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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0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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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복음 말씀이 좁은 문처럼 느껴져요.

 

다른 방법으로 갈 수 없고, 결국 그분께서 가신 그 무거운 십자가의 길을 지나야만 아버지께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자꾸 옆길을 찾습니다. 혹시 더 편한 길이 있지 않을까 하고요.

 

제 마음은 수시로 내비게이션이 되어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를 반복하지만, 단순하게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통해 가는 것이 결국 가장 빠르고 분명한 길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돌아가려 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그분을 안에서, 그분을 통해, 다시 걸어가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3장 26-33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4장 1-6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5월 기도지향 00:22

✚ 미사 시작 00:36

✚ 강론 시작 07:2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내가 머무는 곳이 나를 만든다.

저는 때때로 예비자 교리 시간에 숙제를 하나 냅니다. 집에 십자고상이나 성모상으로 기도 공간을 만들어 보라고 말입니다. 내가 사는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꾸미는지는 중요합니다. 내가 사는 공간은 나의 내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로 반론을 펼칠지도 모릅니다.

‘술주정뱅이는 수도원에 가도 수도원이 술집이 되지만, 수도사는 술집에 가도 술집이 수도원이 된다.’

곧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말도 맞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우리가 머무는 장소도 중요합니다. 어떤 곳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내면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러 하느님께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곳이기에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자리에 가려면 하느님 나라와 닮은 장소에 자주 머물러야 합니다.

안젤름 그륀 신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저는 오늘 저녁 마음의 문을 닫고 침묵의 내적 공간에 아무도 들이지 않으렵니다. 그 안에는 당신만 계십니다. 오늘의 문제나 걱정거리, 미래의 불안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오직 저와 당신만 그 안에 머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자 합니다. 잠시 예수님과 함께 ‘침묵의 내적 공간’에 머물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웁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정신 차리기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언젠가 80이 넘은 노인이 스님과 문답하는 것을 방송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나이가 되니 참으로 인생무상함을 느낀다고 하니 그 스님이 당연한 것을 왜 느끼느냐고 하며 그런 감성에 젖을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 답을 하였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그 스님이 참 무정하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노인은 자기감정을 얘기하는데 그 스님은 그 감정을 무 자르듯 자르니 말입니다. 누가 모릅니까? 특히 그 나이의 노인이 머리가 나빠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마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유기적인 작용에 따라 마음이 형성되기에 어떤 때는 이성에 마음이 더 이끌리고 어떤 때는 감성에 마음이 더 이끌리며 어떤 때는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기에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끝은 있기 마련이니 마음 산란할 필요 없다고 이성이 말해도 감성은 여전히 이 세상에 미련이 있고 의지는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정리될 때까지 마음의 산란은 피할 수 없는데 그러기에 마음을 뛰어넘는 정신이 주도하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물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할 따 그 정신이 육적(세속적)인 정신이 아님은 물론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그 나라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니 우리는 이 정신을 차리면 끝입니다.

그리하면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라고 프란치스코가 권고하는 대로 우리가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을 지니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것이 싫거나 두렵기는커녕 얼른 가고 싶어 할 것이고,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성령을 영접할 때까지 정신 차리기를 계속해야 할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이 참된 앎의 길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과 ‘세 번 부인하게 될 베드로에 대한 예고’ 다음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함께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7,33)고 말씀하셨건만, 이를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그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알게 됩니다. ‘앎’은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참된 앎’은 그것을 실행할 때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으면서도 져주셨듯이,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써 진리의 빛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오늘 5월 1일, 교회는 노동자 성요셉을 기념합니다. 세상도 오늘을 노동절로 지냅니다. 그런데 세상이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과 교회가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세상은 노동을 자주 짐으로 봅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가능하면 적게 하고 많이 받아야 하는 것, 돈만 충분하면 벗어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노동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부당한 임금, 과로, 착취, 경쟁, 인간을 부품처럼 대하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한 가지 결론을 너무 쉽게 내려 버렸습니다. ‘일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필요악이다. 일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러니 행복은 일하지 않는 데 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강론의 제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이 말은 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중립이 되지 않습니다. 밭을 가꾸지 않으면 그냥 빈 땅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잡초가 자랍니다. 방을 치우지 않으면 그냥 방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손이 선을 만들지 않으면 상상력이 악을 만듭니다. 시간이 하느님께 봉헌되지 않으면 시간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일은 저주가 아니라 창조 때부터 주어진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도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것을 가르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죄 이후의 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땀 흘림의 고통은 죄 이후에 심해졌지만, 일 자체는 타락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기 위한 소명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은 타락의 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일부터 말입니다.

왜 일을 하면 하느님을 닮을까요?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라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참된 자존감은 ‘나는 하느님과 닮았어.’에서 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는 부모는 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일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순명은 감상적인 순명이 아니었습니다. 책임지는 순명이었습니다. 먹이고, 보호하고, 데리고 피신하고, 다시 돌아오고, 집을 세우고, 일해서 가족을 살리는 순명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만일 요셉이 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그에게 맡기셨을까요? 물론 하느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세상의 능력주의와 다릅니다. 하느님은 부자를 고르시는 것도 아니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고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은총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마술이 아닙니다. 은총은 게으름을 거룩함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먼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용서받는 존재이기에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마음씨가 좋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 앞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헤로데의 위협 앞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집트 망명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하자 그는 일어났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하자 그는 밤에 일어나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자 다시 움직였습니다. 요셉의 순명은 늘 발과 손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출처: 마태 1,20-24; 마태 2,13-23)

사랑은 감정만으로 사람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랑은 일해야 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면 밤에 일어나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면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합니다.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청소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맡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랑은 결국 말뿐인 사랑이 됩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이것을 무섭게 보여 줍니다. 성경은 다윗의 죄를 소개할 때 이상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그는 저녁때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 세바를 봅니다.

그리고 죄가 시작됩니다. 간음, 거짓말, 살인, 은폐.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지만 사실 그 시작은 눈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싸워야 할 전쟁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싸우지 말아야 할 욕망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졌습니다. (출처: 2사무 11장)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누워 있을 때 마음은 맑아집니까? 아니면 휴대폰을 만지며 비교하고, 불평하고, 음란한 상상에 빠지고, 남을 판단하고, 자기연민에 젖습니까? 몸은 쉬는데 영혼은 더 피곤해지는 경험을 우리는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창조하고, 돌보고, 사랑하고, 내어줍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서 멀어집니다. 저도 사실 쉬는 날도 무엇을 해야 할 지 하루 일과를 짜 놓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에 먹힙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악마와 빵 조각」(1886)에서 노동과 죄의 상관관계를 기막히게 묘사했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 밭을 갈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고, 자기 땀으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쉬려고 밭둑에 앉아 빵 조각을 먹으려 했는데, 그 사이에 작은 악마가 몰래 다가와 그 빵 조각을 훔쳐 갑니다. 작은 악마는 기대했습니다.

‘이제 저 인간이 화를 내겠지. 욕을 하겠지. 하느님을 원망하겠지. 그러면 내가 이긴 것이다.’

그런데 농부는 빵이 사라진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져간 자가 배가 고팠나 보지.”

그리고 허허 웃고는 다시 밭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합니다.

이 장면이 중요합니다. 왜 농부는 악마에게 지지 않았습니까? 빵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한가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오늘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빵 조각 하나를 잃어도 자기 존엄을 잃지 않았습니다. 일과 싸우는 농부의 자존감은 악마가 건드릴 수 없을 만큼 단단했습니다. 실패한 작은 악마가 대장 악마에게 혼이 납니다. 그러자 대장 악마가 비법을 알려 줍니다.

“그에게 넘치는 곡식을 주고 한가하게 만들어라.”

무서운 말입니다. 악마는 농부를 망하게 하려고 가난을 준 것이 아니라 풍요를 줍니다. 굶겨서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넘치게 해서 무너뜨립니다. 농부는 풍년이 들어 곡식이 남아돌자, 그것으로 술을 빚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더 이상 밭에서 땀 흘리는 시간이 아니라, 술에 취해 떠들고 빈둥거리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짐승처럼 변합니다. 처음에는 여우처럼 교활하게 서로 속이고, 다음에는 늑대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마지막에는 돼지처럼 추하게 굴러다닙니다. 그들이 가난할 때는 빵 조각을 잃고도 사람다웠습니다. 그런데 풍요로워져 일의 질서를 잃자, 인간 안의 짐승이 깨어났습니다.(출처: 레프 톨스토이, 「악마와 빵 조각」, 1886)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풍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풍요 속에서 노동의 질서를 잃는 것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와 싸워 지치고 싶지 않다면 먼저 오늘 해야 할 일과 싸우십시오.

사막 교부들의 아버지인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홀로 기도하던 중 지독한 아케디아, 곧 영적 권태와 나태에 빠졌습니다. 기도를 해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혼자 있으면 거룩해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잡념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세상의 욕망이 떠오르고, 지난 기억이 괴롭히고, 미래의 불안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절규합니다.

“주님, 제가 구원받고 싶은데 이 잡념들이 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때 안토니오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앉아서 밧줄을 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다시 앉아서 밧줄을 꼬았습니다. 또다시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기도와 노동, 노동과 기도가 리듬처럼 이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안토니오야, 이렇게 하여라. 그러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안토니오는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기도만으로 자기 비대한 자아를 다스린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기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몸을 통과하지 않으면, 기도는 때로 생각 속에서만 맴돕니다.

손을 움직이는 노동이 함께할 때, 인간의 몸도 영혼의 편이 됩니다. 안토니오는 이후 기도와 손노동을 함께했습니다. 그는 밧줄을 꼬며 자기 정욕과 교만도 함께 묶었습니다. 성 요셉이 목수 일을 통해 성가정을 지켰듯, 안토니오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켰습니다. (출처: 성 아타나시오, 『안토니오의 생애』)

성 요셉의 두 가지 특징은, 의로움과 일을 사랑함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가르침을 오늘의 말로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죄를 씻는 세례수와 같고, 게으름은 죄를 낳는 자궁과 같다. 일하는 손은 천사의 손이 되고, 노는 손은 악마의 놀이터가 된다. 그대가 땀 흘릴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땀방울 속에 당신의 은총을 섞어 주신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창세기 강론』의 노동과 나태에 관한 교부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의역).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살기 위해, ‘평범해서는 안 된다.’, ‘특별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함이 삶 안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이를 위한 에너지 소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남과 다르게 살기 위해 특별한 ‘나’를 찾지만, 사실 ‘나’라는 그 자체로 특별하고 다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도 충분히 다르고 특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굳이 가식이나 위선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과 경쟁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힘 빼고 ‘나’로 살면서 즐거우면 됩니다.

어렸을 때 미술 시간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크레파스가 나빠서, 도화지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원래 못 그린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크레파스나 도화지가 있어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미술 시간이 가장 싫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못 하는 것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남들보다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것도 있기에 충분히 괜찮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힘센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스승의 떠남과 베드로의 배반 예고(13장)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 떠나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에 영적,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런 제자를 향해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게 됩니다(요한 14,6 참조). 주님의 사랑 외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고 마음이 산란해지곤 합니다. 그때 세상은 여러 가지 화려한 길과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특별한 ‘나’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특별한 ‘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조금 다를 뿐입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특별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뒤를 묵묵히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으로 특별한 ‘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아무리 강한 사람도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야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크리스 노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초록의 5월은 드러내지 않는 삶처럼 성모님과 성 요셉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진정한 인간 관계는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의 삶 안에서 노동을 배우셨습니다. 평범한 노동 속에 깃든 사랑이 곧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보이는 신분이 아니라 살아낸 사랑에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나지 않아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노동은 하느님 앞에서 이미 가장 존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노동과 일상의 평범함 속에 자신을 숨기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성실함과 사랑이 가장 깊은 기도가 됩니다.

성 요셉의 삶은 드러내지 않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삶입니다. 가장 충실한 삶이 가장 깊은 것을 이끕니다.

오늘의 평범한 하루를 사랑으로 살아낼 때, 그 삶은 이미 가장 좋은 봉헌의 삶입니다. 성 요셉의 노동은 사랑으로 살아낸 하느님께 드리는 침묵이며 기도입니다.

모든 노동이 존중받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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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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