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따라야 할 의무라기보다, 결국 마음이 머물고 싶어지는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도 옳음을 증명하려 애쓰는 일이 아니라,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한 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살리는 그 따사로운 빛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5장 17-26절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3장 16-21절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15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2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신앙은 받아들이는 것부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늘 복음의 이 구절 안에는, 우리의 신앙을 떠받치는 세 가지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 사랑하[셨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대상은 ‘잘난 사람’, ‘의로운 사람’만이 아니라 죄로 흔들리고 방향을 잃은 인간까지 포함한 ‘온 세상’입니다.
둘째, “너무나 사랑하[셨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광야에서 구리 뱀을 바라보기만 해도 살아났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생명이 열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강렬한 구원 의지가 먼저입니다.
셋째, “외아들을 내주[셨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온전히 내어놓으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셔서, 그 목숨까지 내주십니다. ‘이만큼이면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전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은 ‘노력만 남은 의무’가 되기 쉽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도 공허함이 남고, 기쁨보다 부담이 앞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먼저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정말 그 사랑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 사랑의 힘이 삶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이러한 성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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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며,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 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 사랑이며,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3장 16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억지로 한 사랑 실천은 위선일까?
"진리에 따라 사는 이는 빛으로 나아와,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요한 3,21)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빛'과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실존적인 고민에 빠집니다. '선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알겠는데, 내 마음이 안 따라줄 때는 어떡하지?'라는 고민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실천할 때 '진심'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 하는 선행을 '위선'이라 부르며 꺼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억지로라도 선행을 하십시오. 다만 진실해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안 좋은 것이 바리사이적 선행입니다. 이것이 진짜 위선입니다. 겉으로는 완벽한 선행을 베풀지만, 사실은 그 선행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의로움'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즐겁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행이 나를 빛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위선의 모델은 가리옷 유다입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 (요한 12,5).
말만 들으면 유다는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자선가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은 그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으로서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12,6).
유다는 '선행'과 '정의'라는 명분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방패로 썼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지만, 사실은 자기 영광이라는 거짓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위선자는 빛으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빛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선행이 위선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대부분이 속해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선'이 싫다며 아예 선행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당당합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안 해. 내키지도 않는데 사랑한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에는 '정서적 추론(Emotional Reasoning)'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믿는 오류입니다. 1964년 뉴욕에서 일어난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이를 비극적으로 증명합니다. 한 여성이 30분 동안 괴한에게 습격당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38명의 이웃 중 누구도 돕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고백한 이유는 소름 돋습니다.
"내가 지금 불편하니까 저 소리는 별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죠."
그들은 '돕고 싶지 않은 기분'을 '돕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로 둔갑시켰습니다. 이는 솔직함을 핑계로 어둠 속에 누워 있는 게으름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평생 준비운동만 하다가 끝나는 분들입니다. "주님, 저도 사랑하고 싶어요. 제 마음을 뜨겁게 해주세요. 그러면 그때 제가 전 재산을 다 바칠게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런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기서 '운전과 주유소'의 비유가 필요합니다. 운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길가에 있는 주유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유소는 그에게 풍경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운전대를 잡고 길을 나선 사람은 다릅니다. 차를 몰고 가다 보면 곧 기름이 떨어집니다. '내 힘으로는 더 갈 수 없구나!'라는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 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주유소 간판만 보입니다.
선행도 이와 같습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려고 억지로 노력해본 사람만이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어줬는데 속에서는 천불이 납니다. 저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라는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채워주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성령의 주유소)를 절실히 찾게 됩니다. 주유소가 필요한 건 차를 움직이는 사람뿐입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 성령의 은총은 필요 없습니다.
베트남의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자기를 증오하는 간수들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침을 뱉는 그들을 어떻게 진심으로 사랑하겠습니까?
그는 훗날 『희망의 유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내 감정은 결코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미소 짓고, 억지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내게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추기경님은 그 '억지 사랑'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간절히 성체를 원했습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저 간수에게 1분도 웃어줄 수 없습니다. 제발 제 안에 오셔서 저 대신 사랑해 주십시오."
그는 몰래 전달된 포도주 세 방울과 빵 부스러기로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그 '억지 사랑'을 채워갈 신적 에너지를 수혈받았습니다. 결국 그 억지 사랑에 감동한 간수들이 회개하고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추기경님이 억지로라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성체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출처: 구엔 반 투안, 『희망의 유서』 2000)
선행에는 위선이 없습니다. 다만 위선자가 선행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빵을 주어도, 그 빵은 굶주린 아이의 배를 채우는 '진실한 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빵을 주느라 내 손이 떨리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드디어 자신 안의 어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규합니다.
"나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18.24).
바오로는 억지로라도 선을 행하려 투쟁했기에 자신의 비참함을 보았고,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로마 7,25)라고 외치며 '참 빛'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사랑하십시오. 내가 억지로 신호등을 지킨다고 그것이 위선일까요? 법을 지키는 것이기에 위선이 아닙니다. 미운 사람에게 억지로 커피 한 잔을 건네십시오. 마음은 부글부글 끓어도 입으로는 축복의 말을 뱉으십시오. 그것이 주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솔직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깨달을 것입니다. '아,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주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 정직한 절망이 우리를 참 빛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녀 잔 다르크의 믿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성녀는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당시 콩피에뉴 전투에서 영국군에 체포 구금되어 갖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파리의 종교 재판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습니다.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 성녀를 이단자로 단죄하려는 종교 재판관들은 적대적이고 위압적인 심문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잔 다르크 따위에게 은총이 주어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단정하여 조롱하듯 질문했습니다.
“어떤 상황이건 그대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성녀는 이 질문에 확신에 찬 태도로 답했습니다.
“그분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면 제게 내려주시기를, 은총을 받고 있다면 그분께서 계속해 주시기를. 그분의 은총 아래에 없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면, 저는 세상의 가장 슬픈 존재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은총 안에 머무르실 원하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며, 그렇지 않다면 불쌍히 여겨서 은총을 얼른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공로와 노력보다 늘 앞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은총 받았음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아닌 자기의 어두운 이기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라고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종종 하느님을 적대하고 빛을 거부하는 타락한 인류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을 배척하는 이 세상조차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인간의 자격이나 선행이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전적인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미 시작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보통 심판은 세상 끝 날이라는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 심판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믿음에 따라 결정됩니다. 결국 인간 스스로 선택하는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아들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것이기에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귀한 외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길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을 거부하면서 자기의 어두운 이기심 안에만 머물면 생명의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둠을 직면한다는 것입니다. 빛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가 진실해지는 그 자리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존재는 오직 사랑 안에서 이해되는 영역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마저 내어주고 내려놓는 극진한 사랑입니다. 진리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빛이며 사랑입니다. 사랑의 근원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구원입니다.
믿음과 삶은 분리되지 않으며 진리를 살아내는 삶이 곧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받기 때문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판단하기보다 우리를 참되게 만드십니다. 우리 또한 진실하게 살아갈 때 빛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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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