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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3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30.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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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을 맞아들인다는 건, 삶의 자리도 함께 낮아지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자꾸 다른 곳을 향하곤 해요.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 사람들을 맞이하셨고, 제자들의 발 앞에서 몸을 낮추셨습니다. 그 모습이 오늘 저를 조용히 비춥니다.

 

여전히 높은 자리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분은 이미 낮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을 놓치지 않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3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3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3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3장 13-25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3장 16-20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30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8:0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행복은 여기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서로 낮추고 서로 섬기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저 그분께 무엇인가를 바라며 기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분을 따라 살겠다는 결심까지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걸으신 ‘낮아지심의 길’을 기꺼이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인정받고 높아지는 삶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손해를 감수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 있는 감실’이 되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오신 주님께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시기를, 그래서 내가 머무는 자리마다 주님의 낮아지심과 섬김의 모습이 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체성사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서려는 세상의 논리가 아닌, 작아지고 나누는 삶으로 참으로 행복해지는 ‘하늘 나라의 논리’를 선택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알고 느끼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본당에서, 일터에서 내가 먼저 낮아질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돌아보며, 그 자리를 기꺼이 선택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행복한 이들’이(13,17 참조)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편의주의적인 믿음과 실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남에게 얘기하는 것은 쉬우며, 객관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쉽다는 것 말입니다. 사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고 게다가 내가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에 객관적으로 얘기하고 남에게 얘기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고 쉬운 법입니다.

저로 말하면 제가 주님의 종인 것은 알고 인정해도 종노릇 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기보다는 아버지로 섬기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주 하느님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고요. 이것이 바로 저의 편의주의입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 편의주의요, 주 하느님은 불편하니까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하는 편의주의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느님도 엄하신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요, 심판관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한 탈란트를 땅에 묻은 종처럼 하느님을 모진 분으로 알고 믿기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 믿는 것이 낫겠지요.

그런데 저에게 일생 문제인 것이 바로 자비로우신 분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렇게 믿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점이고, 경외심이 없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점입니다.

제 생각에 경외심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은 무서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비로운 사람을 존경심 까닭에 더 두려워하는데 그것이 경외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고 은총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도로 뺏어 가실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이 은총인 줄도 소중한 줄도 모르고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스승이나 애인을 진정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선물이나 정표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지 벌 받을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을 진정 경외하는 사람도 벌 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은총을 잃을까 두려워할 겁니다.

어쨌거나 편의주의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편의주의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그런 미성숙과 불행을 제가 언제 극복할 수 있을지, 저에 대해서 걱정하며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실천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이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고 실천하는 이’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섬김의 도’는 ‘실행하는 이’만이 배울 수 있는 ‘도’(깨달음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배우는 방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섬기면서 섬김을 배우고,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용서하면서 용서를 배우는 ‘실천을 통해’ 배우는 방법입니다. 마치 수영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수영을 배울 수 없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서는 결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실천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 다름 아닌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알고, 그것에 대한 전폭적인 승복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깊이 깨달아 알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그렇습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실현되지 않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칭하신 그레고리오 교종은 참으로 본연의 자리를 갈파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종들 중의 으뜸’, ‘종들의 대빵’이라는 말이 아니라, ‘종들을 섬기는 종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진정 섬김을 받은 자만이 진정 섬기게 됩니다.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3장 17절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사랑을 실천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의 설계도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남의 발을 씻어준다고 정말 다 행복해질까요? 어떤 이들은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속으로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라며 분노를 삭입니다. 비굴하게 노예처럼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오늘은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먼저 '스승이요 주님'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해야만 발을 씻어줄 때 행복할 수 있는지 그 심오한 영적 원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행복의 정의: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자존감'의 수치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거나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1978년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Philip Brickman)과 그의 연구팀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백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과,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사람들의 행복도를 장기 추적한 것입니다. 당첨 직후에는 하늘을 날 것 같았고, 사고 직후에는 지옥 같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과 3개월에서 1년이 지나자, 두 집단의 행복도는 사고 이전의 '기본 수치'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 부릅니다.

결국 행복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내 안의 변하지 않는 '자존감'의 수치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100억이 생겨도 곧 불행해지지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출처: Brickman et al., 『Lottery Winners and Accident Victims: Is Happiness Relative?』)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유와 명예를 긁어모으려 할까요?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들 내면에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텅 빈 사람은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포장해야만 비로소 존재감을 느낍니다.

내가 무언가를 움켜쥐려 할 때, 내 잠재의식은 이미 "나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부족한 존재다"라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셈입니다. 부족하다고 믿으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주적인 배경'을 가졌음을 압니다. 주님이 나에게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는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박수에 목매지 않습니다. 이미 최고로 높으니, 기꺼이 낮아져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왕의 여유'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 쉰들러가 울며 "차를 팔았더라면 더 구했을 텐데"라고 한 고백이 사실인지 궁금해합니다. 역사적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실화에 근거한 진실입니다.

쉰들러는 전쟁 초기 자존감이 낮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돈과 여자, 독일 나치 당원이라는 화려한 명예로 자신의 빈 영혼을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다인들의 비참한 '발'을 닦아주기 시작하며(구출 사역), 돈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에 눈을 봅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실제로 파산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 '레오폴드 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쉰들러는 말년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공장주로 돈을 긁어모을 때는 매일 밤 불안과 허무에 시달렸네. 하지만 1,100명의 목숨을 위해 내 전 재산을 탕진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가치, 즉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느꼈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지."

누군가를 높여주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세상의 종이 아니라 '다 가진 자(Haver)'가 된 것입니다. 다 가진 자가 되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헬퍼스 하이(Helper's High)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주는 자가 더 행복한 이유는, 주는 행위 자체가 '나는 남에게 줄 것이 넘치도록 많은 위대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자신에게 확증해주기 때문입니다. (출처: 토마스 케닐리, 『쉰들러의 방주』; 미츠코 자크, 『오스카 쉰들러의 생애』)

17세기 콜롬비아의 성 베드로 클라베르 신부님은 자존감 전수의 승리를 보여준 성인입니다. 그는 짐승처럼 실려 온 노예들을 씻기며 단순히 봉사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신부님의 전기 작가 앙헬 발투스는 신부님이 가장 행복해했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전염병에 걸려 배설물 속에 누워있던 노예 한 명이 신부님의 손길을 받고 "아, 나도 하느님의 아들이군요!"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릴 때, 클라베르 신부님은 그 노예의 썩어가는 발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주님! 제가 지금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이 형제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저도 제가 누구인지 알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명을 전하는 행복한 노예입니다!"

이 인용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신부님이 누린 행복은 단순히 착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주어 그를 부활시킬 때, 그를 살려낸 자신 또한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신적 행복'에 동기화된 것입니다. 상대를 하느님으로 대접할 때, 나 자신이 하느님임이 비로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출처: 앙헬 발투스, 『성 베드로 클라베르의 생애』)

오늘 주님께서 우리 발을 씻어주시는 이유는 "너는 닦여야 할 죄인이 아니라, 내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고귀한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며 여러분의 자존감을 하느님 수준으로 업데이트하십시오. 내가 비굴한 상태에서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봉사를 통해 상대의 인정을 얻어내려는 비참한 '구걸'일 뿐입니다. 그런 세족례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진짜 행복은 내가 먼저 '다 가진 자'임을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당신의 아드님까지 내어주셨는데 내가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이미 하늘나라의 상속자인 '다 가진 자'가 되어, 내 곁의 형제도 '다 가진 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누리는 행복은 지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삶에 감사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이 크게 보이면서 사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지를 계속 생각했었습니다. 부모님께 따지고 싶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어요?”라고 말입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부족함을 안고 태어나 앞으로 계속 힘든 삶을 살 것만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아마 이때가 사춘기 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성당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떠했을까요?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고민이 해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더 힘든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무엇이든 다 부정적으로 보였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행동과 선택을 통해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먼저 존재한 다음에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의해 우리는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사랑 때문입니다. 존재하지 않음보다 존재함이 더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자기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 이렇게 우리는 계속 성장하게끔 맞춰 있습니다. 그런데 멈추려는 나약함이 자주 등장합니다. 다시 마음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요 주님이시면서도 종의 모습으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라는 말씀은,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아지셨으니,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적이고도 강력한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아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제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누군가와 한 식탁에서 빵을 나눈다는 것은 깊은 신뢰와 생명의 연대, 평화의 언약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발꿈치를 치켜듭니다. 주인을 향해 뒷발질하는 폭력적이고 배은망덕한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제자들이 곧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부인할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신뢰하시며 하느님의 대리자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존재 차체에 의미를 가지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삶은, 목을 조일 게 아니라 만져줘야 하는 것(레이 브래드 버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높아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십니다.

삶의 기준을 완전히 뒤집고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예수님의 진정한 초대는 낮아짐입니다. 섬김 없는 높음은 공허하고 섬김 속의 낮음은 더욱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지배가 아니라 파견된 섬김의 길입니다. 섬김은 우리 자신을 타인과 연결시키며 존재의 깊은 안정을 가져옵니다.

겸손은 선택이 아니라 파견된 존재의 본질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은 경쟁이 되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은 진정한 복음이 됩니다. 종은 자신을 결코 증명하지 않습니다. 맡겨진 일을 통해 주인을 드러낼 뿐입니다.

낮아진다는 것은 불필요한 비교와 집착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빛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더 깊어집니다. 낮아지는 삶의 가치가 누군가를 살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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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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