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가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아 있었다는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처럼, 주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리라 믿습니다.

2026년 4월 1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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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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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6장 1-7절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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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16-2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18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6:3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보이지 않아도 함께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은 큰 바람을 만납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병행 구절을 보면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썼다.]”(마르 6,48)라고 나옵니다.
역풍을 만난 배는 뜻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돕니다. 지친 몸, 어둠, 멈추지 않는 역풍, 보이지 않는 예수님 …….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과 공포에 점점 짓눌립니다.
제자들에게 닥친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역풍이 불고는 합니다. 언제나 상승할 것만 같다가도 롤러코스터를 타듯 한순간에 갑자기 뚝 떨어지는 때가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에도 깊고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오늘 복음을 떠올려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역풍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그들 가까이 오시고, 그분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을 건너가며 갖은 역풍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험난한 파도와 어둠이 우리를 끊임없이 뒤흔드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마음이 굳어지며, 받은 은총을 잊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풍랑과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걸어오십니다. 우리가 외면하거나 침묵한다 해도, 그분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는 그분께서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삶에서 뜻하지 않은 역풍을 겪을 때마다, 고통으로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인생의 배 안으로 언제든지 다가오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인생 길에서 뒤집히는 일이 생긴다면
오늘 복음은 제자들끼리 호수를 건너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주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십니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아직’에 초점을 맞춰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아직 제자들에게 가지 않으셨을까요? 오늘 복음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과 달리 제자들이 왜 자기들끼리 떠났는지 주님은 왜 같이 떠나지 않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고 함으로써 애초부터 제자들끼리만 가게 할 생각은 없으셨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함께 가실 생각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같이 가시지 왜 제자들끼리만 가게 하신 걸까요?
물론 주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났을 수도 있고, 닥칠 일을 생각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만만하게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나중에 보게 되듯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합니다. 우리 수도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없이 우리끼리 서로 합을 잘 맞추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갔다면 우리 공동체도 풍비박산 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것이라면 주님께서 이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신 것일 겁니다.
자기들끼리만 떠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막지 않고 내버려 두신 겁니다.
인생의 어둠이랄까 어두운 밤이랄까 이런 것을 겪어보라고, 집안이 몰락하고 생사가 오가는 체험을 해보라고, 그런 가운데서 있는 힘 다 써 기진맥진하게 되고 극도의 두려움도 체험해보라고 내버려 두신 겁니다.
두려움은, 두려움 중에서 극도의 두려움은, 그것도 피할 수 없는 극도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고 그래서 마침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피하지 않고 극도의 두려움을 직면하기만 하면 분명히 하느님을 체험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극도의 두려움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주하지 못하는 저를 주님께서 언젠가 극단으로 모실 것입니다.
나병 환자를 그렇게 두려워하던 프란치스코를 주님께서 직면하게 하셨듯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자 구리 불 뱀을 만들어 매달아 달고 우러러보게 하셨듯이 저도 직면하게 하실 때 그때 제 입에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길에서 배가 뒤집히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풍파 때문에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안 계시기에 뒤집힌다는 것을 깨닫도록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자.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섯 번째 표징으로,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죽음을 제압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밤’은 어둠의 세력이고 ‘큰 물결’은 죽음의 세력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곧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는 갈대바다를 건넨 이야기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와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욥기>에서 하느님을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 일컬었듯이, 호수 위를 걸어오며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와’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6장 20절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평화가 성체성사의 표징이다.
"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20-2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라는 거대한 '양식의 표징'과, 다음 주부터 이어질 '생명의 양식'에 관한 심오한 담화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같은 사건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다(Ego Emi)"라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핵심 통찰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성사가 내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정직한 '영적 리트머스 시험지'는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그의 서간에서 명확히 선포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 4,18). 내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면, 그것이 곧 내가 성체와 한 몸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나빠서 두려운 줄 압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려움은 '하느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확신에서 오는 독극물입니다. 이 감정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이성을 잃고 짐승의 본성으로 퇴행합니다.
프랑스 화가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호의 뗏목' 배경이 된 실제 사건입니다. 1816년 세네갈로 향하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되자, 고위층은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갔고 150명의 선원은 급조한 뗏목에 버려졌습니다. 13일간의 표류 동안 그들을 죽인 것은 굶주림보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존재의 빽)을 잃어버린 순간, 사람들은 광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즉시 지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끔찍한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15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성체적 평화가 없는 영혼이 마주하게 될 감정의 종착역은 이처럼 처참한 짐승의 상태입니다. (출처: 조나단 마일스, 『메두사: 난파선과 지옥의 기록』)
두려움은 우리를 현실보다 더 큰 공포의 환영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우리를 죽이는 창칼이 되게 만듭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봅시다. 그들은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왜일까요? 주님을 사랑의 주권자가 아닌, 내 삶을 위협하는 낯선 타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냉담자 방문을 할 때 어떤 분들의 시선도 그랬습니다. 저를 보지 않기 위해 문을 빨리 닫았고, 빨리 가라고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Ego Eimi).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여기서 "나다"라는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신성 선포입니다. 이 목소리가 들리고 제자들이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아 있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배 안으로 모셔 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을 모시는 순간, 풍랑이 멈추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풍랑 한복판에서도 내 감정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기적입니다.
비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위대한 존재의 현존'을 느끼는 감정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합니다. 영화 ‘127시간’에서도 돌에 손이 눌려 빠져나가지 못할 때 자신의 손을 자를 용기는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단순히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었다는 실재적인 믿음에서 옵니다.
'개미 마을의 마리아'라 불리는 가톨릭 복자 후보 기타하라 사토코(Satoko Kitahara)의 사례입니다. 명문가 출신의 미모와 지성을 갖춘 그녀는 일본의 가장 비참한 빈민가인 '개미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오물과 악취, 질병과 범죄가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금방 두려움과 혐오감에 질려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토코는 그곳에서 평생 본 적 없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미사에서 모시는 성체를 통해 "예수님이 지금 내 손을 잡고 이 가난한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평화로운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주치의는 고백했습니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가면 죽음의 냄새가 아니라 하느님의 평화가 느껴졌다. 그녀의 감정 자체가 그녀가 믿는 신의 존재 증명이었다." 사토코의 평화는 그녀가 성체와 온전히 일치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눈부신 표징이었습니다. (출처: 마쓰이 토오루, 『기타하라 사토코: 개미 마을의 천사』)
성당을 나서면서도 여전히 세상 걱정에 가슴이 답답하다면, 우리는 아직 성체를 '음식'으로만 먹었을 뿐 '생명'으로 합일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함께 하면 죄도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말고 평화를 선택합시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의 고백을 우리 삶의 지표로 삼읍시다. 그는 1544년 1월 15일, 인도 코친에서 사프란스(Saffrans) 섬으로 향하는 거친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다는 사납게 울부짖었고 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내적인 위로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며, 저의 모든 고난이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데, 바다가 나를 어쩌겠습니까? 저는 제 자신의 생명보다 하느님의 평화를 더 크게 맛보았습니다." (출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서간집』, 1544년 1월 서한 재구성)
그가 인도와 일본의 낯선 땅,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으로 기쁘게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성체를 통한 '감정의 정복'이었습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성사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가 모시는 성체는 단순히 빵이 아니라,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구원의 방주다. 풍랑이 일어날 때 배 바깥을 보지 말고, 그대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대의 심장은 고요한 항구가 될 것이다. 감정의 평화가 곧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사신다는 가장 고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St. Ambrose, De Sacramentis, 4, 4).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이 평화로울 때, 여러분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신학생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철학자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맺는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는 서로 인격체로 존중해 줌으로써 사랑과 신뢰를 맺는 ‘나와 너’의 관계를, 또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이용 가치나 상품 가치로 취급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변화는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의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사심이 가득한 ‘나와 그것’의 관계일까요? 주님과의 관계도 바로 이 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과 당연히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마음, 하느님 사랑을 보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세상 중심의 마음 등으로 주님과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고 맙니다.
주님 사랑에 온전하게 집중해야 ‘나와 너’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요한 6,17.18)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빛’ 이십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는 것은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뜻함과 동시에, 빛이신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 제자들의 내면적, 영적 어둠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높은 물결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악, 죽음, 혼돈의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거센 풍랑 속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삶의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오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가 닿습니다. 즉, 제자들의 힘만으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힘들지만,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을 배 안으로 표현되는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였을 때 참된 안식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두려워하고 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함을 강조합니다. 자기 힘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자기 안의 욕심과 이기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한때 즐기고 깊이 사랑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헬렌 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열린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기대한 길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파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밤의 호수는 더 이상 길을 잃은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불안은 현실을 왜곡하지만, 믿음은 진실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자유로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든 테두리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내면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호수는 여전히 호수이고, 바람은 여전히 불지만, 판단이 멈추는 순간 그 모든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호수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건너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안개가 걷히는 순간, 두려움의 대상은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이 남습니다. 익숙한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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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