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기준보다 하느님 나라를 선택했던 순교자들을 떠올리면,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제 마음이 더 선명하게 보여요. 저는 여전히 익숙한 것을 붙잡고 싶고, 잃지 않는 쪽을 선택하려고 하거든요.
익숙한 욕심과 두려움의 껍데기를 깨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2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2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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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마카베오기 하권 6,18.21.24-31

나는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 무렵
18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21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24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5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28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다.
29 조금 전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던 자들은 그가 한 말을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고 악의를 품었다.
30 그는 매를 맞아 죽어 가면서도 신음 중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31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2,24-26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5월 29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소개 00:06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소개 01:20
✚ 미사 시작 01:59
✚ 강론 시작 16:4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새로운 나는 깨짐에서 시작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청소년의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청소년 세계의 알을 깨뜨리고, 그 세계에서 죽지 않으면 어른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말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밀알이 자기 세계를 깨뜨리지 못하면, 죽지 않고 밀알로 계속 남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변환기에 옛 삶에서 죽지 못하면 퇴보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참으로 잘 준비한 분들입니다. 1791년, 양반이었던 윤지충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를 거부하여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원리를 따르며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오늘 한국 천주교회로 자라났습니다. 그의 신앙의 씨앗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깨야 하는 껍데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멀리하라는 온갖 유혹, 탐욕, 시기, 질투, 미움이라는 죄의 껍데기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껍데기를 깨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에게 전구를 청하며, 오늘 우리도 조금씩 이 세상의 껍데기를 깨고 성령의 날개를 달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한생이 아니라 영생을
“이렇게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제 생각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축일에 마카베오서의 엘아자르 얘기를 독서로 선택한 전례적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엘아자르와 복자 윤지충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 다 제사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는 점이 우선 같습니다. 그런데 제사 거부 때문에 순교하게 된 거라고 아주 단순화하여 얘기할 수도 있지만 속 내용을 보면 우리가 생각할 점이 많고 복잡합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겉으로는 박해자들이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려주고 마음속으로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겉으로 배교해도 속으로 배교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렇게 해도 됩니다. 우리 박해 시대에도 그런 분이 많이 있었을 것이고, 마음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도 그런 분들을 배교자라고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꼭 당신을 위해 순교하기를 바라실까요?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죽는 꼴을 보기 싫어하실까요?
우리도 우리 자식이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다 죽게 되길 바라지 고생고생하다가 죽고 병들어 신음하다가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더더욱 우리가 건강하게 살다가 죽게 되기를 바라시고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을 더 바라시거나 꼭 바라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순교는 하느님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 때문이고 배교하지 않기 위해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기 위해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영생을 믿었기 때문에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고통스럽고 슬프기만 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은 일생을 집착하면 영생을 잃고 일생을 포기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믿은 분들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곧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랐던 분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순교 축일에 우리가 깨닫고 믿어야 할 것은 일생 때문에 영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생, 한평생, 한뉘, 이러한 생은 하나의 생입니다. 하나의 생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잃지 말아야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섬김의 헌신이 순교이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오늘은 그들 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1839년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입니다. 이들은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시대로는 오히려 103위 성인보다도 앞서 사셨던 분들입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교회를 일궈낸 이들이 누락되었다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의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된 것입니다.
그들 124위 중 최연소자는 12세로 이봉금 순교자이며, 최고령자는 75세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순교자입니다.
이들 가운데,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이며, 전라도(현재 충청도) 진산 출신으로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불사르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령을 내려지자 자수했습니다. 그들은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이들 중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로, 구베아 주교의 파견으로 1794년에 입국하여, 강완숙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성사를 집전했으며, 6년 만에 조선교회 신자 수를 1만 명으로 늘리는 데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신유박해 때 귀국을 결심했다가 순교하기로 마음먹고 자수했고, 새남터에서 효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또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아버지인데, 형 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에 입교했으며,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집필해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보급했고, 평신도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을 지내다 1801년에 순교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진산 군수가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또 다른 곳에 이송되어서도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고 문책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전합니다.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는 말씀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의 헌신”이야말로 곧 “순교”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섬김의 순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2장 26절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형제를 존중하게 하소서.
형제를 섬김으로 당신을 증거 하게 하소서.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를 떠받들어
사랑으로 순교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살려는 마음 : 우리를 지옥으로 만드는 마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4-25)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당혹스러운 역설을 선포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 힐링하라, 아프지 마라"라고 가르치는데, 주님은 정반대로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영원한 생명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은 곧 지금 여기서 누리는 완벽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뼈아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왜 내 목숨을 미워하고 죽이러 가는데 행복해진단 말입니까?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행복입니까, 아니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행복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을 지옥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돈이 없는 것도, 병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오직 나를 보호하려는 얄팍한 '자아'에게서만 뿜어져 나옵니다.
어떤 숭고한 목적이나 하느님을 위해 내 목숨(자아)을 기꺼이 내어놓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를 보호하려던 자아는 완전히 힘을 잃게 되고, 자아가 죽었기에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아예 발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소멸한 바로 그 빈자리에 쏟아져 들어오는 우주적인 평화, 그것이 바로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가면서도 누렸던 충만한 기쁨의 정체입니다.
이 기막힌 심리적, 영적 원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영화 '명량' (2014)에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330척의 거대한 왜군 함대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고작 12척뿐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고, 장수들마저 싸움을 포기하고 배를 돌려 달아나려 했습니다. 압도적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 모두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대장선에 홀로 선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엄명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11척의 배를 뒤에 남겨둔 채, 홀로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배를 몰고 나아갑니다. 수백 척의 적선이 쏘아대는 포화 속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완벽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여러분, 홀로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배를 몰고 나아가는 장군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행으로 가득 찼을까요? 아닙니다.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내 한 목숨을 온전히 미워하며 내던진 순간, 장군의 영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평화와 벅찬 자존감으로 타올랐습니다.
반면, 11척의 배에 숨어서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라고 바둥거리던 장수들과 병사들의 마음은 행복했을까요? 그들의 영혼은 수치심과 극도의 공포에 짓눌린 참혹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자아를 살리려 할수록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커져 그들을 질식시켰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되어 앞장서서 죽어가는 대장선의 그 숭고한 빛을 보았을 때, 숨어있던 장수들의 영혼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그들 역시 '살고자 하는 얄팍한 자아'를 버리고, 기꺼이 노를 저어 사지의 바다로 뛰어들며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냅니다. 나를 버리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적 같은 구원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출처: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자)
우리를 괴롭히는 두려움은 철저히 자아의 생존 본능에서 옵니다. 내가 손해 볼까 봐, 내가 무시당할까 봐, 내가 아플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자아를 우상으로 모시고 사는 인간은 하루 24시간을 방어막을 치느라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살기 위해 도망 다니는 비겁한 삶은 자아를 한없이 비대하게 만들고, 커진 자아만큼 잃을 것이 많아지기에 불안과 초조,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이 위대한 원리를 자기 삶의 궤적으로 뼈저리게 증명하신 분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24위 순교 복자들입니다. 그중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의 삶을 들여다보십시오.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은 본래 궁중의 약을 짓는 내의원 소속의 엘리트 약제사였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심을 다했지만,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자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배교하고 맙니다. 풀려난 그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 벼슬을 유지하며 육신의 생명과 자아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보존한 그가 집에 돌아와서 행복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교우들에게 자신의 배교 시절을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고 살아남았던 그 8년의 시간은, 매일매일 내 영혼이 불타는 끔찍한 지옥이었습니다. 숨을 쉬고 밥을 먹어도 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아를 보존하려던 비겁함이 끔찍한 두려움과 죄책감의 감옥임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철저히 미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다시 교우들을 찾아가 회개하고 더욱 열렬히 복음을 전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됩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살이 찢기는 모진 고문 앞에서도 그는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처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패배자가 아니었습니다.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에 두려움이 완벽히 사라진 그의 얼굴에는 천사 같은 평화와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아의 소멸이 가져다준 압도적인 구원의 행복을 누리며 그는 장엄하게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
오늘날 우리에게는 목에 칼을 들이대며 신앙을 버리라고 협박하는 포졸도, 피 냄새 진동하는 사형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며 어떻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행복한 밀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삶의 배교와 순교는 매일 일어나는 아주 작은 '선택의 순간'에 있습니다.
부부 싸움을 크게 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미안해'라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내 알량한 자존심(자아)이 죽어야 하는 끔찍한 일입니다. 이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가 먼저 사과하면 넌 지는 거야. 끝까지 기싸움을 해서 네 권리를 찾아! 무시당하면 안 돼!'
이때 내 얄팍한 자존심을 살리려고 며칠이고 입을 닫고 냉전을 벌이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판 '배교'입니다. 자존심을 지켜내서 이겼으니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마음은 터질 듯이 불안하고, 식탁에는 냉기가 흐르며, 방안은 지옥의 감옥처럼 춥고 외롭습니다. 자아의 목숨을 사랑했기에 오히려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끓어오르는 억울함을 꾹 누르고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그 순간 내 자아는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만, 그 즉시 내면을 짓누르던 모든 두려움과 불안의 얼음벽이 산산조각 나며 쏟아지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내 자존심이라는 밀알이 죽었을 때, 가정을 살리는 거대한 부활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한 번 이 죽음이 주는 평화(순교)를 맛본 사람은, 더 이상 기싸움을 통해 자아를 살리는 쩨쩨한 지옥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서늘한 일침을 날리셨습니다.
"그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아를 살려두면 두려움이 그대를 노예로 부릴 것이나,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세상 그 어떤 칼날도 건드릴 수 없는 우주적인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강해』).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7살 된 딸이 아빠에게 “아빠, 나 커서 변호사 될 거야.”라고 말하면, 아빠는 좋아할까요? 아니면 싫어할까요? 아마 우리나라의 아빠들은 대부분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아빠는 울먹이면서 딸을 붙들고 제발 변호사가 되지 말라고 애걸합니다. 변호사는 다 거짓말쟁이라면서, 진실을 알면서도 때로는 모르는 척해야 하고, 나쁜 사람 편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이유가 하찮은 돈 때문이라면서 절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제 겨우 일곱 살 된 딸인데 말입니다. 결국 이 딸은 큰 인심 쓰듯이 알았다면서, 대신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 아빠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가 변호사와 축구선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길로 갔으면 싶습니까? 아마 많은 이가 힘든 운동선수보다는 변호사가 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의 아빠는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길로 나아가길 바랐던 것입니다. 사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면 행복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하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세의 안위와 타협하여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지 모르나 영혼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육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어디에 더 큰 의미를 두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뜻에 커다란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을 맞이합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사실 관가에 끌려가서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천주를 버린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천주를 버리고 얻는 세상이 얼마나 헛된지를 깨달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는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당하기 직전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예수님과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의 목숨은 잃었지만, 참된 목숨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속주의, 이기주의, 물신주의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된다면, 주님을 모른척하며 살게 됩니다. 당연히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기쁨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가치를 두면서,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일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자유다(찰리 맥커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순교의 본질은 죽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 있습니다. 진실하게 살아낸 삶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열매를 맺습니다. 참된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 전체로 증언될 때 완성됩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양심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밀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죽는 밀알이 생명을 살리는 씨앗이 됩니다. 자신을 내어줄 때 새로운 생명이 피어납니다.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살리는 길은 우리 또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은 진실한 사랑을 남기는 삶입니다.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 사랑과 봉헌의 삶이 필요합니다. 겸손한 밀알의 삶은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순교자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순교는 하느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삶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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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