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자리는 먼 훗날에야 만날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언뜻 스치며 알아보게 되는 사랑의 자리처럼 느껴져요.
예수님은 떠나심과 돌아오심 그 사이에서도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가는 길을 설명이 아니라 당신 자신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길을 몰라 불안한 시간 속에서도, 완전히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요.
방황하다가도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 길 위에서 계속 함께 걸어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5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6장 1-7절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베드로1서 2장 4-9절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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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12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5월 3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1
✚ 강론 시작 15:0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가서 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고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이며,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4,1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하느님께 가셨다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실까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의 첫사랑인 제니는 가정 폭력으로 상처받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돌다가 세월이 지나서야 주인공 포레스트에게 돌아옵니다. 포레스트는 두려움에 대하여 말하는 제니에게 달리기로 미국을 돌면서 본 애리조나의 아름다운 장면을 전해 줍니다. 그러자 제니가 말합니다.
“나도 거기 너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포레스트는 대답합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었어.”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관계가 바로 이러합니다. 떠나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오고, 그런 관계 속에서 아드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아버지 안에 아드님께서 계십니다.
요양 병원에 병자 봉성체를 갔을 때, 한때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던 이들도 돈도 명예도 다 남겨 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과 우리는 하느님과 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실망시키더라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맙시다. 결국 우리는 이 긴 여행을 마치고 모두 아버지께 돌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안에 주님이, 주님 안에 우리가
오늘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가기에 앞서 믿으라는 말씀을 거듭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또 묵상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또’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제가 믿음에 대해 그리고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많이 나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오늘은 믿음의 일반적인 중요성이 아니라 어떤 믿음이 어떻게 제게 중요한지 보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이제 별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객관적으로 계시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중요치 않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하느님이 계시긴 하지만 저기 시베리아에 계신다고, 거기서 벌벌 떨고 계시는 것이 제겐 별 의미 없으며 그렇게 믿는 것도 별 의미 없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벌벌 떨고 계시는 주님은 제 안에서 죽어있는 하느님이나 마찬가지이고 제 안에 계실 때만 주님은 부활하신 하느님이요 살아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고 믿는 것 또한 의미가 있고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 있는 내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믿게 되기 때문이고, 그래야 나는 외롭지 않고 든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고 또 주님 안에서 하느님 안에 있지 않지 않을 때 나는 시베리아에서 나 홀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시베리아가 아니라 저 우주 캄캄한 데서 나 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한지 또 다른 이유를 이제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나아가라고 하고,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면 이미 주님께 나아간 것이 되고,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주님 안에서 이미 하느님께 간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태중의 아기는 엄마 안에서 그리고 엄마와 함께 엄마가 가는 곳 어디든지 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있는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 가시는 곳으로 덩달아 가겠지요.
그러니 주님 안에 아버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주님 계심을 주님께서 확고하게 믿고 계시듯 우리도 우리 안에 주님 계시고 주님 안에 우리가 있음을 확고하게 믿음으로써 우리는 주님 안에서 든든하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심하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외롭지 않게 살 것이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며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 정말 맞는 길입니까?
‘인생은 나그네 길’(Homo viator)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길을 걷는 이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는가?’ 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엉뚱한 곳에 가 닿는다면, 애초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야할 곳으로 간다할지라도 갈 수 있는 길을 모른다면, 가야할 곳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와 함께 가느냐?’는 참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일곱 부제를 뽑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는 ‘믿음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이들’, 곧 그분의 소유가 되는 백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 하신 <고별사>중 일부입니다. 곧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라는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그러니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요한 14,2-3)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이 어떠한 지’, 그리고 ‘그곳을 왜 가시는지’를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먼저 ‘아버지 집’ 가시어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이 세상이 ‘나그네살이’이지만, 궁극에서 ‘이별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벅찬 ‘유언 말씀’입니다.
여기서, “거처”(μονη)는 ‘마련해(정해진) 둔’, ‘예비 된’이란 의미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21,2)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거처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씀하신 ‘시노달리따스의 실행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길 위에 있는 교회’(ecclesia viatrix)입니다. 그리고 ‘함께 걷는 길’의 ‘여정’을 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와 필립보에게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함은 ‘믿지 않은’ 까닭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길’입니다. ‘길’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믿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참된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황당하고 당혹스런 발언이요,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고,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당신이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께서는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살아있는 ‘생명’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인격적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면서도, 막상 그 진리를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데는 ‘믿음’이 따릅니다. 그렇게 믿는 바를 따라 몸소 살 때라야 ‘자유’는 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알게 될 때가 아니라, 그 ‘진리를 믿음으로 따를 때’ 자유롭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진리가 이루어지도록 그 일을 믿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 당신의 자유를 얻어 누리게 하소서.
저의 길이신 주님! 당신께서 길이 되어 제 발 아래에 밟혀가며 저를 이끄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 발아래 기꺼이 밟히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저의 생명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이빨에 씹혀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씹혀 부서지는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의 진리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밀려 저를 태워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4장 9절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죽음의 두려움 없애는 법: 더 큰 생명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일입니다.
부활 시기라 부활을 말해야 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님이 이제 곧 떠나신다니, 그들에게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을 것입니다. 이는 부활이 곧 나의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주님 부활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그건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내 존재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기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낍니다. 반대로 말하면 두렵지 않으려면 '알면' 됩니다. 그렇다면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상과 생명을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하면 됩니다.
우리가 처음 가보는 낯선 다리를 건널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다리가 무너질까 봐 벌벌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수많은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다니는 것을 보았고, 설계자가 부실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깨닫게 된 '법칙'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안전하다'는 원리를 경험했기에 처음 건너는 다리라도 두려움 없이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처음 가보는 길 위에서 두려움을 없애려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세워놓으신 '관계의 법칙'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 법칙: 모든 생명은 더 큰 생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사과 하나를 보며 "맛있다"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과는 '땅'이라는 거대한 생명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죽은 흙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영양분 없는 모래밭에서는 사과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땅은 수많은 미생물과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으며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렇다면 땅의 그 생명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태양입니다. 태양이 빛을 보내 광합성을 하게 하고, 태양이 비를 만들어 내려주어 땅을 적셨기에 비로소 땅은 비옥해질 수 있었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땅이 죽고, 땅이 죽으면 사과는 맺히지 않습니다. 결국 사과 하나를 베어 문다는 것은, 사과 속에 들어있는 태양의 빛살과 땅의 영양분을 내 몸으로 흡수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사과 안에 태양과 땅이 이미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생명의 연쇄 고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태양과 땅에 전적으로 속해 그 생명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우주의 근원인 아버지를 소유한 것입니다. 출처를 알면 죽음은 더 이상 고립된 소멸이 아닙니다. (출처: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탯줄의 법칙: 어머니의 품에 머무는 유일한 방식
태중의 아기를 보십시오. 아기가 엄마라는 더 큰 생명 안에 존재합니다. 아기가 엄마에게서 양식을 공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마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아빠가 벌어오는 양식을 공급받아 아기에게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 아빠라는 근원에 철저히 속해야 하고, 아기는 엄마라는 통로에 철저히 머물러야 합니다.
이 '머무름'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이 싫다며 탯줄을 이빨로 물어뜯거나, 배고프다고 엄마의 가슴을 물어뜯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 품에 머물 자격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의 품 안에서 튕겨 나가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안전벨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법칙)을 완벽히 지키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모든 생명이 아드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 나라의 법을 지켜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안전과 연금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사시게 되고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복지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습니다. (출처: 에리카 라카르트, 『태내 기억』)
수명의 법칙: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주신 진짜 이유
여기서 우리는 소름 돋는 두 번째 법칙을 마주합니다. "나보다 더 큰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나에게 얼만큼을 주느냐가 나의 생존 기간을 결정한다"는 법칙입니다.
사과는 땅보다 훨씬 수명이 짧습니다. 그 이유는 땅으로부터 자신의 형체를 유지할 아주 일부분의 에너지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수천 개의 알을 낳지만, 대부분 일찍 죽는 이유는 어미가 그 많은 새끼에게 자기 생명력을 똑같이 나누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끼들의 평균 수명은 부모의 발치에도 못 미칩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 하나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와 전 재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칩니다. 부모가 자신의 생명을 통째로 자녀에게 이양할 때, 자녀의 수명은 부모의 수명과 맞먹게 됩니다. 부모가 가진 만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통째로 내어주셨다는 것은 무슨 표징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수명을 우리에게 그대로 수혈하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시니, 그분의 살과 피를 먹은 우리도 그분만큼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이유는 우리가 먹은 양식의 '수명'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가톨릭교회교리서』 1213-1274항 참조)
정체성의 신비: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믿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위대한 선물을 받고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내가 '누구'인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 존재는 짖고 싶어 하고, 사람이라 믿는 존재는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칙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그 사랑은 불가능한 고역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유전자를 수혈받은 '진짜 하느님'임을 믿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하느님인데, 고작 이 정도 자존심 때문에 미워하는 게 격에 맞는 일인가?"라는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만큼의 사랑을 하고 싶은 '거룩한 욕구'가 터져 나옵니다. 그 정체성이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살게 하고, 그분 안에 영원히 머물 자격을 확정 짓습니다. 그분처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분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이 유일한 법칙이기 때문입니다.(출처: 성 아타나시오, 『말씀의 강생』)
진짜 죽음의 정의: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뽑히는 것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죽음을 다시 정의합시다. 사과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변화일 뿐입니다. 진짜 죽음은 '뿌리가 뽑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는 이와의 연결이 끊기는 것이 유일한 죽음입니다.
「사례 1: 영화 '그래비티' (Gravity, 2013) - 생명줄을 놓친 자의 공포」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 비행사 라이언 스톤(Sandra Bullock 분) 박사는 지상에서 어린 딸을 사고로 잃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거부한 채 고독의 진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살았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죽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우주선 밖에서 작업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파편의 습격으로 우주선과 자신을 잇던 '생명줄(Tether)'이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산소는 떨어져 가고,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홀로 던져진 그녀는 우주 전체를 소유한 듯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주 미아였습니다.
이때 베테랑 비행사 맷 코왈스키(George Clooney 분)가 나타납니다. 맷은 끊어진 라이언의 생명줄을 대신하여 자신을 그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더 큰 생명의 원천인 '지구'로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을 묶고 있던 연결 고리를 스스로 해체하며 우주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맷 코왈스키의 희생을 통해 라이언은 깨닫습니다. 죽음은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생명의 원천에서 뽑혀 나가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녀가 다시 살기로 결심하고 구조선의 해치를 열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더 큰 생명'인 지구의 인력과 연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생명줄을 놓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순간, 우리는 화려한 우주복을 입었어도 영적 질식 상태에 빠집니다. 연결됨이 생명이고, 단절됨이 죽음입니다. (출처: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 '그래비티' 2013)
결론: 마음의 평화는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 머물 때 옵니다
살려면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만큼 삽니다. 그분이 안 보일 때도 있는데 이는 그분이 더 큰 생명을 얻으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리를 마련하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라." 이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사과가 땅에 속하고 땅이 태양에 속하듯,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께 속하고 그분이 지니신 영원한 생명을 그대로 상속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속함을 믿고 주저 없이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버지에게 속해있음을 믿고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수명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마치 태아에게 탯줄이 끊기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출산'과 같습니다. 뿌리가 박혀 있는 나무에게 겨울(죽음)은 휴식일 뿐이듯, 주님께 정박한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축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7세기 영국에서 여왕이나 궁정 사람들은 차를 즐겨 마셨습니다. 차 마시는 것은 고상해 보였고, 품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한 세기가 지난 18세기에는 어떤 사람이 차를 많이 마셨을까요? 여전히 여왕이나 궁정 사람들이 마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의 임금 노동자들의 양식이 ‘차’였다고 합니다. 노동자들은 잠을 깨우기 위해 차를 마셨고, 곧바로 일터로 가야만 했습니다. 즉, 밥을 챙겨 먹을 시간이 없어서 차를 마셨던 것입니다.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빵을 굽거나 수프 만드는 것보다 시간이 적게 들었고, 또 돈도 적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귀하다고 하는 것도 얼마 후에는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지향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중요했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삶이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도 귀하고 중요합니다. 특히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기에 더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당신을 배신하는 제자가 있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요한 13장 참조)을 듣고 마음이 산란해지지요. 그런데도 토마스는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면서 세상의 방식으로 물어보고, 필립보는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면서 눈에 보이는 기적을 요구합니다. 3년 동안 함께 했는데도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런데도 인내심 있게 가르치시면서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시선을 교정해 주십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운전할 때 대부분 내비게이션을 이용합니다. 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적으면, 다양한 경로가 나옵니다. 추천 길, 빠른 길, 짧은 길, 무료 길 등의 경로가 나와서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진리요 생명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의 길,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도 갈 수 있고, 저렇게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진리이며 생명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만 활동하셨지만,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제자들은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해서 땅끝까지 주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할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세상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영원한 만족을 위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 세상은 공황 발작 중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건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프랭클린 D.루스벨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을 찾느라 분주한 우리들 삶입니다. 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생명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더욱 깊어집니다. 진리를 산다는 것은 거짓없이,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는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결국 사랑 안에서 비로소 살아나는 존재입니다. 사랑이 참된 생명입니다. 사랑으로 살아내야 할 오늘의 숨결입니다. 이렇듯 생명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신비입니다.
길, 진리, 생명은 따로있지 않고 예수님의 삶 안에서 통합됩니다. 참된 길은 일상 속에서 깨어있는 삶이며, 진리는 하느님을 향한 맑은 마음이며, 생명은 서로를 살리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참된 신앙은 생각이 아니라 전존재를 맡기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랑은 모든 길을 하나로 묶는 가장 깊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모든 생명은 가장 좋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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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