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선택한다는 것은 거창한 결심보다 오늘 내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지 알아차리는 일에 가까운 것 같아요.
말씀을 듣고도 익숙한 방식으로 흘려보낼 때가 많지만, 말씀은 여전히 저를 살리는 쪽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삶은 여전히 흔들리고, 선택은 자주 어둠으로 기울지만, 들었던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조금씩 방향을 바꿔줘서 참 다행이에요.
말씀은 눈에 보이는 변화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오래 머물며 자라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느리게라도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2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2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2장 24―13,5ㄱ절

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그 무렵
2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25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4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5 그리고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2장 44-50절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29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16
✚ 강론 시작 07:3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오늘 나는 빛을 선택하는가?
우리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죄와 어둠을 완전히 피할 수 없습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다시 익숙한 죄의 자리로 돌아갈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 12,47)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처와 죄, 실패와 좌절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고 싶어질 때조차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마지막 날에 그 말씀이 그들을 심판하게 되리라고도 전합니다. 끝까지 그분의 빛을 거부하고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할 때, 결국 우리 스스로 어둠을 선택하여 심판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물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오늘 ‘빛’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어둠’을 붙잡고 있습니까?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들은 말씀을 흘려보낸 채 익숙한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이 될 수도 있고, 어둠 속으로 더 깊이 숨어 버리는 발걸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하시려고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빛을, 생명을, 구원을 선택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일시적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참기쁨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심판의 두려움에서 한 걸음 더 자유로워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왜 큰 소리를 내실까?
오늘 복음의 시작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입니다 우리말에 큰 소리를 내셨다고 하면 그리 좋은 뜻이 아닙니다. 작은 소리로 해도 될 것을 큰 소리를 내어 평지풍파를 일으키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뭔가 답답한 것은 있으셨을 것이고, 뭔가 깨닫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믿어야 한다고 그리 말씀하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어제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고 했는데 여전히 믿지 않고, 당신이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하는 것뿐이라는 말도 믿지 않고, 오늘은 당신을 믿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믿는 거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보면 당신을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당신을 통해 아버지도 보게 된다는 말씀이기도 한데, 그것은 당신이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빛이 없으면 어둡습니다. 아니 빛이 없는 것이 어둠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빛이신 주님이 안 계시기에 어두운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두운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빛의 주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공동체 어두운 것도 공동체 안에 빛이신 주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빛이신 주님께서는 이토록 우리의 어둠을 비추시는 분일 뿐 아니라 당신 빛으로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라는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사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볼 수 없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불행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빛이 우리 어둠을 비추기 때문이고,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는 어둠을 선택합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라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8장과 9장에서도 계속 주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전하는데 우리는 계속 빛을 거부하고 그래서 어둠 속에서 보지 못하니 이런 우리가 답답하고 안타까워 큰 소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빛으로 오시고, 빛으로 이끄시는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으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2장 47절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되, 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응답을 기다리며, 오히려 저에게 승복하십니다.
이 놀라운 겸손에 제가 부복하오니, 주님, 당신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말씀을 예언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12,48-49)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결론을 선포하시며 아주 서늘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심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하신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단죄하는 잣대가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설계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주신 '영원한 설계도'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쓰는 1m의 자가 진짜 1m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프랑스 파리 근교에는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만든 '국제 미터 원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는 이 '원기'와 대조하여 자신의 정확성을 검증받습니다. 만약 이 원기가 사라진다면, 세상의 모든 길이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 '원기'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쓰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하느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 원기'이자 '완벽한 설계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잘생기셨거나 말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모든 말과 행적이 하느님이 미리 주신 설계도(구약)와 단 0.001mm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설계자의 명령'만을 집행하러 오신 분입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성당은 지붕이 없는 채로 수십 년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설계도는 거대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그 큰 돔을 올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건축가가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설계자들의 '원래 의도'를 완벽히 이해했고, 아무도 믿지 못할 새로운 공법(말씀)을 제시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이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인부들이 그의 '말'에 따라 벽돌을 쌓아 올렸을 때, 설계도에만 존재하던 그 불가능한 돔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인부들이 그를 신뢰한 이유는 브루넬레스키가 설계도의 모든 수치를 자신의 몸처럼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구약이라는 거대한 설계도를 들고 오셔서, 그것을 실제로 우리 삶 속에 '성전'으로 완공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말이 설계도와 일치하는 것을 본 자는 그분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기사'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 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심판은 '건축 현장'의 원리입니다. 설계자(성부)가 그림을 그렸고, 건축기사(예수님)가 그 설계도대로 "이 벽돌은 여기에 놓으라"고 명령(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부가 "나는 내 마음대로 다른 곳에 놓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합시다.
기사가 그 인부를 미워해서 내쫓는 게 아닙니다. 설계도와 맞지 않게 놓인 벽돌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고, 건물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기사가 내뱉은 그 '명령'이 그 인부를 '부적격자'로 자동 분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너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우주의 설계도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거부한 자는 스스로 '비존재'와 '파멸'의 길을 선택한 꼴이 됨을 의미합니다.
2세기 최고의 철학자였던 성 유스티노는 진리를 찾아 모든 학파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한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은 유스티노에게 철학책을 덮고 '예언자들의 기록(구약)'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유스티노는 구약의 설계도를 꼼꼼히 뜯어보았습니다. 특히 그를 전율케 한 것은 수백 년 전의 예언들이 예수라는 인물의 '물리적인 수난 기록'과 소수점 아래 숫자까지 일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인간이 수백 년 뒤의 죽음의 시각, 방식, 심지어 입고 있던 옷의 처분까지 맞출 수 있단 말인가!'라며 경악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설계도가 가리키는 이 기사만이 유일한 진리다!" 유스티노는 설계도의 완벽한 성취를 보았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기사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에게 심판은 기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 자기만의 좁은 철학(가짜 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성 유스티노,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
유스티노가 그토록 놀랐던 구체적인 설계의 성취는 바로 ‘메시아의 옷’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옷을 벗기고 새로 입히는 공정’이었습니다.
① 에덴의 가죽옷과 무화과 잎의 파기 (창세 3,21):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스스로 ‘무화과 잎’(자아의 가짜 자존감)으로 자신을 가렸을 때, 하느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죄인의 수치를 덮기 위해 죄 없는 생명이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내놓아야 한다는 최초의 설계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당신의 가죽과도 같은 옷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② 에사우의 옷과 빌려 입은 의로움 (창세 27,15-27): 야곱은 형 에사우의 옷을 입고 아버지 이사악에게 나아가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야곱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가 입은 ‘옷의 향기’를 맡고 축복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짜 장자’이신 예수님의 옷(본성)을 입어야만 하느님 아버지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정교한 예표였습니다.
③ 요셉의 무지개 옷과 구덩이의 수난 (창세 37,23-24):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 요셉은 형들에 의해 ‘긴 소매 옷(무지개 옷)’이 벗겨지고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 옷을 뺏기고 죽음의 구덩이(무덤)에 들어갔다가 온 민족을 살리는 통치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밑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처럼 당신의 아름다운 옷을 뺏기셨고, 그 대가로 형제인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④ 시편의 옷 제비뽑기와 이사야의 고난 (시편 22,19; 이사 53,5):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겉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천 년 뒤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 병사들에 의해 사진처럼 현상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옷이 벗겨진 채 모욕당할 것을 설계도에 기록했습니다.
⑤ 그리스도의 옷 벗기심과 우리의 ‘그리스도 입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겨지신 이유는, 당신의 ‘의로움의 옷’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수치스럽게 벗겨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신성의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고 명령했고, 갈라티아서 3장 2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설계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의 파견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설계도를 몸소 이행하신 분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설계 원리 밖으로 걸어 나가는 ‘자기 심판’의 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기에 아버지의 설계도만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를 하느님의 설계도 규격에 맞춰 깎아내는 과정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다룬 태생 소경이 "Ego Eimi(나는 나다)"라고 고백했듯, 우리가 설계도대로 완공될 때 우리 또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성령을 알레고리적으로, 예언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구원이 없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감시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올가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장 나지 않도록, 우리가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도록 보내주신 '생존 매뉴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는 안다." (요한 12,50).
우리가 오늘 주님의 말씀과 동기화되어 살아간다면, 마지막 날 우리를 찾아올 그 말씀은 무서운 판사가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기분 좋은 '패스포트(Passport)'가 될 것입니다. 설계도와 기사의 완벽한 일치, 그 진리 안에서 구원이라는 건물을 완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저는 정신력이 약해요. 계획대로 무엇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늘 작심삼일로 끝나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비정상일까요? 비정상인 것 같으면서도 주변에 이런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뇌과학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합니다. 뇌와 마음은 원래가 변화를 싫어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순조롭게 해내는 경우가 특이하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괜찮아. 나는 약한 인간이야.”라고 위로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그냥 위로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스트레스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자기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해 볼까?”
이런 말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되고 변화의 시작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습관화의 원리는 ‘일단 움직여라.’라고 합니다. 몸이 먼저 행동하면 거기에 뇌가 열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습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 비율이 자그마치 45%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 묵상, 사랑의 실천 등도 일단 해 보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됩니다. 뇌와 마음이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당신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간절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완벽한 대리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보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죄와 절망의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의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잘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세상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외침은 우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의 초대입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규칙이 아니라,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동아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주님 뜻을 따르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하라는 뜻이다(탈무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가타리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내면이었습니다. 내면 없는 개혁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실천 없는 내면은 현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내어맡겼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그 어둠을 없애려 애쓰기보다는 빛을 더 깊이 받아들이는 사랑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으로 초대하여 존재를 새롭게 하는 은총입니다.
그녀에게 진리는 옳은 생각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그 고통 안에서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자기 인식과 하느님 인식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은 결국 세상을 향한 담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빛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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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