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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0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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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대개 조건이 붙어 있어요. 더 가져야 하고, 더 안전해야 하고, 더 인정받아야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남기신 평화는 상황이 다 정리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아직 흔들리는 마음 한가운데 머물러 주시는 평화입니다.

 

오늘도 그 조용한 이끄심 안에 머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4장 19-28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4장 27-31ㄱ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5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잠원동성당 소개 00:20

✚ 미사 시작 01:31

✚ 강론 시작 10:2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지금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무속 신앙에서는 무당이 될 사람에게 ‘신이 내린다.’고 합니다. 이른바 신 내림을 받으면 삶을 제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자신에게 내린 신의 뜻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름 신이 내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는 까닭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충동이 나를 지배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사게 되고, 술과 도박 등을 하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물질, 권력, 폭력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들을 손에 쥐면 평화가 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우두머리가 와도 그는 당신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자가 아닌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신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평화는 성령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였습니까? 세상의 충동들은 평화가 아닌 분열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삶을 이끌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환난이 아니라 주님 없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어저께 받는 것, 하느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 얘기했지요. 오늘도 받는 것, 곧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는 것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야 함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여기에는 주님께서 주실 때 거절하거나 놓치지 말고 받으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으라는 뜻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평화란 우선 거짓 평화가 아닙니다. 거짓 평화란 서로의 불의를 눈감아 주며 관계를 깨지 않으려는 평화입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이 너무 두려워 좋은 게 좋지 않냐며 관계를 유지하는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진리를 거스르는 불의의 공생관계는 단호하게 끊으라는 뜻으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불안을 두려워하며 그저 평안하기를 바라는 평화도 주님의 평화가 아닙니다. 이런 평화는 사실 무사안일(無事安逸)과 다른 것이 아니고 그래서 이런 평화는 겁쟁이의 평화요 너무도 쉽게 깨지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평안이랄까 안락함이랄까 이런 것이 깨지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하기에 역설적으로 그런 것들 때문에 너무도 쉽게 깨지는 허약한 평화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진정 주님의 평화를 받아서 사는 분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다 돌팔매질 당하여 거의 죽다 살아났음에도 평화롭기만 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라고 하며 오히려 다른 사람을 격려합니다.

보통 인간에게 환난은 평화를 깨는 것이기에 두려워 피하는 것이고 환난이 닥칠까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신 다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고 제자들에게 이어서 하신 말씀도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환난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각오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희망으로 환난을 바라면, 그리고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과 함께 환난을 당하면 환난 중에 평화롭고 오히려 기쁩니다.

사실 주님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시고,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평화이니 우리는 환난이나 다른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 그런 것들을 맞이할까 두려워하고 불안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평화를 얻는 길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한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219항; 민족들의 발전 179항 재인용)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 혹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곧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로,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4장 27절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왜 주일 미사 한 번은 나와야 하는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떠나셔야 하는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스승이 떠난다는 사실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선물을 남기십니다.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평화'를 남기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하필 평화를 남기셨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 미사에 나와 그 평화를 받아 가야만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작은형과 단둘이 점심을 챙겨 먹어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신 상태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조차 없던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부엌을 뒤져보니 밥솥에 밥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반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는 고프고 반찬은 없으니, 형과 저는 어쩔 수 없이 물에 맨밥을 말아 먹기로 했습니다. 맹물에 밥을 말아 몇 수저 떴지만,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서러운 마음에 부엌을 다시 샅샅이 뒤졌는데, 기적처럼 작은형이 구석에서 '총각김치'가 가득 든 통을 찾아냈습니다.

어머니가 일터로 나가시며 저희를 위해 숨겨두듯 남겨놓으신 반찬이었습니다. 그 맹물에 만 밥에 총각김치를 얹어 먹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물 말은 밥을 먹던 저희 형제들의 마음속에 불안이나 원망이 있었을까요? 전혀 없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어떤 때는 라면만 먹고 지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저희는 부모님이 저희를 단 한 끼도 굶기신 적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 반드시 우리가 먹을 것을 다 준비해놓으셨을 것이라는 압도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에 나가 고생하시는 것도 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함이며, 결코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눈앞에 사랑하는 이가 없어도, 그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무언가(총각김치)를 발견할 때 영혼에 스며드는 절대적인 안정감. 저희 형제들이 아주 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이 어쩌면 다 이렇게 착하냐"는 말을 종종 들었던 이유는, 바로 이 '보이지 않아도 믿어지는 평화'가 저희 내면을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심리와 생태계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법칙'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안은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평화는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는 생존의 법칙입니다.

아이가 언제 악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할까요? 부모의 돌봄을 확신하지 못할 때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불안정 애착(Insecure Attachment)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 나에게 평화(양식, 사랑, 보호)를 거저 공급해 준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아이는 '이제 내 생존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인간은 짐승의 본능으로 퇴행합니다. 남을 짓밟고 빼앗아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기에 악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녀에게 이 평화를 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훌륭한 어머니는 자신이 곁에 없을 때도 자녀가 평화를 누리도록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놓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매일 새벽 연탄불을 갈아주시던 그 소리와 온기 때문에 어머니가 안 계신 빈방에서도 늘 마음이 평화로웠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완벽한 어머니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의 빈자리에 불안을 남기지 않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제자들을 떠나셔야만 했을까요? 곁에 계속 계시면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요한 14,28)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생존의 법칙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어머니가 곁에서 자녀를 계속 돌보고 싶지만, 자녀에게 양식(평화)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반드시 집을 나서서 '더 큰 생명과 재화가 있는 곳(일터/남편)'으로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바로 모든 생명과 은총, 평화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근원(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버지께 가셔야만, 성령이라는 영원한 배송 시스템을 통해 하늘의 무한한 양식이 우리 식탁 위로 매일 배달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굶주리지 않을 우주적 공급망을 개통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공급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약의 설계도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척박한 광야에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하느님은 매일 새벽 만나를 내려주시며, 그들이 생존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왕의 여유)'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주 이상한 법칙을 하나 주십니다. "만나는 매일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한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마라." (탈출 16,19 참조).

왜 그러셨을까요? 인간은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창고에 양식을 가득 쌓아두면, 인간은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라 내 창고의 크기를 믿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약속을 잊고 만나를 몰래 남겨두었을 때, 그것은 어김없이 벌레가 생기고 구역질 나는 악취를 풍기며 썩어버렸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16장)

평화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공급자와 접속하여 새롭게 받아오는 것입니다. 만나가 썩어버렸듯, 하느님과의 접속이 끊긴 인간의 영혼은 부패합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어둠으로 빠져드는 것, 이것이 인간 본성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총각김치', 즉 평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제대 위에서 쪼개어지는 그분의 '살과 피(성체)'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를 떼어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기억(Anamnesi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주일 미사에 나와야 할까요? 교회가 정한 귀찮은 규칙이라서가 아닙니다. 엿새 동안 험난한 세상에서 바오로처럼 돌을 맞고 상처받으며 "내 생존은 내가 책임져야 해"라며 악바리처럼 버티느라 짐승처럼 변해가는 우리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일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는 순간, 우리는 어릴 적 맹물에 만 밥을 먹으며 총각김치를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절대적인 평화를 다시 '기억'해냅니다.

"아,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먹여 살리시는구나. 내가 버려진 고아가 아니라, 하늘의 모든 창고를 상속받은 하느님의 자녀구나!"

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이 바로 미사입니다.

교회가 주일 미사를 고의로 빠지는 것을 대죄(고해성사가 필요한 죄)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 미사를 빠진다는 것은 단순히 결석 한 번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영혼에 평화의 양식을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을 스스로 끊어버리겠다는 위험한 결단입니다.

평화가 끊기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생존 본능에 휩싸여 악해집니다. 미사에 나오지 않아 성체를 영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어둠과 악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방조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미사에 나와 모시는 성체와 주님의 말씀은,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줍니다. 거기서 오는 평화가 우리를 악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악에서 지켜줌을 상기합시다. 새롭고 대단한 맛이 아니더라도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성체를 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즘 중동 전쟁으로 기름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름값 싼 주유소를 찾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신부와 어디를 지나가는데, 한 주유소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여기 기름이 제일 싸.”

그러나 기름값이 제일 싸다는 것을 알아도 이 주유소를 굳이 찾아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이곳까지 가는 시간과 그 거리까지 드는 기름값을 생각하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기름값이 더 비싸 보여도 가까운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것이 더 이득입니다.

효율성을 따지면 자기의 선택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냥 표면적인 것만을 바라보면 제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먼저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고 자기에게 더 이득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따진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맞을까요?

얼마 전, 고해소에 어떤 어르신이 들어오셔서, “저는 귀가 잘 안 들리니 크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훈화를 크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보속을 드리려고 하는데, 그 어르신이 “신부님! 왜 화내시는 거예요?”라고 항의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큰 목소리를 화난 목소리로 들으셨나 봅니다. 오해하면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에 대해 오해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당시 로마 제국이 자랑하던 ‘팍스 로마나’처럼, 강력한 무력이나 통제를 통해 얻어지는 외적이고 일시적인 갈등의 부재를 뜻합니다. 이는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한 평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주어지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충만함입니다.

평화를 오해하지 않도록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의 평화는 고난이나 시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곧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과 박해라는 폭풍우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내적 고요함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주님, 그래서 가장 효율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며 헌신이고 책임(에리히 프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세상의 평화는 이루어야 할 조건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매여 있습니다. 조건이 무너지면 평화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 어떤 상황 한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깊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진 화해 안에서, 성령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살아지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성령 안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화해의 은총입니다. 찾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드러나는 근원적 안정입니다.

주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내면에는 깊은 안정이 자리잡습니다. 신뢰 속에서 주어지는 내어맡김의 진정한 평화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평화는 모든 조건과 불안을 넘어,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중심을 잃지 않는 복음의 삶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가 가장 좋은 평화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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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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