭게도 '탯줄'이 생겨 그를 잡아줍니다. 이 탯줄을 통해 모체로부터 산소와 영양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놀라운 과학적 사실은, 수정된 배아 중 무려 50퍼센트 이상이 자궁에 안착하지 못하고 그냥 빠져나가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생물학적으로는 '화학적 유산'이라 하지만,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봉헌의 실패'입니다. 태아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난자 때처럼 혼자 자유롭게 살겠다고 고집하며 태중 안착을 거부하면, 그것은 태아에게 가장 치명적인 죄이며 곧 죽음입니다.

열 달이 지나면 아기는 다시 한번 새로 태어납니다. 이제는 자궁이라는 안락한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이때 아기에게 필요한 봉헌은 '탯줄을 끊는 것'입니다. 탯줄은 태아 시절의 생명선이었지만, 밖으로 나온 아기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과거의 잔재일 뿐입니다.

이제 아기는 엄마 젖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젖을 먹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아기는 자신의 생존권 전체를 엄마 품에 맡겨야 합니다. 아기가 마치 이전 탯줄로 공급되는 것을 먹던 것처럼, 아무 것이나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죄란 이런 것입니다.

늑대에게 키워진 아말라와 카말라, 혹은 개에게 키워진 옥사나 말라야와 같은 경우, 그 아이들은 주어지는 대로 먹었습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신들을 그것들에 봉헌하여 그것들의 법을 따랐고 그것들이 주는 양식을 먹었습니다. 결국 인간 사회에는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이것도 새로 태어남입니다. 어른이 되었는데 여전히 엄마 젖을 갈망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일본의 모자 공모 며느리 살해 사건 - 퇴행이 낳은 악마」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 '퇴행적 욕구'가 부른 소름 끼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카이데시 모자 공모 살인 사건' 혹은 이와 유사한 고부 갈등 살인 사건들의 수사 기록을 보면, 성인이 된 아들이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어머니의 태중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사례에서는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어머니의 젖을 만져야 잠이 들 정도로 지독한 마더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한 명의 인격체로 사랑하는 '어른의 본성'을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와 짜고 자신의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학대하는 데 동조했습니다.

어른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아기 때의 이기심을 버리고 가정을 책임지는 새로운 본성을 살아야 하는데, 그 성장의 고통이 싫어 아기 시절의 안락함(어머니의 비뚤어진 사랑)으로 도망친 결과입니다. 죄란 이처럼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예전의 욕망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의 핵심인 '하느님 자녀'로의 태어남을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은 우리가 먹어야 할 새로운 양식(말씀)이며 성령은 우리를 감싸 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이제 '인간적인 본능' 자체가 죄의 원인이 됩니다.

하느님 자녀는 인간이 가졌던 욕구, 곧 돈과 쾌락과 교명이라는 '삼구(三求)'를 봉헌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선악과'가 바로 이 봉헌의 상징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지만, 이 하나만은 내 것임을 인정하라"는 하느님의 제안입니다. 이 선악과를 기쁘게 바쳐야만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막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원리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 모델입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본성으로 보면 이는 말도 안 되는 가혹한 명령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갈대아 우르의 이방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상속받을 '믿음의 조상'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음을 말입니다.

그는 자식에 대한 집착과 생존의 본능이라는 '옛 본성의 목'을 치기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봉헌했을 때, 하느님은 비로소 "이제야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 (창세 22,12)며 그를 진짜 하느님의 사람으로 공인하셨습니다. 봉헌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고, 정체성이 없으면 우리가 먹는 성체는 그저 밀떡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가슴에 새깁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으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8) 아기는 어른이 왜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른은 어른의 본성이 요구하는 욕구대로 움직이지만, 아이는 아이의 본성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엄마 젖을 찾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에 합당한 양식을 먹는 사람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배아가 자궁에 안착해야 탯줄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전 본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자아를 봉헌하고 성체를 양식으로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라는 자궁에서 탈출하여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베다니아의 마리아 vs 가리옷 유다」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가리옷 유다를 비교해 보면 좋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은 '무엇을 봉헌하고 어떤 양식을 갈망했느냐'에서 갈렸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전 재산인 향유를 예수님의 발치에 쏟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높은 곳인 머리카락(자아)을 주님의 발밑에 놓는 '머리 밟기'의 봉헌을 한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나무'의 기운을 수혈받아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는 3백 데나리온이라는 돈 주머니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도둑'이라는 이전 본성의 욕구를 따랐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 세상에 자신을 봉헌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썩은 사체와 같은 은전 서른 닢에 발톱이 묶여 스스로 목을 매는 지옥의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나는 어떤 양식을 먹기 위해 나 자신을 봉헌합니까? 엄마 젖을 찾는 일본의 그 아들처럼 과거의 욕망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도 하느님의 양식을 위해 기쁘게 봉헌하며 하느님의 본성으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제 땅의 흙을 먹는 뱀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먹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으로서의 낡은 욕망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양식만을 바랍시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를 얻기 위해 나의 에너지를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내가 죄에서 얼마나 벗어나느냐가 결정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느 개신교 주차장에 다음과 같은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은 교회 신자들을 위한 전용 주차장입니다. 만약 위반 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 말을 누군가에게 했더니, “신부님! 정말 좋은 아이디어인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일 수가 없습니다. 세례가 주차 위반에 대한 벌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은총이며 하느님의 큰 사랑인데 말이지요. 또 다른 교회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교회에 오십시오.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것도 잘못된 내용입니다. 신앙생활은 기분이 좋아지는 웰빙이나 안락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견디어 내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고 온 마음과 온 힘으로 그분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자기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알고 견뎌야 합니다. 그분 사랑에 집중하면 충분히 견디어 낼 수 있으며, 주님 사랑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이렇게 세상 관점보다 하느님 관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고의 지성과 권력, 부와 종교적 명성을 모두 갖춘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시간은 ‘밤’이었습니다. 유다인 지도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밤’은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니코데모는 아직 진리의 빛 가운데로 들어오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보기 위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3)고 하십니다. 영적으로 태어나야 함을 말씀하시지만, 니코데모는 육체적으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지성과 이성을 갖추어도,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니코데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에 이끄심에 자기를 맡기고 하느님과 깊이 교제하는 영적인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밤’이라는 영적 무지의 상태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령에 자기를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밤을 벗어나 밝은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모든 무게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소포클레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한 번 태어났지만, 복음은 또 다른 탄생을 요구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붙잡고 있던 우리 자신을 놓아주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옛 창조에서 새 창조로, 죄의 지배에서 은총의 삶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사후 세계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로 경험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끊임없이 더 나아지려 하지만, 정작 ‘새로워지기’는 두려워합니다. 익숙한 우리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전환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너무 빠르게 흐려지기에, 끊임없는 정화와 기억 속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가지만, 정작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는 놓치며 살고 있습니다.

부분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 전체의 새로운 변화입니다. 비움과 은총 속에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의 새사람이 되십시오. 이러한 삶이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드러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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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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