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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2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2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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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척하는 건 익숙한데,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오늘 복음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마음도 믿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 물음 앞에서 저도 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꺼내어 놓고 싶어졌어요. 오늘도 제 연약함까지 품어주시는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2026년 5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베드로1서 2,2-5.9-12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여러분은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불러내신 하느님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9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0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12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마르코복음 10,46ㄴ-52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28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1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간절함은 결국 닿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를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사람들이 막아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도 미국 신학교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강의를 따라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보려 하였지만, 결국 교수님들과 동료들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부끄러웠지만, 그들은 오히려 솔직한 저를 좋아하였고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바르티매오처럼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하였을 때 생각하지 못한 은총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간절함에 응답하십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0,51).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0,5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곧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신앙은 용기입니다. 나의 허물이 많고 죄에 걸려 몇 번씩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끊임없이 다가가는 용기입니다. 죄와 허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숨기고 혼자 해결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을 아십니다. 그분 앞에 솔직하게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낼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지금 바로 용기를 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그분께서 부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욕망을 헹궈낸 순수한 갈망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제가 아주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젖을 갈망하라고,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단어 젖도 제가 좋아하는 단어이고 갈망도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가끔 제가 엄마가 되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실은 반대로 제가 아기가 되어 엄마의 젖을 물고 빨고 싶은 갈망도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이 아니고 갈망입니다. 아기의 것은 욕망이 아니고 갈망입니다. 갈망이라는 단어를 사랑하게 된 제법 긴 역사가 있습니다.

미국에 가 살 때 성무일도 주일 아침 기도 시편을 바치면 제 마음을 아주 달콤하게 하는 영어 단어가 있었습니다.

“O, God, you are my God, for you I long! For you my body yearns; for you my soul thirsts, Like a land parched, lifeless, and without water.”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영어에서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뜻으로 ‘long for’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long’이라는 말에는 ‘긴’, ‘오랜’의 뜻도 있지 않습니까? 갈망이란 오랫동안 목말라야지만 그 갈망이 진짜이고 강렬하지요.

마침 어제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도 제가 너무도 사랑하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한 부분을 들려주어 묵상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았사오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에게도 그렇고 오늘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 갈망은 한번 맛보고 이미 맛본 사람들의 갈망으로서 맛보면 맛볼수록 더욱더 갈증/기갈을 느끼게 하는 갈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미 한번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자신도 잊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도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이미 맛보았다고 해도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다른 맛들로 더럽혀진 입은 맛 고수들이 새 맛을 보기 위해 입을 헹궈내듯 입의 정화와 맛의 정화를 먼저 해야 합니다.

저의 하루 시작은 이것의 반복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입이 아주 텁텁하고 씁니다. 그래서 입을 헹구고야 녹차를 끓여 마십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과 함께 어제의 욕망을 헹궈내고 새로운 갈망으로 하느님 말씀을 맛보고 깨닫고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느낄 것입니다. 제가 어떤 날은 욕망이 덜 헹궈진 갈망으로 하느님 말씀을 맛보고 나누고, 어떤 날은 잘 헹궈진 갈망으로 하느님 말씀을 맛보고 나누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희망을 가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기가 되어가고 욕망은 사그라들고 갈망이 자라서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처럼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시 146,8;마태 11,5).

<본문>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는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의 권능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보이지도 않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또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저의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환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며,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이요,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코복음 10장 51절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위대한 분께는 오직 위대한 것만을 청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10,51-52)

찬미 예수님! 연중 제8주간 목요일입니다.

본격적인 강론에 앞서, 우리들의 얄팍한 기도 생활을 꼬집는 아주 뼈 때리는 우화 하나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한 형제님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허둥지둥 차를 몰고 성당 주차장으로 들어왔습니다. 미사 시간은 다 되었는데 주차장은 이미 꽉 차서 차를 댈 곳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형제님은 식은땀을 흘리며 운전대를 꽉 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발 지금 당장 주차할 빈자리 하나만 딱 주십시오! 만약 자리 하나만 주시면, 제가 앞으로 매주 주일 미사에 절대 안 빠지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기적처럼 눈앞에서 차 한 대가 후진을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반짝이는 빈자리를 발견한 형제님은 기뻐하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이고 주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방금 제가 혼자 힘으로 빈자리 하나 찾았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느님께 참 많은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이번 승진 심사에서 꼭 통과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오늘 병원에 가는데 큰 병이 아니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인간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거나, 우연히라도 일어날 확률이 꽤 있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능한 일'만을 두고 기도하면 우리 영혼에 아주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깁니다.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방금 전 우화의 형제님처럼 이게 하느님이 들어주신 건지 아니면 내 노력과 우연의 결과인지 헷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붙으면 처음에는 "주님 감사합니다!" 하다가도, 돌아서면 '그래도 우리 애가 밤잠 안 자고 과외받은 보람이 있네.' 하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느님은 내가 밥상을 다 차려놓았을 때 숟가락 하나 얹어주는 조수나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런 식의 쩨쩨한 청원 기도는 백날을 바쳐도 우리의 '믿음'을 단 1밀리미터도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의 차원을 우주 끝까지 끌어올린 위대한 걸인 한 명을 만납니다. 티마이오스의 아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입니다.

바르티매오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르 10,47).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으며 잠자코 있으라고 윽박지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전 재산이자 유일한 이불이었던 겉옷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튀어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여러분이 만약 평생 구걸만 하던 바르티매오라면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아마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청했을 것입니다. "주님, 저 사람들이 하도 텃세를 부려서 구걸하기가 힘듭니다. 목이 좋은 길목 하나만 잡아주십시오." 또는 "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금화 열 닢만 주십시오."

이것은 부자였던 예수님의 후원자들에게 부탁하면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받았다면 그는 '예수님 일행이 참 적선 한 번 후하게 하네'라고 생각하며 며칠 배불리 먹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청원은 사람들의 상식을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51).

이것은 당시 의학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확률 0퍼센트의 미친 청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바르티매오를 꾸짖고 말렸던 이유도, 단순히 그가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어디 일개 거지가 분수도 모르고 저런 불가능한 헛소리를 빽빽 지르느냐"는 세상의 조롱이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불가능한 청원을 듣고 화를 내시기는커녕, 가장 완벽한 구원의 선언을 내리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10,52).

왜 불가능한 것을 청했는데 '믿음'이 구원했다고 하실까요?

불가능한 것을 청한다는 것은, 내 앞에 서 있는 이분이 단순히 병을 좀 고치거나 빵을 나누어주는 훌륭한 랍비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느님 본인'이심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인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4세기, 고대 세상을 제패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철학자 아낙사르코스(Anaxarchus)의 역사적 일화는 오늘 복음의 신비를 기가 막히게 꿰뚫어 줍니다.

어느 날 철학자 아낙사르코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무관을 찾아가 100탈렌트(오늘날 수백억 원에 달하는 거액)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깜짝 놀란 재무관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며 대왕에게 달려가 고자질했습니다.

"폐하, 저 철학자가 폐하의 은총을 믿고 아주 정신이 나갔습니다. 감히 100탈렌트라는 도저히 불가능한 금액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으며 재무관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가 요구한 돈을 1원도 빠짐없이 내어 주어라. 저 철학자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대접한 사람이다. 그는 내가 그 엄청난 금액을 줄 수 있을 만큼 막강한 부를 가진 왕이며, 또한 그 청을 거절하지 않을 만큼 관대한 군주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어주었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청함으로써 군주인 나를 진정으로 존중한 것이다." (출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우리는 하느님을 우주의 황제로 대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동네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대접하고 계십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쩨쩨하게 "감기 좀 낫게 해주세요", "주차장 빈자리 하나만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참으로 서운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는 100탈렌트를 청했던 철학자처럼, 눈을 뜨게 해달라고 매달렸던 바르티매오처럼, 우리의 상식과 능력을 완전히 박살 내는 '불가능한 청원'입니다.

제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 불가능한 목표를 청하고, 그것이 눈앞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목격할 때마다 제 영혼에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기쁨이 차오릅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의 이 당돌하고 무모한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지금 저와 똑같이 뛸 듯이 기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그분을 우주 최고의 권능을 지닌 참 하느님으로 굳게 믿어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마태 14,28)라고 외쳤던 베드로 사도의 그 거룩한 무모함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는 과학적으로 100퍼센트 불가능한 것을 청했기에, 물 위를 두 발로 걷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오상 성인 비오 신부님의 실화도 이를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온통 돌밭뿐인 폐허가 된 이탈리아 남부의 척박한 산골 마을 산조반니 로톤도에서, 비오 신부님은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병원을 짓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시 신부님의 주머니에는 동전 몇 닢이 전부였습니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며 비웃었지만, 신부님은 "하느님은 무한하시니 무한한 것을 청해야 한다"며 뚝심 있게 밀어붙이셨습니다. 그 불가능한 청원의 결과, 오늘날 그 산골짜기에는 유럽 최고 수준의 현대식 병원인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위로의 집'이 우뚝 서서 매일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출처: 알레산드로 다 리파보타니, 『오상의 비오 신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너무 큰 것을 청할 때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라, 너무 작은 것을 청할 때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위대하신 하느님께는 오직 위대한 것만을 청하십시오. 불가능을 청하는 자만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증명하는 기적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형제님께서 직장 상사에게 계속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지적을 받다 보니 자존감이 떨어지고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필요할까 싶었습니다. 삶의 균형이 깨지고 잠도 잘 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떠올려지는 것입니다. 죽음까지 생각했다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아는 신부님을 급하게 찾아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때?”, “성당 생활은 어때?”, “친구들과는 어때?” 등 계속해서 직장과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문제는 없고, 직장에서 문제만 심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직장에서의 ‘나’만 진짜 나일까? 우리는 단지 직업적 역할로서만 사는 것이 아니야. 가족, 친구, 성당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이름으로 잘 살고 있다는 거야. 직장에서만 조금 부족할 뿐인데 뭐 어때?”

우리는 종종 부족한 하나의 내 모습을 전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모습들이 모여 진짜 ‘나’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외치는 소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에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멀어서 볼 수 없었던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지만, 위축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사회적 제약보다 예수님 만나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이런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갑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겉옷은 낮에 햇빛을 가려주고 밤에는 이불이 되어주는 전 재산이자 생존 도구입니다. 또 구걸할 때 동전을 받는 깔개 역할도 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벗어던졌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과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르느냐?”(마르 10,51)라고 물으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같은 물음입니다(마르 10,36 참조). 제자들은 영광의 자리를 청했지만, 바르티매오는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즉 빛과 진리를 구합니다. 그 결과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병은 죄의 결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은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죄인, 또 아무것도 없는 거지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을 굳게 믿는 신앙인의 모습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도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며 상황에 맞게 그것을 적절히 쓰면서 살아간다(칼 융).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는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영적 깨어남이 필요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지를 다시 깨닫고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삶의 본질입니다.

삶의 본질은 겉모습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맑고 깊은 시선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서로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관계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부족함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진실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맑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진실을 왜곡하며 살아갑니다.

참된 눈뜸은 보이지 않던 사랑과 진리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빛 안에서 삶을 새롭게 살아가는 깨어 있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만나는 은총 가득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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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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