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 머문다는 건 오래 바라보고, 조금 참아내고, 다시 마음을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은 식어가는 마음까지도 주님께 다시 맡겨보는 시간 속에서 천천히 깊어지는 것 같아요.
기쁨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오래 머물 때 조용히 찾아온다는 것을 알려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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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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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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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5장 7-21절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무렵
7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3 그들이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4 하느님께서 처음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모으시려고 어떻게 배려하셨는지, 시몬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5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18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9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1 사실 예로부터 각 고을에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봉독하며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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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9-11절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5월 7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8:5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사랑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
어느 청년이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필’이 안 와서” 맞선을 거절하였다고요. 사랑은 ‘필’, 곧 느낌일까요? 느낌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시작되지만, 사랑을 지속하려면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였다가도 헤어지거나, 부부로 살면서도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10).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은 인내와 끈질긴 배움을 요구하지만 그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려면 끊임없이 연습을 되풀이해야 하지만, 한 번 멋지게 연주하고 나면 그 기쁨으로 연습의 고단함을 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배우고 익히며 성장해야 하는 예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긴 세월 함께 지내며 예술처럼 사랑을 가꾼 노년의 부부들은 아마도 이 기쁨을 알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는 사랑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례하며 이러한 사랑의 예술을 배웁니다. 오늘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사랑의 살과 피가 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얼마나 좋을까, 사랑의 기쁨을 알고 체험하면!
구약의 율법과 하느님 계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 초대교회가 율법 준수 문제로 위기를 맞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하느님의 계명으로 믿고 있는데 이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계명도 율법과 다른 것 같습니다. 율법은 속박이지만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이고 자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도 아니고 하느님의 계명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인 율법을 자기들의 소유로 바꾸었으며 그것으로 율법을 잘 모르는 이들 위에 군림하며 억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주님을 죽이려는 과정에서 율법을 소유한 자들이 보인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이들 손에 있는 율법은 사랑의 계명의 아니라 이처럼 깔보고 군림하고 억압하며 오늘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갈라치고 차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칼로 비유하면 의사에 손에 있는 칼이 아니라 깡패의 손에 들린 칼입니다. 이에 비해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하느님 계명과 당신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하는 계명이고, 그리하여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주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는 계명이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하는 계명이니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분노하시거나 내치시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당신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랑을 찾아간다고 해서 자식에게 분노하고 부모 자식의 관계를 끊자거나 당신의 사랑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엇보다 사랑의 기쁨 안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기쁨 안에 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곧 나도 또 너도 하느님 사랑 안에 같이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되 하느님 사랑 밖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고 다른 이는 밖에 있어도 무관심한 것이 아니며 너와 나 우리가 모두 같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묾으로써 기쁜 그런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기쁨을 알고 체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사랑의 기쁨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오늘 사도행전의 유대주의자들처럼 하지 않고 사도들처럼 모두 같이 하느님 사랑의 계명 안으로 들자고 하고 들게도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기쁨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사랑받은 존재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의 원천이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밝히십니다. 결국,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받은 당신의 그 사랑에 머무름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됨에 동참하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는 ‘당신의 사랑’은 실제로 사랑하기를 실행할 때, ‘그 실행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에게 밝히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그러니 지금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기쁨”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이중의 기쁨, 곧 ‘예수님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 입니다.
<첫 번째> 기쁨은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받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 대해서는 이 <고별사>의 뒷부분에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또한,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기쁨”으로 표현합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두 번째> 기쁨은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얻어지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곧 우리가 당신과 아버지의 ‘사랑의 기쁨’에 동참하는 기쁨입니다.
이토록, ‘기쁨’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만으로 우리는 이미 ‘기쁨’입니다.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1항)
그러니 지금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기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쁨”은 우리가 이미 하늘나라를 사는 종말론적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하오니, 주님! 제가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머물러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만이 오롯이 저의 기쁨이오니,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5장 11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기쁨의 충만에 이르는 법: 이웃 사랑은 십자가의 해설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9-11)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목요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과 계명을 나를 얽매는 답답한 사슬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실천하기 너무나 버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계명을 지켜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이유가, 우리를 노예로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순종과 희생이 어떻게 기쁨의 샴페인을 터뜨리는지, 이 역설적인 복음의 신비를 풀기 위해 아주 가슴 시린 단편 영화 한 편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3년에 제작된 체코의 단편 영화 '다리' (원제: Most)의 이야기입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도개교(배가 지나갈 때 들리는 다리)를 관리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일터에 데리고 갑니다.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멀리서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열차가 빠른 속도로 다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다리는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위로 들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알아챈 어린 아들이 기차를 멈춰 세우려다가 발을 헛디뎌 거대한 다리의 기계 톱니바퀴 속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멀리서 이 참상을 목격한 아버지는 경악합니다. 아버지는 극한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레버를 당겨 다리를 내리면 톱니바퀴에 낀 아들은 압사하지만 기차의 수백 명은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레버를 당기지 않으면 기차는 강물로 추락해 모두가 몰살당합니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며, 결국 기차를 살리기 위해 레버를 당깁니다. 굉음과 함께 다리가 내려앉으며 아들의 생명은 부서졌고, 기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사히 다리를 통과합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꿈에도 모른 채 창밖을 보며 웃고 떠듭니다. 마약을 투약하려던 한 젊은 여성도 창밖을 무심코 바라봅니다. 바로 그때, 기차 창밖으로 아들의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짐승처럼 오열하며 절규하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와 그 여성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마주칩니다.
그 순간, 여성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꽂힙니다.
'아! 지금 내가 이 기차 안에서 평온하고 안전하게 앉아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저 남자의 가장 소중한 아들의 목숨을 갈아 넣은 희생 덕분이었구나.'
이 영화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기차 안의 모든 승객이 목숨을 건졌지만,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그 기쁨의 깊이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직 한 사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희생한 아버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목격한' 여성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시어 지금 기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에 탄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기쁨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으로 온전히 누리려면 한 가지 절대적인 조건이 필요합니다. 영화 속 여성처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아드님을 십자가의 톱니바퀴에 밀어 넣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찢어지는 고통을 내 가슴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논리가 하나 파생됩니다. 만약 그 기차 안의 여성이 아이들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1그램도 없는 소시오패스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오열을 보고도 '운수 나쁜 영감이네' 하고 고개를 돌렸을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무엇인지 공감할 능력이 없기에, 아버지가 치른 희생의 무게가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식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거울 신경 세포'의 법칙입니다.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면, 타인이 나를 향해 쏟는 사랑의 크기를 결코 해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밥상에 올라온 생선의 가장 맛있는 살을 발라 내 밥그릇에 올려주실 때, 그것이 눈물 나는 희생인 줄 모릅니다. 철없는 생각에 '우리 엄마는 생선 대가리만 좋아하시는구나'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고, 내 입에 들어갈 밥 한 숟갈을 굶어가며 자식의 입에 고기를 넣어줄 때, 비로소 과거 어머니의 마음을 거울처럼 반사하여 깨닫게 됩니다. '아, 우리 엄마도 고기를 좋아하셨구나. 나를 너무 사랑해서 당신의 본능을 꺾으신 거였구나.'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는 데이터가 내 안에 쌓여야만, 나를 향한 타인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20절은 이 진리를 명확히 짚어줍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출처: 1요한 4,20). 눈앞의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보듬으며, 밉상인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내 자존심을 꺾는 뼈아픈 희생을 해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위해 치르신 희생의 값이 얼마인지 영원히 계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왜 원수를 사랑하고,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이웃을 품어주어야 합니까? 저 사람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나 자신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라는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은 마치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쓰인 100억짜리 당첨 수표'와 같습니다. 내 손에 100억짜리 수표가 쥐어져 있어도, 내가 그 언어를 읽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종이 조각일 뿐 내게 어떤 기쁨도 주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희생'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 자존심을 꺾고 이웃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언어인 '희생과 사랑'이라는 외국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순간, 비로소 내 손에 들린 십자가가 100억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러브레터임을 읽어내게 됩니다. '아! 창조주 하느님이 나를 살리려고 당신 아들의 목숨을 내놓으셨구나!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존귀한 존재구나!' 이 압도적인 자존감을 깨닫는 순간, 우리 영혼에는 세상 어떤 권력도, 돈도, 질병도 빼앗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 실천은 하느님께 바치는 무거운 세금이 아니라, 내 영혼의 기쁨을 인출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는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명을 실천할 때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된 기쁨에 도달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제 자신의 아주 내밀하고 소중한 실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크게 다치셔서 수원 빈센트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와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 병원에서 새우잠을 주무셔야 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병원 식당 설거지를 도와주시고 남은 밥을 조금 얻어 드시며 버티셨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저는 고모 댁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고모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마음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당신의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고 평생 고아로 살아본 뼈저린 상처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니 '내 자식마저 나처럼 고아를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공포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셨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셨습니다. 그러다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쌩쌩 달리는 큰길가를 지나치려는데, 웬 아이 하나가 그 위험한 트럭들 사이 먼지구덩이에 주저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더랍니다. 바로 저였습니다. 어머니는 달려와 저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잃어버린 목숨을 찾은 기쁨과 안도감에 우셨고, 저는 사실 상황 파악도 못한 채 그저 배가 고파서 같이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사제가 되고, 1년 동안 냉담자들을 찾아다니며 방문 사목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거리를 헤매며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저는 비로소 저를 찾아 먼지구덩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셨던 어머니의 그 절박한 심정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 저는 제 영혼을 관통하는 거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마주했습니다. '아, 하느님도 나를 찾으러 이 먼지투성이 세상으로, 십자가라는 위험한 트럭이 달리는 길가로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오셨구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0).
이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펄떡이는 생명으로 제 영혼에 부딪혀 왔습니다. 내가 그토록 절박하게 사랑받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 영혼에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미칠 듯한 기쁨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웃을 찾아 나서는 사랑의 수고가 어머니를 이해하게 했고, 어머니를 이해하니 하느님의 사랑이 해독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똑같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수고를 거부하면,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이 흘리신 피와 땀을 보고도 "아이고, 하느님은 원래 십자가 지는 걸 좋아하시는 특이한 분이구나" 하고 넘겨버리는 영적 바보가 되고 맙니다. 교부 성 대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흘리는 땀방울만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유일한 저울표입니다." (출처: 성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 강론』).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지구의 나이는 어떻게 될까요? 학자들은 약 46억 살 정도로 봅니다. 그렇다면 현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나이는 얼마일까요? 20만 살 정도 됩니다. 20만 년이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지만, 46억 년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아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무엇인가 시작하게 된 것은 겨우 5만 년 전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동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동족의 주검을 땅에 묻는 관습이 생겼으며, 사냥법이 좀 더 진보해졌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되었던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는 약 4만 년 전에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인도네시아의 벽화입니다. 그리고 논밭을 일궈온 기간은 겨우 1만 년 전이고, 문자를 쓴 기간은 5천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문명의 나이는 4천 년 정도 됩니다.
이렇게 지구의 역사를 보면서, 지구의 전체 나이에서 지금 우리 삶은 순간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 안에서는 어떨까요? 지구의 나이도 짧은 순간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보이지도 않는 점과 같은 우리의 시간인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무시해도 아무 상관 없을 텐데, 당신의 충실하심으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느님 사랑이 대단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하느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는 그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내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나의 특별한 능력과 재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위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이 거대한 폭포수 같은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을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라고 가르쳐주십니다. 규칙을 지켜야만 사랑해 주겠다는 조건부 거래를 제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행위 자체가 계속 주님의 사랑에 머무르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고행이나 의무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점과 같은 우리인데도 계속해서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의 충실하심에 감사하면서, 언제나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 좋고 나쁜 건 없어. 저마다의 생각에 따라 좋게 보이기도 나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일뿐(세익스피어, ‘햄릿’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우리는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자기 자신이 됩니다. 사랑은 붙잡을 때 멀어지고 머무를 때 깊어집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식입니다.
사랑과 계명은 대립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이 계명 안에서 육화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사랑받고 있고, 이미 그 사랑 안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사랑에 응답하는 충만한 존재입니다. 이 머무름의 목적은 기쁨의 충만입니다. 사랑 안에서 비롯된 기쁨은 상황을 넘어 지속되는 내면의 참된 기쁨입니다.
기쁨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발견되는 기쁨입니다. 이렇듯 머무름은 완벽함이 아니라 돌아옴입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현재에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오늘이, 이미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머무름 자체가 이미 충만한 기쁨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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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