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돌을 들어 올렸지만, 스테파노는 그 돌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용서를 선택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신앙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선택 속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마음속에 돌을 들고, 누군가는 조용히 사랑을 건넵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삶은 결국 누군가를 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고 믿어요.
오늘 무엇을 쥐고 살아갈 것인지 다시 선택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2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2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7장 51절 ~ 8장 1ㄱ절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그 무렵 스테파노가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말하였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52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53 여러분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54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8,1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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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30-35절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30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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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3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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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당신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있나요?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앞에서 당당히 신앙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그를 두고 “성령이 충만하였다.”(사도 7,55)라고 전합니다.
그와 반대로 그를 박해하는 이들은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7,51)로 묘사됩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자기 생각에 갇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완고함을 뜻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마음이 닫혀서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도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눈앞의 기적과 현세의 이익만을 구하며, 조상들이 받은 만나가 그저 배를 채우는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결국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이들에게 ‘미움의 돌’을 던집니다.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졌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내 주변의 이들이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마음속으로 ‘미움의 돌’을 드는 순간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 대신 ‘생명의 빵’을 든다면 어떨까요? 누군가를 상처 주려고 들었던 그 손으로 누군가를 살리는 사랑의 빵을 건네는 것, 이것이 “생명의 빵”(요한 6,35)이신 주님의 삶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손에 무엇을 쥐고 있습니까? 돌입니까, 빵입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돌을 던질지라도, 그 돌을 사랑의 열매인 빵으로 되돌려주는 우리가 되기를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간적 완숙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하느님께 더 감사하게 되고 저에게도 고맙다고 할 수 있어서 요즘 저는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의 할례와는 거리가 멀던 제가 조금은 고개를 숙일 줄 알게 되고 하느님 말씀은 물론 남의 말도 조금씩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60세에 이순(耳順)이라고 한 것에 참으로 공감하고 동의하며 지금 제가 스테파노의 적대자들과 같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스테파노의 적대자들과 같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곧 스테파노와 같이 된 것은 아니기에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과 같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인과 같아야 하는 것인데 제가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그리고 공자가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곧 욕심대로 해도 법에 어긋나지 않음을 얘기했는데 이 경지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70이 되면 세상 욕심이 더 이상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가 되어야 하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이 나이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내가 이미 되어있어야지요.
사실 이것도 욕심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이고, 우리 영성 생활에서는 성령께서 이뤄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완숙(完熟)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요즘 저의 문제는 안주이고 그래서 성덕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음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옛날처럼 교만하고 주장대로 하고 그래서 부대끼는 그런 것이 별로 없기에 거의 모든 관계가 순리적이고 원만하며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 만족하고 안주합니다.
오늘 스테파노처럼 성령 충만하지 못하는데도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사도행전이 얘기하는 스테파노는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인간미가 완숙한 내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내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제 그리고 앞으로 저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저는 인간적으로 안주하고 있기에 발심(發心) 자체가 문제이고 과제입니다.
그러나 너무 무책임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해주시리라, 제가 못하니 주님께서 해주시리라 믿고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
어제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요한 6,30)라고 표징을 요구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사되고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입니다. 이 빵은 더 이상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빵을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러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빵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듯,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사된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의 증거 되는 삶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할 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6장 35절
내가 생명의 빵이다.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왜 모세가 만나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계속 배가 고플까?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요한 6,32)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을 수 있도록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요한 6,30).
어제 보리 빵 다섯 개로 배불리 먹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들은 자고 일어나니 또 다른 기적을 구걸합니다. 그러면서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들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모세는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어 40년을 먹게 했다. 당신도 그 정도의 기적은 계속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치명적인 오류를 수정해 주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요한 6,32).
왜 예수님은 굳이 만나를 준 주체가 모세가 아니라 '아버지'임을 강조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먹는 양식의 '출처'를 어디라고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엄성'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삼위일체적 원리를 통해, 왜 우리가 세상의 빵을 먹으면서도 늘 허기에 시달리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갈증과 배고픔의 끝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아무리 화려한 빵을 먹어도 마음은 늘 텅 비어 있습니다. 배고픔은 위장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의 문제입니다.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34년 동안 얼굴을 철가면(실제로는 벨벳 가면)으로 가린 채 살았던 이름 없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1703년 바스티유 감옥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철저한 익명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국왕의 특별 명령으로 상상도 못 할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매일 갈아입는 최고급 비단 옷, 은식기에 담긴 산해진미, 심지어 간수들은 그가 식사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췄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을 지독한 우울과 고독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종종 식사를 거부하며 벽을 보고 오열했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거울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도 없었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은 그가 루이 14세의 친형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는 왕족의 빵을 먹었지만,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단 한 순간도 얻지 못했습니다. 정체성이 거세된 채 주어지는 최고의 성찬은 그에게 양식이 아니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모욕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참된 해갈은 내가 '누구로부터 온 존재인가'를 발견할 때만 일어납니다. 정체성이 없는 포만감은 영혼을 굶겨 죽입니다. (출처: 장 크리스티앙 프티피스, 『철가면』)
세상 사람들은 빵을 먹으며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자녀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빵을 먹을수록 비참해집니다. 그 빵이 나를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나를 이 땅의 감옥에 묶어두는 족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머니가 주는 젖을 먹고 자랍니다. 아기에게 어머니는 우주 전체이며 생명의 공급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아이는 평생 어머니의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자녀의 눈높이까지 내려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사회적 존재로 서고, 자신의 존엄성을 하느님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반드시 '아버지'라는 존재를 통과해야 합니다.
현대 심리학의 '밀착된 관계(Enmeshment)' 이론에는 소름 끼치는 임상 사례가 많습니다. 35세가 되도록 직업도 없이 방 안에 갇혀 지내던 한 남성이 상담소를 찾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아빠는 밖에서 딴짓하느라 바쁘니 우리 아들은 엄마만 믿어라. 이 밥도 엄마가 너를 위해 직접 피땀 흘려 마련한 거야"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양식의 출처를 '아버지'와 단절시키고 오직 '자신'에게만 고정시켰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을 때마다 무의식중에 '나는 엄마 없이는 밥 한 끼도 못 해결하는 무능한 존재'라는 저급한 자존감에 갇혔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갈 용기를 잃었고, 어머니의 치마폭이라는 좁은 세계의 중력에 묶여 영적으로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심리 치료사는 어머니에게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밥을 차려줄 때 반드시 이 밥은 아버지가 밖에서 전쟁 같은 사회와 싸워 벌어온 것임을 알려주십시오."
어머니가 처음으로 "얘야, 이 맛있는 반찬은 아빠가 가족을 위해 고생해서 사 온 거란다. 너는 저 거친 세상을 이기고 돌아온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아들의 눈빛이 변했습니다. 자신의 출처가 집안의 엄마가 아니라 '거친 세상을 정복한 아버지'임을 인지하는 순간, 그의 자존감은 폭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는 6개월 만에 방을 나와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어머니는 젖을 주는 '통로'일 뿐, 그 젖을 가능하게 한 '원천'은 아버지임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을 거인으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출처: 살바도르 미누친, 『가족과 가족 치료』 임상 사례 재구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군중은 모세라는 '엄마'가 만나를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수준, 즉 땅의 기적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 빵은 내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살과 피를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즉,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어머니'와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은 어머니가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살과 피를 먹으면서 "예수라는 훌륭한 인간이 주는 빵이다"라고만 믿으면, 우리는 그저 '착한 인간'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며 "아, 이 빵은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 아들의 생명을 통해 보내주신 것이구나!"라고 믿을 때, 비로소 우리의 본성은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의 본성으로 격상됩니다. 성체성사는 '인간 예수'를 먹는 예식이 아니라, '예수라는 통로'를 통해 '아버지의 신성'을 수혈받는 신화(Deification)의 사건입니다.
표징이 단순한 기적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보내신 분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 그 출처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은 상대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지배'가 됩니다. 하지만 그 출처가 하느님임을 알려줄 때, 그 사랑은 상대를 하느님 자녀로 부활시키는 '표징'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우리가 성체를 영하며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가 나에게 주시는 신적인 생명이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의 자존감은 땅바닥에서 하늘로 치솟을 것입니다. 여기, 그 믿음의 고백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바꾼 한 성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 다미안 신부님이 나환우들의 섬 몰로카이에 들어갔을 때, 환우들은 자신들을 '버려진 쓰레기'라 생각하며 자학했습니다. 당시 벨기에 정부가 물자를 보냈지만, 환우들은 그것을 받을 때마다 "우리가 불쌍해서 적선하는 거지?"라며 냉소했습니다. 구호물자를 먹을수록 그들은 자신이 비참한 거지임을 재확인했을 뿐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가르침의 방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는 성체를 집전하며 환우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 빵은 벨기에 국왕이 동정심으로 보낸 것도 아니고, 제가 여러분이 가여워 준비한 것도 아닙니다. 이 빵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여러분'을 먹이기 위해 하늘에서 직접 내려주신 당신 아들의 살과 피입니다. 여러분은 버려진 나환자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식탁에 초대받은 고귀한 왕족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보라. 그대가 하느님의 빵을 먹는다면 그대는 하느님이 될 것이다. 모세가 아닌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빵을 먹는 자만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St.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5, 12).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신학생 때, 어머니께 “실망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방학 때, 친구들과 술을 엄청 많이 마시고 들어온 날이었습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실망했다”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신부가 되겠다는 아이가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만취한 모습에 실망하신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의 실망하셨던 모습, 또 슬퍼하셨던 모습에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었고, 실제로 실망을 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만 실망할까요? 주님께서도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당신 사랑에도 멈추지 않는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에 크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실망을 드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의 말씀을 철저히 따라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오천 명의 먹으신 기적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0.31)
빵의 기적은 바로 전날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아마도 모세처럼 매일매일 하늘에서 빵을 떨어뜨려 주어 현세적인 굶주림을 영구적으로 해결해 주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조건부 신앙을 드러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 6,32)
예수님은 군중이 가진 두 가지 중대한 착각을 명확하게 바로잡아 주십니다. 첫째는 훌륭한 지도자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만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광야의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육체적인 죽음을 결국 맞이했지만, 하느님의 참된 빵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받아 모신 사람은 영적 허기와 갈증에서 벗어나 참 기쁨과 만족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공허함과 목마름 앞에서, 참된 위로와 생명이 되시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더는 주님께 실망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비록 아무도 과거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할 순 없지만, 누구나 지금 시작해 새로운 엔딩을 만들 수 있다(칼 바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마름과 배고픔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갈망입니다. 우리의 갈망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결핍이 하느님을 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충만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존재를 살리는 삶의 충만한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인격적으로 주어집니다. 빵은 먹어야 생명이 됩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먼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나에게 오너라” 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외적인 상황이 열악해도 우리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신뢰합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의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과 함께 존재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궁극적인 생명과의 만남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갈망이 채움으로, 채움이 관계로 완성됩니다. 생명의 빵은 존재 전체를 살리는 부활의 참된 만남입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의 현실과 만나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충만으로 변화되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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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