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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2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25.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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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말씀이, 외롭고 두려운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의 품을 열어주시는 순간처럼 느껴져요.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 곁에 계신 어머니를 바라보며, 저희 삶의 아픈 자리에서 말없이 함께 기도해주시는 어머니를 기억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창세기 3,9-15.20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9,25-34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25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소개 00:06

✚ 행당동성당 소개01:06

✚ 미사 시작 02:06

✚ 강론 시작 12:4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

나자렛의 소박한 여인이셨던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비슷한 예로 전태일 열사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1960년대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다 스물두 살의 나이로 분신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아들이 죽은 뒤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핍박받는 노동자들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어디에 있든 함께합니다. 자녀가 고통받을 때 함께 고통받고, 자녀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과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초대 교회부터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스도의 정배보다 성령의 정배됨은 어떨까?

지지난 주 어느 단체 피정을 동반하며 성모성월이라서 ‘성모님처럼 살기’라는 주제로 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령의 정배’와 ‘그리스도의 정배’ 중에 여러분이 무엇이 되길 원하는지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는지.

그런데 너무도 놀랍게도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성령의 정배가 되겠다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정배(Sponsa Christi)라고 했고 수도자 그중에서도 봉쇄 관상 수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했는데 이분들은 어머니여서 그런지 성령의 정배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클라라와 자매들을 ‘성령의 정배’라고 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받은 저였기에 저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씀드리며 이런 얘기를 덧붙여서 했습니다.

저는 여자가 되거나 동정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어머니가 되고 싶고 마리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있으며 그래서 동정 마리아보다는 성모 마리아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생명을 잉태하고 내 뱃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고 자라는 체험을 해보고 싶다고, 그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하기 위해 입덧도 하고 고통도 당하고 싶다고, 태어난 아기에게 내 젖을 물리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싶다고.

사실 존재를 있게 하고 생명을 살게 하는 것처럼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사랑이 있지만 이런 사랑만큼 위대하고 고귀한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존재가 있게 하고 생명을 살게 한다면 인류를 위해 엄청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킨 것보다도 더 위대하고, 그것으로 그의 사랑은 정말 위대하고 할 바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나 수도자들은 만인을 사랑한다면서 어쩌면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결국 한 사람도 있게 하지도 살게 하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언제부턴가 저는 저의 소신학교 친구들 가운데 결혼한 친구들에게 어떤 열등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사랑은 그들의 사랑에 비해 관념적인 사랑에 그치는 것과 같아서 말입니다.

어쨌거나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시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령의 정배로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주시고 십자가 현장에 제자와 함께 계셨던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후에도 성령을 받기 위해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심으로써 기도하는 교회의 본보기요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본보기가 되셨지요.

그래서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마리아께서는 티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교회의 창설자 그리스도를 낳으시어 교회의 시작을 도우셨나이다. 또한 사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의 간구를 제자들의 기도에 결합시켜 기도하는 교회의 본보기가 되셨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처럼 성령의 정배들이 되어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주는 어머니들이 되고, 마리아를 본받아 교회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교회의 어머니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은 십자가 아래 끝까지 서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이미 교부시대 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모님을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년)하시면서, 성모님께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이 호칭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오늘의 <독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들었던 <창세기>의 하와 이야기이고, 또 하나의 독서는 <사도행전 1,12-14절>인데, 그 의미는 같습니다.

<창세기> 독서는 “하와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이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독서는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음”​(행전 1,14)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아들을 맡기신 오늘 <복음>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여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이제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서 있게 하소서.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9장 25절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의탁으로
형제들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당신 아들과 함께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성체에 대한 사랑은 비례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9,26-27)

찬미 예수님! 성령 강림 대축일 바로 다음 날, 우리 교회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지냅니다. 저는 오늘 ‘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으면 성체성사도 인정하지 못하게 될까?’라는 주제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 수십 년 전통을 자랑하는 곰탕집이 있었습니다. 그 식당의 곰탕 국물은 일흔이 넘으신 늙은 어머니가 매일 새벽 3시부터 가마솥 앞에서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뼈를 고아 끓여낸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장성한 아들은 홀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국밥을 날랐습니다.

어느 날, 자칭 유명한 미식가라는 교만하고 돈 많은 남자가 식당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들이 내온 곰탕을 한 숟갈 맛보더니 그 깊고 진한 맛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야, 진국이군! 최고야!"

그런데 마침 주방에서 땀에 전 앞치마를 두르고 굽은 허리를 한 노모가 홀로 나왔습니다. 미식가는 노모를 위아래로 불쾌하게 훑어보더니 아들에게 삿대질하며 아주 무례하게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사장! 국물 맛은 좋은데, 식당에 당신같이 냄새나고 볼품없는 늙은 할머니가 떡하니 돌아다니니까 밥맛이 확 떨어지잖아! 깨끗한 주방장을 쓰지 그래?"

사장은 말했습니다.

"저분이 제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가주세요.”

세상에는 아주 명확하고도 상식적인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요리하는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면, 그 요리를 먹을 자격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리는 단순히 식재료의 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요리를 만든 사람의 시간, 정성, 희생, 곧 그의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톨릭 신자로서 매일 미사 때 제대 앞으로 나아가 입을 벌려 받아먹는 '성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피, 즉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살리기 위해 먹이시는 천상의 곰탕 국물과도 같은 '절대적인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살과 피라는 양식은 2천 년 전 골고타 언덕에서 도대체 누구의 몸에서 유래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상의 인간 아버지가 없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육신을 구성하는 세포, 염색체, DNA의 100퍼센트는 오직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를 빌려 형성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열 달 동안 마리아가 섭취한 양식과 피를 통해 길러진 육신이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곧,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이는 내 몸이다"라고 내어주신 그 살과 피는, 본질적으로 어머니 마리아가 당신의 살과 뼈를 깎아 고아낸 처절한 모성의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 형제들이나 일부 교만한 신앙인들은 방금 전 곰탕집의 미식가와 똑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예배당에 앉아 십자가의 은총과 구원의 빵은 달라고 열렬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살과 피를 세상에 내어주기 위해 평생을 십자가의 칼날에 심장이 찔리며 피눈물을 흘리신 성모 마리아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만 있으면 되니, 마리아 당신은 저 뒤로 빠져 있으시오.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공경할 필요 없소! 나는 구원의 국물만 들이켜면 되오!"

어머니의 태중과 그 생물학적 희생을 부정하고 무시하면서, 어떻게 그분의 살과 피로 사시며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 곧이곧대로 들리겠습니까? 어머니의 살이 보통 죄인의 살이라면, 그리스도의 살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아니야, 그건 진짜 살과 피가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의미하는 거야!”라고 성경을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어지는 그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굳이 요한을 향해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7)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이 피 흘려 세우실 성체성사의 만찬에 우리가 초대받았을 때, 그 양식이 우리 영혼 안에서 독이 되지 않고 참된 생명으로 피어나도록, 손수 먹여주실 완벽한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증인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지날 때, 하느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곧 신약의 '성체'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귀한 만나와 율법판을 금으로 만든 '계약의 궤(법궤)' 안에 소중히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히브 9,4 참조).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계약의 궤'를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늘의 살아있는 빵이신 예수님을 당신의 순결한 태중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성모 호칭 기도에서 마리아를 '계약의 궤이신 마리아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였습니다. 너무나 거룩하여, 함부로 만지거나 불경하게 대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2사무 6장 우짜의 죽음 참조). 위대한 다윗 왕조차 그 궤 앞에서 두려워 떨며 춤을 추며 공경했습니다. 만나가 거룩하다면, 그 만나를 품었던 궤 역시 하느님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지극히 존귀한 성물입니다.

계약의 궤를 천대하고 멸시하는 사람이, 그 안에 담긴 만나나 하느님이 직접 새겨주신 율법판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상자를 쓰레기 취급하는 자는 결국 그 안의 보석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7).

집은 인간의 자아와 내면, 영혼의 공간을 뜻합니다. 요한은 자기 영혼의 안방에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은 곧 마리아의 살이다 (Caro Jesu, caro Mariae est)."

하느님의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을 참되게 사랑할 방법은 이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리를 먹을 자격은 요리사를 존중할 때 비로소 주어집니다. 계약의 궤를 존중할 때만 그 안의 만나가 생명이 됩니다. 성모님을 내 어머니로 받아들임은, 내가 미사 때 먹는 성체가 결코 죽은 빵이나 상징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참 생명의 피와 살임을 보증받는 가장 확실한 도장을 찍는 행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평생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한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늙어서 많은 짐을 나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마을로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 있는 우물에 빠진 것입니다. 이 우물은 말라버려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우물이었습니다. 일꾼이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당나귀는 너무 늙어서 이제 쓸모없고 우물도 말라버려 거추장스러우니, 당나귀를 굳이 꺼내지 말고, 차라리 우물을 흙으로 메워 당나귀의 무덤이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일꾼들은 우물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떨어지는 흙과 돌에 깜짝 놀란 당나귀가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마구잡이로 쏟아진 흙이 다져지고 바닥이 조금씩 평평해지면서, 덕분에 당나귀는 흙을 딛고 밖으로 무사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인의 결정은 당나귀를 포기하고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리한 결정이 오히려 당나귀에게는 이익이 되어 살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음에 상처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비난과 상처로 힘들어합니다. 이에 포기하면 아무 결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때 하느님의 능력에 의탁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안에서 나의 이익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먼저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어머니와 제자를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제자를, 제자에게 마리아를 맡기심으로써,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때부터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를 넘어, 교회를 품고 돌보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어머니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권력이나 영광이 아닌, 그리스도의 찢긴 옆구리와 마리아의 애통한 심장이 만나는 십자가 아래에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십자가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통받는 자녀들 곁에 굳건히 서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셨을 때, 요한이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신 것처럼, 우리 역시 신앙의 여정 안에서 성모님을 우리의 영적 어머니로 깊이 모셔야 하겠습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 포기와 절망이 아닌, 성모님 안에서 커다란 힘을 얻고 힘차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다 보면 내가 지킨 약속들이 나를 지킨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꽃들이 피어나 향기를 건네듯 우리의 삶 또한 위로와 기쁨의 향기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혈연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세우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어머니로 교회 안에 주어집니다.

점점 서로를 돌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함께 기대고 함께 품어 주며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제자가 마리아를 집에 모셔 들였듯이 우리 또한 삶의 중심에 사랑의 마음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완성되는 신앙의 길이며,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힘입니다. 십자가를 없애고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곁에 끝까지 머물러 주는 충실한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은총을 삶 안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너무나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장 깊이 받아들인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온전한 응답입니다.

상처와 약함의 십자가 자리에서 은총이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은총의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품어주는 어머니가 되십시오. 어머니의 사랑으로 끝까지 함께하는 사랑의 길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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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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