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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17.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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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고, 이미 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도 감사와 나눔 안에서는 모두를 살리는 기적의 시작이 됩니다.

 

부족함을 더 채우려 하기보다, 이미 받은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1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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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5장 34-42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6장 1-15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17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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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내어줄 때 시작되는 변화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이 기적은 곧바로 성찬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 복음서 6장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장이라는 사실, 그리고 성찬례 때마다 우리가 듣는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라는 말씀을 함께 묵상할 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우리 삶 안에 구체적으로 현존하시며 당신 자신을 내주시는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것, 값진 것, 화려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고 소박하며 부족해 보이는 것을 풍요롭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나누셨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라는 계산에 매여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6,9) 하고 낙담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을 넘어서는 가치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며,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상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적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아이의 적은 양식이 나눔과 사랑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 되었듯이, 우리도 ‘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양식은 눈에 보이는 빵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의 사랑, 용서, 배려, 위로라는 영적 양식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나눌 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오늘 우리 삶에서도 계속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능력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충만한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들과 달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아이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시는데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실 뿐 아니라 어른의 것이 아닌 아이의 것을 가지고 먹이심을 돋보이려는 것 아닐까요?

틀림없이 아이 말고 어른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오병이어뿐 아니라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은 아이와 오병이어를 주님께서 은총의 도구로 쓰셨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는 수천을 먹이는 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우리 인간의 생각을 대표하여 안드레아는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자기의 생각을 얘기합니다. 주님께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소용이 없기로 치면 빵이 오천 개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이 없어도 수천을 먹이실 수 있기에 다섯 개나 수천 개나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안드레아보다 주님께 그것이 더 없어도 되지만 반대로 주님보다 안드레아에게 그것이 더 있어야 하지만 안드레아는 그것을 소용이 없다고 무시하는 것임에 비해 주님께서는 그것을 소용이 있는 것으로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능력과 사랑을 다 가지고 계신 것이고 안드레아는 그것을 소중히 쓸 능력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안드레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드레아처럼 먹이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능력은 없을지라도 사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먹이고 싶은 마음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시니, 주님께서 먹여주시고 저를 아이처럼 도구로 써주시며, 제가 가진 것 비록 보잘것없을지라도 봉헌하오니 오병이어처럼 소중히 써주소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어도 사랑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충만해야 하고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시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반대로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우리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고, 오늘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처럼 주님의 뜻에 의탁하는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누어질 때 충만해진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우리가 들은 ‘5천명을 먹인 이야기’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시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도,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요한 6,9)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6장 9절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하찮은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오늘,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믿음을 키우는 법: 희망하니까 되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두 종류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하나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불가능을 선언하는 '하지만'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기에 초라한 것을 내어놓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 안의 '필립보'를 깨워 현실의 장벽을 보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 안의 '안드레아'를 초대하여 기적의 파트너로 삼으십니다. 오늘은 이 두 언어가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인생의 경로를 바꾸는지, 특히 '희망'이라는 연습이 어떻게 '믿음'의 기적을 낳는지 1시간 동안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사면 좋겠느냐?"라고 물으시자마자 그는 즉시 시장 조사와 회계 분석을 마쳤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부족하겠는데요?"

필립보의 이 한마디 뒤에는 "하지만 안 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라는 선언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필립보를 '현실적'이라고 말하지만, 영적으로 그는 '학습된 무력감'에 빠진 상태입니다. 내가 해봤는데 안 되더라, 가진 것이 이것뿐인데 무엇을 하겠느냐는 부정적인 경험의 축적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가로막는 담벼락이 된 것입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의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개를 상자에 가두고 바닥에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줍니다. 처음에는 개들이 담장을 넘으려 발버둥을 칩니다. 하지만 하버드 대학 연구진은 담장을 높여 절대로 탈출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좌절을 수십 번 겪은 개들에게 나중에는 살짝만 점프해도 도망갈 수 있도록 담장을 낮췄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전기 충격이 가해져도 개들은 도망치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통을 견디며 낑낑거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못 해"라는 무력감이 뇌의 회로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이 무서운 이유는, 무력감이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전염될 때 그 공동체는 눈앞의 기회조차 '하지만'이라는 말로 발로 차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출처: Martin Seligman, 『Learned Helplessness』)

이런 집단적 무력감은 때로 '과학'이나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한 시대를 절망의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 누구나 "하지만 안 돼"라고 말하는 곳에서는 하느님조차 일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1954년 이전까지 육상계에는 전설적인 '불가능의 벽'이 있었습니다. 1마일(약 1.6km)을 4분 안에 주파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 구조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의사들과 생리학자들은 의학 전문지에 "인간이 4분 벽을 깨려 한다면 심장이 터지거나 폐가 파열되어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수없이 기고했습니다.

모든 육상 선수는 이 '집단적 절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선수들이 4분 1초, 4분 2초대까지 도달하면 그들의 뇌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빨리 뛰면 죽어! 이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수천 명의 선수가 그 지점에서 포기했습니다. 100년 넘게 인류는 이 "하지만 안 돼"라는 논리에 갇혀 스스로를 무덤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1954년 로저 배니스터라는 청년이 이 벽을 깨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죽을 거야"라는 소리를 무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보겠다"라고 결단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벽을 깬 후, 불과 1년 만에 37명의 선수가 연달아 4분 벽을 돌파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막고 있었던 것은 신체가 아니라 "하지만 불가능하다"라고 외치던 집단적 무력감의 쇠사슬이었습니다. (출처: 존 린드그렌, 『로저 배니스터: 4분 마일의 영웅』)

반면 안드레아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지만 이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인간적인 한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아주 중요한 질서를 발견합니다. 희망은 사다리의 '세로대'이고, 믿음은 그 사이에 끼워 넣는 '가로대'입니다.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려면 먼저 양옆의 긴 세로대를 땅에 튼튼히 박아야 합니다. 그 세로대가 바로 '희망'입니다.

안드레아는 비록 그 빵이 부족해 보였지만, '주님 곁이라면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의 세로대를 먼저 세웠습니다. 그 세로대가 버티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믿음의 가로대'를 덧붙여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사다리를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하지 않는 자에게는 믿음도 줄 수 없습니다. 세로대 없는 사다리에 가로대를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신약의 기적을 베푸시기 전, 항상 우리에게 '구약의 희망'을 요구하시며, 그 희망을 '연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없음'을 기꺼이 내어놓는 그 절박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기다리십니다. 그 봉헌이 있어야만 주님은 당신의 전능함을 쏟아부으실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 수녀님의 손에는 고작 3루피뿐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어떻게 병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먹입니까?" 데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이 3루피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녀원이 초창기였을 때, 아이들에게 줄 빵이 단 한 조각도 남지 않은 날이 있었습니다. 요리 담당 수녀가 "하지만 오늘 먹일 게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을 때, 마더 테레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을 치고 아이들을 식당에 모으십시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아이들이 빈 식탁 앞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그 순간, 성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부에서 학교에 배급하려던 빵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유통기한 내에 다 처분해야 한다며 수천 개의 빵을 수녀원에 기증한 것입니다.

보리 빵 다섯 개를 내놓은 안드레아의 심장이 오늘날 콜카타에서 재현된 것입니다. 성녀는 아무것도 없는 절망의 순간마다 '종을 치는 행위'를 통해 희망을 연습했습니다. (출처: 캐서린 스핑크, 『마더 테레사 전기』)

오늘 우리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하지만 제 건강이 나빠서, 하지만 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나빠서..."

이런 '하지만'의 핑계 뒤에 숨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 영혼을 무력감의 상자에 가두는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안드레아처럼, 마더 데레사처럼, 요한 보스코처럼 그 초라한 보리 빵을 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당신이 여기 계시니 제가 이것을 바칩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희망의 세로대를 먼저 세우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믿음의 가로대가 붙여져 기적의 사다리가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가난한 나라의 행복 만족도는 점점 잘 살아가면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 만족도는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기는 순간부터, 즉 절대적 빈곤이 해결되는 순간까지만 올라간다고 하더군요. 그 뒤부터는 상대적 빈곤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돈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미국은 우리나라 돈으로 12억쯤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했고, 독일은 8억 정도, 두바이나 홍콩은 27~28억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공식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없어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역시 적지 않은 금액을 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지만,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족 안에서, 또 직장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야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괜찮아. 너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돈과 같은 물질적인 풍요로서가 아니었습니다. 또 세상의 지위를 통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당신과의 관계를 통한 행복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요한 6,5).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라고 말합니다.

보리 빵은 당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거칠고 값싼 음식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엔 터무니없이 초라한 것이지만,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주님 손에 온전히 내어놓을 때 기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 손에 온전히 봉헌하고 있었을까요? 작은 봉헌도 주님의 축복을 거칠 때 모두를 살리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요한 6,15). 예언자로 알아보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한없이 부족했습니다. 단순히 로마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평생 빵 문제를 해결해 줄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임금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히 그 자리를 떠나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을 채워주는 인기 있는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군중의 모습 속에 비친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이 세상에서 기적을 베푸는 임금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내어주시는 참된 구원자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기도할 때, 울 때, 입 맞출 때, 꿈꿀 때 왜 눈을 감는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덴젤 워싱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시고, 이 모든 것을 품으십니다. 내어놓음이 충만으로 변하는 은총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의 방식입니다.

작은 나눔이라도 하느님의 손에 맡겨질 때, 공동체를 살리는 은총의 신비가 됩니다. 모두를 품는 돌봄이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보잘것없다고 거절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소유로 완성되지 않고, 관계와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작은 것 하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모두가 함께 먹고 충만해지는 성체성사는 모든 존재가 근원적으로 하나임을 체험하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이렇듯 성체성사는 함께 살아가는 가장 인간다운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면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풍요 속에서도 나누지 못합니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며, 감사를 통해 거룩한 나눔이 됩니다. 내어놓을 때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신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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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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