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임종을 앞둔 친구가 기도를 부탁했어요. 기도할 내용을 길게 적어 보냈더라고요. 언니의 회복을 바라는 그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주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우니까요.
저도 기도하면서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응답해 주시길 바라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제 생각 안에 가둬두게 됩니다.

2026년 6월 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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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2티모 3,10-17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10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처신, 목표와 믿음, 끈기와 사랑과 인내를 따랐으며,
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던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12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협잡꾼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점점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14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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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2,35-37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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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5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보니파시오 소개 00:06
✚ 교황님 6월 기도지향 01:07
✚ 미사 시작 01:25
✚ 강론 시작 08:4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무너져야 들리는 목소리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전은 딱딱한 돌과 제도의 공간이지만, 아울러 군중의 숨결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출렁이는 광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으시면서도, 그것을 해체하시고자 물으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종교적 표지가 아니라, 다윗의 약속에(2사무 7장 참조) 뿌리를 둔 정치적 종말론적 희망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유다 전통은 그가 왕조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 110(109)편 1절을 인용하시며 물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님”(마르 12,36)이라 부른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상식을 바탕으로 다시 묻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넘어, 다윗보다 위에 놓여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새로이 보게 하며, 유다 전통에만 머물러 메시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무뎌진 믿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도 물음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예수님의 이미지 또한 너무 작지는 않은지요.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상식 안에서 그저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채워 주시는 존재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성전의 돌기둥 사이에서, 한 칭호가 무너지고 더 큰 이름이 열리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또한 날마다 낡고 굳어진 것을 비워 내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고백은 우리의 좁고 편협한 언어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두를 사랑하자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율법 학자들이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미국에 가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좋은 점이 참으로 많은 우수한 민족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이고 극복해야 하지만 유대인들도 문제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선민의식,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저는 미국 생활 후에도 수차 이스라엘을 방문하며 이런 경험이 너무도 많았고, 며칠 전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구호선을 공격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그들의 비인도적인 행위들은 정말 하느님께서 뽑으신 민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읽고 여러분은 근자에 일어난 일을 두고 제가 지금 강론하는 것으로 아셨을 텐데 이 강론은 제가 2010년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어쩌면 지금도 이렇게 똑같은지요?
그들에게는 못된 선민의식만 있지 그들은 전혀 선민답지 않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선민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사람과 민족이 선민이고,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와 디모테오가 선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잘 아시다시피 바오로 사도는 인종주의자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오로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같았지만 예수님께 뽑힌 다음에는 참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그 사랑 가르침을 잘 따른 사람이고, 디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잘 따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가르침을 대대로 잘 따라야 하는데 얼마 전 아주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회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전 세계 개신교인들이 모인 행사에 한국을 대표한다는 한 개신교 신자가 가자 지구 구호를 위해 가다가 피납된 활동가 때문에 우리 정부가 강하게 비판한 것을 놓고 대신 잘못했다고 사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바오로 사도를 따르는 것입니까?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정신이지 팔레스타인을 말살하고 가자 지구에서 몰아내려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교 정신이 아니고 제정신도 아니지요.
인종주의는 어떤 이유로도 안 됩니다. 혐오주의도 어떤 이유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 세계 모두에게 선포되어야 하고, 전 세계 어디서나 실천되어야 할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이 복음을 실천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박해와 고난을 겪었는지 상기시키며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모두를 사랑하자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은 왜 자신을 ‘다윗의 주님’이라 부르셨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깨우쳐주십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율법학자들과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로 이해해 왔습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을 갖추고, 종교,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었고,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다윗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민족 자긍심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로마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시의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2사무 7,12;이사 9,2-7;11,1;12,23;15,22 등)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곧 그들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새로운 다윗왕조의 지상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을 부수어버립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곧 당신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로 밝히십니다.
이는 <시편 110,1>을 인용하여, 예수님 당신의 ‘메시아적 신성’을 계시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혈육으로는 ‘다윗 가문’에 태어났지만, 신성으로는 창조 이전부터 계신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갈라 4,4) 놓이셨고,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로마 1,3).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면서 마리아의 “주님”이시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면서도 마리아의 창조주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되 위엄으로는 마리아의 “주님”이시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되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세상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말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7)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의 말씀을 “기쁘게” 듣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희의 주님이오니, 당신의 말씀이 저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희의 기쁨이오니, 저희가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코복음 12장 37절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주님! 다윗을 만드셨듯이, 저를 만드소서.
다윗을 통로로 삼아 오셨듯이, 저를 통로로 삼으소서.
다윗에게서와 같이,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다윗의 주님이시듯,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나에겐 왜 하.사.시.가 기쁜 소식이었을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37)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9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아주 신비로운 대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스스로 성령의 바탕에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5-37 참조).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성서 해석이 끝나자, 성경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군중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기뻤을까요? 예수님이 성경 퀴즈 대회에서 율법 학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었기 때문에 그저 통쾌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군중이 환호하며 기뻐했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그 한마디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들의 '자존감'을 단숨에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던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다"라는 교리는 철저히 혈통과 행위, 그리고 세상적 권력을 중심에 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잣대 안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군중은 영원히 구원의 변두리에 머무는 쓸모없는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백성들에게 613가지나 되는 복잡한 규정을 들이밀며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끊임없이 '행위'만을 강요했습니다. 이처럼 행위의 굴레에 얽매인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기쁨도 주지 못하는 무거운 감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는 단순한 다윗의 핏줄이 아니라, 다윗조차 우러러보는 창조주 하느님 본인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끌어올리러 오셨다는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먼저 "너 왜 그것도 못 하니?"라고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먼저 "너는 하느님께서 친히 목숨을 걸고 찾아오실 만큼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줍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가진 자존감만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먼저 주지 않고 행위부터 요구하면, 복음은 짐이 되고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얽매임이 됩니다.
오늘 군중이 느꼈던 이 '복음의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강렬한 체험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원래 활자 매체, 즉 책을 읽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유튜브 쇼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저는 빠르고 자극적인 쾌감을 즐기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무려 10권짜리나 되는 방대한 책을 장장 5년에 걸쳐 끝까지, 그것도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차게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비가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원제: 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읽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제가 왜 이 방대한 책에 푹 빠져들었을까요?
그 책 속에서 저는, 제가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무섭고 명령만 하시는 심판관' 예수님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님은 너무나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심장을 다 쏟아내시는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제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그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제게는 숨이 멎을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그 따뜻한 예수님과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 다니는 제자들이 미치도록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저분과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 저분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싶다." 이 간절한 갈망과 기쁨이, 세속의 쾌락을 좇던 저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결국 사제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기뻐야 합니다. 나를 심판하는 규칙서가 아니라,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분의 정체성을 깨달아 그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물고 싶게 만드는 거룩한 자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미사에 빠지면 대죄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 "봉사를 해야 축복받는다"라는 행동 강령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전하여 신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보다는, 율법의 채찍으로 영혼을 닦달하며 "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지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성모님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마주할 때,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압도적인 경외감과 마주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 성소에 대해 깊이 갈등하며 고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송탄성당에 홀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세워진 성모님 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성모님 상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처럼 변하더니, 온몸에서 푸르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압도적이고 거룩한 빛 앞에서, 저는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밀려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성모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성모님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분들의 진짜 위대하고 거룩한 정체성을 티끌만큼도 모르고 있었구나.'
복음이 우리에게 하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히 알던 주님과 성모님의 정체성을 거룩한 빛으로 뚜렷하게 보여주어, 우리 존재가 그분들 발치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우리의 낡은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진행했던 '요한복음 8주 강좌'를 들으신 어느 형제자매님의 후기 글은, 이 '머무름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어떻게 부활시키는지 완벽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오랜 냉담과 방황의 고독 속에서 고아처럼 헤매던 나를 따뜻한 말씀의 빛으로 이끌어 주신 신학적 통찰과 다정한 강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강좌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지식도, 신앙의 무지를 단숨에 깨부순 것도 아니라, '그 문이 어디 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분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조금씩 살아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8주의 여정 동안 말씀의 표징들을 따르는 사이, 나는 언제부턴가 다시 걷고 있었다. 거창한 결심이나 극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강의를 열고 말씀을 듣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 걸음이 어느새 내가 광야를 벗어나 그분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아주 정확하게 복음의 핵심을 꿰뚫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대단한 업적이나 거창한 결심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분처럼 그저 주님의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성체 조배를 하며 뜨거운 눈물로 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다 내어주시니, 이제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까요?"
그때 제 영혼 깊은 곳에서 아주 부드럽고도 단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네가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살과 피,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니, 너는 그저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
이 얼마나 벅차오르는 사랑의 선언입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드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머무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찰싹 달라붙어 머무르기만 하면 됩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헉헉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있으면, 나무의 수액인 성령께서 가지인 우리에게 흘러들어와 저절로 기쁨과 사랑의 열매를 밀어내 주십니다.
세상의 거짓된 율법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네 힘으로 짐을 지고 가라"며 윽박지르지만, 우리를 진짜 사랑하시는 분은 "짐은 내가 질 테니 너는 내 품에 안겨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복음 선포는, 주님이 나무이심을 알게 하고 우리가 가지임을 깨달아 그분께 기쁘게 붙어있게 만드는 생명의 초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가장 벅찬 기쁨을 누리는 복된 가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아기를 보면 어른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도리도리 까꿍’이라고 말합니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활짝 웃으며 그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리도리 까꿍’이 무슨 뜻일까요? 별 뜻 없는 단순한 의성어, 의태어일까요? 찾아보니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 육아법인 ‘단동십훈’에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잘 알려진 것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도리도리는 길 도(道)와 다스릴 치(治)를 쓰고, 까꿍은 ‘각궁’에서 나왔는데 깨달을 각(覺)과 몸 궁(躬)을 씁니다. 즉, 천지 만물이 하늘의 도리로 생겼으니, 너도 하늘의 도리에 따라 생겼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또 손바닥에 손가락을 찍으며 ‘곤지곤지’합니다. 하늘 건(乾)과 땅 곤(坤)을 쓰는데,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달으면 천지간 무궁무진한 조화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죔죔’하지요. 이는 ‘지암지암(持闇持闇)’에서 나왔는데, 쥘 줄 알았으면 놓을 줄도 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 세우는 ‘섬마섬마(西摩西摩)’는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굳건히 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기가 위험한 데로 가려거나 손을 대려고 하면 ‘어비어비’하면서 못 가게 하지요. 이는 한자 ‘업비업비(業非業非)’에서 왔는데, 일함에 도리와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랍니다.
의성어, 의태어가 아닌 이렇게 깊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뜻을 알고서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안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적, 민족적 영웅으로서의 메시아일 뿐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다윗이 장차 올 메시아를 ‘나의 주님’이라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다윗의 인간적인 혈통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조차도 경배해야 할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신적인 권위를 지닌 주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자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혹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조력자 정도로 한정 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진정한 나의 주님이십니다. 제대로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바르게 살아간다면 우리 시대는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 자신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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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