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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1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19.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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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실망을 지나면서 결국 마음이 열리게 되는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아요.

 

설명보다 먼저 함께 걸어주시고, 빵을 떼어주시며 마침내 눈을 열어주시어 끝내 알아보게 하시는 그 깊은 사랑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1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3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2장 14,22ㄴ-33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베드로1서 1장 17-21절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여러분은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7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루카복음 24장 13-35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19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6:5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과거에 묶인 마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요 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예수님께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루카 24,21)으로 바라보며, 그분께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졌고, 실망과 좌절에 사로잡힌 그들의 발걸음은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놓입니다.

바로 그 길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어 ‘부활’이라는 현재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신 ‘파스카’에 계시는데,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 길을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들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함께 걸으시며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자,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그 초대에 응답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시는 순간, 두 제자는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금도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파스카의 눈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재 나를 짓누르는 바쁜 일과 걱정,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 또한 ‘눈이 가리어’ 지금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 부활하시어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향한 이 초대가, 이 시간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부활의 동반자?

여러분은 인생의 동반자가 있습니까? 결혼하신 분이라면 배우자가 동반자이겠지요. 그리고 영원한 친구들이 동반자이겠습니다.

이참에 나는 인생의 동반자가 있는지 생각해봤는데 너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동반자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부활의 동반자는 있습니까? 제 생각에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는 부활의 동반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까지 부부나 친구로서 인생의 동반자이긴 하지만 오늘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부활의 동반자이신 것처럼 동반자일까요?

죽을 때까지 인생의 동반자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부활의 동반자가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동반자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도 부활을 살게 해야 하고, 죽고 난 뒤에도 부활을 살도록 동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주변의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또는 기죽은 사람의 기를 살려주려고 지금껏 살아왔지만 그저 사랑의 본능으로 그랬을 뿐 부활의 동반자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부활의 동반자를 생각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을 그렇게 여러 번 읽고 이 복음을 가지고 Emmaus Leadership(엠마오 지도력)을 많이 강의했으면서도 내가 부활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처음 생각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더 늦지 않고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그리고 지금이라도 주님의 부활 동반법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해야겠지요. 주님의 부활 동반법은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첫째는 절망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또 주님의 길을 포기한 사람에게 주님처럼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 마리 양의 비유에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은 것입니다. 무관심하지 않음은 물론 분노 때문에 사랑을 거두지 않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처럼 다가갈 뿐 아니라 계속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다할지라도 또 그의 반응에 내가 실망할지라도 포기치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동반하면서 주님처럼 동감을 잘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동반을 마다하거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은 그의 탓도 있겠지만 내가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동감해주기보단 조급하게 설득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동반과 동감만 잘할 뿐 아니라 감동도 줘야 합니다. 주님처럼 잘 들어주고 동감해줌으로써 신뢰도 쌓고 들을 마음을 갖게 해준 다음에는 하느님 말씀으로 감동을 줘야 합니다.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말씀으로 감동을 준 다음에는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모시는 성찬례까지 같이 해야 우리는 부활의 동반을 완성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어 기가 질려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흡으로 치면 긴 호흡을 하고, 여행길로 치면 먼 길을 가려는 마음으로 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를 꼭 붙들고 동행하시는 주님

오늘은 부활 3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고”(사도 2,24), 예수님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 16,11 참조)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약 30년이 지난 후,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습니다.”(1베드 1,28)

<복음>은 예수님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혹 우리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눈이 가리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믿었던 일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앎과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곧 ‘그분이 죽었다’는 앎에서 벗어나고, 그분께 걸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일에서 벗어나고, 다시 알아듣고 새로이 믿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이렇게 말합니다.

"21세기의 문맹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지(learn, unlearn, and relearn)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이미 ‘배운 것’, 이미 ‘아는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십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그들은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되었으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는 못한 채 말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들의 어둠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이는 마치 ‘말씀의 전례’로 마음이 타오르고, ‘성찬의 전례’로 말씀이신 분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떼어내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으스러뜨리고 부수심으로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신비, 곧 부활의 신비를 보는 눈은 이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활도 우리의 생명을 으스러뜨리고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부서지고 으스러뜨려질 질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꼭 붙드시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깊고 깊은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서 당신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고, 마음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복음 24장 16절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이제는 뼈 속 깊이 계시고 심장에 살아계시며,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함께 걸으시는 당신의 인도를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성체성사의 효과를 못 느끼는 이유: 가슴이 타올라야 눈이 열린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루카 24,3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제3주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복음을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눈이 열립니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길 위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제자들의 가슴이 먼저 뜨겁게 타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매주 성체를 모시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할까요? 왜 성당 문만 나서면 다시 두려움과 걱정의 노예가 될까요? 오늘은 그 이유가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스승의 부재'에 있음을 명확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 첫 번째 부류는 말씀을 무시한 채 형식적인 영성체에만 매달리는 이들입니다. 말씀이 가슴을 데워놓지 않으면, 성체는 단지 밀떡일 뿐입니다.

2018년 6월, 이탈리아 남부 비보 발렌티아(Vibo Valentia) 근처의 산 탄토니오 성당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일 미사 중 거룩하게 성체를 영하고 성당 문을 나선 한 50대 남성이,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자 트렁크에서 흉기를 꺼내 이웃을 찔렀습니다. 그는 본당의 여러 소임을 맡아 하며 평생 미사에 빠지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출처: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 2018.06.18 보도)

이 사건은 전 유럽 가톨릭계에 '신앙의 해리(Dissociation)'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는 수만 번 성체를 모셨지만, 성체는 그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오늘 복음이 그 해답입니다. 바로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은 채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성체의 뜻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만 보면 그 사람이 이해될까요? 만약 여기 그림자만 보이는 두 아이로 보이는 물체가 있습니다. 둘 다 움직입니다. 한 아이는 걸음마를 하며 두 발로 일어서려 하고 한 아이는 원숭이 흉내를 합니다. 둘 다 진짜 아이일까요? 가림막을 걷어내면 정반대입니다.

사실 아기 때는 인간보다 원숭이가 더 인간 같을 수 있습니다. 행동만 봐서는. 이는 1931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심리학자 윈스럽 켈로그가 자기 아들 도널드와 침팬지 구아를 함께 키움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참 정체성을 알려면 행동보다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먼저 이해시켜 주신 이유가, 그래야 당신의 사랑의 행위인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해야 함을 이해해야 성체성사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성체성사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성당엔 사람들이 좋아서 다녔습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기 싫어서 다녔는지 모릅니다. 미사의 의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성체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미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적 호기심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0권 전집을 만났습니다.

그 책은 성경 한 절 한 절을 마치 제가 예수님 옆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것처럼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숨소리와 제자들의 갈등, 십자가의 고통이 말씀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제 심장을 직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그러고 났더니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부활하시어 살아계심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을 설명해 줄 가장 뜨거운 선생인 그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까지도 성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일단 알아들어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예화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아들에게 평생 나타나지 않던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편지가 왔습니다.

“이 편지를 읽을 때 즈음엔 나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희 둘의 미래를 위해 먼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너희들이 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미안하게 되었다. 내가 너희 둘을 위해 땅을 사 두었다. 그 땅에는 내가 평생 일해서 벌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병이 들어 이제 죽는구나. 너희의 행복을 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두 아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땅으로 가서 둘은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파도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아들은 화가 나서, “평생 찾아오지도 않더니, 아버지가 우리를 끝까지 놀리시는군!” 하며 삽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러자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아버지의 사정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들 둘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다만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였기에 살아 생전에는 발각되어 아들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편지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편지가 가짜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다른 아들은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돌을 골라낸 한 곳에 씨를 뿌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몇 배는 더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은 말 그대로 영양분 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 농사를 지으니 몇 년 안 지나서 그 아들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났던 다른 아들은 사기를 치다가 감옥에서 평생 썩게 되었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깨달아지지 않고 그러면 왜 살과 피를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 효과를 못 누리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체가 마치 어머니의 젖처럼 우리 정체성을 바꿔주는 것이라는 내용이 많이도 나와있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라고 정체성을 바꾸고, 요한 복음에서도 눈이 생긴 태생소경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엄마 젖을 먹으면 아기가 인간이라 믿을 수 있듯이, 하느님의 살과 피는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카르멜 수도회의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St. Elizabeth of the Trinity)은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에디슨병이라는 희귀병으로 임종을 맞았습니다. 장기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그녀는 놀라운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병상에서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을 닳도록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그녀의 영혼을 불태웠습니다.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하자, 그녀는 매일 모시는 성체 안에서 자신과 주님이 완전히 결합됨을 실재로 느꼈습니다.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내 눈을 열어주었기에, 나는 내 병실 침대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제단임을 봅니다. 나는 이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콘래드 드 메스테르, 『엘리사벳 신부의 생애와 영성』)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싫어지면 그의 모든 말이 소음이 되고 행동은 위선으로 보입니다.

세계적인 심리 학자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3,000쌍 이상의 부부를 연구한 결과, 이혼의 결정적 징후는 '말씀의 거부(Stonewalling)'임을 밝혀냈습니다. 한쪽이 상대방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상대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마음의 벽을 쌓습니다.

상대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위선 떨지 마"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의 '행동(도시락이나 선물)'조차 자신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오해합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뜻보다 자신의 죄와 욕망 속에 머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피하는 자에게 성체는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숙제가 될 뿐입니다. (출처: 존 가트맨, 『사랑의 심리학』)

엠마오 제자들도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읽어서 가슴이 뜨거워지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슴 뜨겁게 말씀을 설명해 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 스승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는 당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서를 정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라는 질문에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성경 박사였지만, 말씀의 '혼'을 깨워줄 스승이 없었기에 가슴이 차가웠습니다. 성경은 본인이 읽고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성령 충만한 분이 설명해 주면 비로소 눈이 열려 성체성사의 의미를 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 제4권 11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니, 곧 영혼의 양식인 '성체'와 내 발의 등불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위로를 위해 당신의 거룩한 몸을 주셨고, 제 발의 인도를 위해 당신의 말씀을 주셨나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기도 열심히 하시고요, 미사에도 빠지지 마세요. 그래야 주님과 함께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없어요.”

지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오랜만에 성당 나오셨다는 분과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렇게 답하시면 답이 없습니다. 지금 병에 걸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 병에 걸리신 분이 참 많습니다. 바로 ‘그런데 병’입니다. 계속 ‘그런데’를 외치게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이 ‘그런데 병’은 삶 안에서도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책 읽어 보세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바빠요.”

“많이 웃어야 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요.”, “그런데 웃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병’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그런데’ 대신 ‘어떻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자기의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데 병’을 앓고 있는 제자들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예순 스타디온(11km)가 넘는 씁쓸한 도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그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여자가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계속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 돌아가셨잖아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필연적인 계획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차갑게 식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로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날이 저물어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최후의 만찬과 동일한 이 행위 안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제 ‘그런데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날이 저물어 어둡고 위험한 밤길임에도 즉시 일어나 돌아간 것입니다. 절망 안에서 엠마오로 도망갔던 제자들이 마음을 바꿔 이제 기쁨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성경 풀이’를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결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 없었던 것”(사도 2,24 참조)이라고 완벽하게 논증합니다.

제2독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가졌던 현세적 해방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진정한 영적 해방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1베드 1,19 참조).

우리도 주님께 자기 삶의 고통을 없애주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내려달라는 ‘빗나간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만을 외치면서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 ‘어떻게’를 말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눈이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처럼, 미사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마음이 타오르며 영성체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데 병’에 걸려서 엠마오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는 나의 이웃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루카 24,15 참조)라며 자기 삶으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으로 사랑했다(에드거 앨런 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엠마오의 길은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며 길 위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나눔의 일상 속에서 알아보게 되는 분이십니다.

나눔의 따뜻함 속에서 문득 눈이 열립니다.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현존을 만납니다.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행위인 빵을 떼는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길, 대화, 식탁, 빵을 나누는 행위, 이 모든 것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드러나시는 사랑의 분이십니다.

사랑은 가장 확실한 부활의 길입니다. 부활의 길은 부서지는 빵이 되어 사라지지 않는 동행의 빛이 됩니다. 또한 작은 실천이 삶을 바꿉니다. 부활은 고정된 답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과 실천 속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입니다.

멈추어 이야기하고, 나누고, 함께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됩니다. 진정한 부활 체험은 머리의 이해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로 이어지는 통합의 순간입니다.

만남과 나눔 속에서 삶 전체가 하나로 이어지는 엠마오의 기쁜 부활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 어떤 거창한 순간보다, 함께 걷고, 함께 말하고, 함께 나누는 그 자리에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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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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