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상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 자리에서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아요. 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 안으로 먼저 자리를 옮기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아직 제 자리가 더 편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곁에 함께 앉아 있는 방법부터 새롭게 배우고 싶어요. 그렇게 제 자리를 조금씩 옮겨 가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2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2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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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2열왕 19,9ㄴ-11.14-21.31-35ㄱ.36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과 다윗 때문이다.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9 히즈키야에게 사신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네가 믿는 너의 하느님이, ′예루살렘은 아시리아 임금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면서, 너를 속이는 일이 없게 하여라.
11 자, 아시리아 임금들이 다른 모든 나라를 전멸시키면서 어떻게 하였는지 너는 듣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14 히즈키야는 사신들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런 다음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15 그리고 히즈키야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16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조롱하려고 산헤립이 보낸 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주님, 사실 아시리아 임금들은 민족들과 그 영토를 황폐하게 하고,
18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작품으로서 나무와 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것들을 없애 버릴 수 있었습니다.
19 그러나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당신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 때문에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
21 주님께서 그를 두고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경멸한다, 너를 멸시한다. 딸 예루살렘이 네 뒤에서 머리를 흔든다.
31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생존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32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시리아 임금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으로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 축대를 쌓지도 못하리라.
33 자기가 왔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이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34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35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36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7,6.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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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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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3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제1독서 02:50
✚ 복음 09:03
✚ 강론 10:2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그 사람의 자리에서 바라보기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전체를 거꾸로 비추는 거울의 구실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짧은 접속사는 앞서 말한 모든 요구, 분노와 보복의 중단, 원수 사랑 등을 하나의 문장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 문장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7,12)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그 정신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이미 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가르침을 다른 이들을 향한 무한한 관계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황금률은 인류의 여러 전통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윤리적 경구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 사이의 단순한 계산을 넘어섭니다. 이 말은 ‘다른 이의 자리에 서 보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방식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이지요.
사실 서로를 향한 윤리는 언제나 관점의 문제를 불러옵니다. 황금률은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자리를 떠나, 다른 이의 상처가 보이는 자리로 옮겨 가 보라고 재촉합니다. 그 이동이야말로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핵심이자 실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황금률이 말하는 바는 다른 이를 나와 같다고 단순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름을 인정하며, 그 다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이 규범은 자기 수양의 기술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 때로는 행복과 기쁨 앞에 멈추어 서서 그의 삶에 머물러 보는 열린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인간적 격언이라기보다, 다른 이를 통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초월의 자리입니다. 그 초월의 끝에는 하느님께서 꼭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바라는 것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남이 내게 바라는 대로 해 주라는 주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바라는 것은 뭔지 그것도 성찰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찰해 보니 제가 바라는 것이 분명 있을 텐데 뭘 바라며 사는지 언제부터인지 성찰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반성이 먼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성찰해 보니 이것저것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뒤집으며 ‘바라는 것 오직 하나!’가 아니었음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좋은 평가 곧 칭찬도 받고 싶고, 위로와 격려와 지지도 받고 싶고, 사랑과 용서도 받고 싶고 좋다는 것은 다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남이 해주기를 바라면 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남이 다 해주면 이 세상에서 행복은 하겠지만 그것에 만족하고 안주하여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을 바라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면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이라는 시편 노래를 부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 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선이신 하느님 대신에 온갖 좋은 것을 다 바라는 저는 당연히 그 반대되는 싫은 것들과 십자가가 제게는 없기를 바라며 살겠지요. 그러니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따르라는, 자기마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 주님을 제가 따르겠습니까?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겠습니까?
그러니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는데 주옥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주셔도 그걸 뭉개버리는 제가 실은 개와 돼지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옥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아무리 하셔도 저는 그것을 다 뭉개버리고 좋은 것만 제게 있기를 바라고 계속해서 저 좋을 대로 살려고 하다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라는 주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샛길로 빠져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성찰하는 것으로 끝냈는데 실로 제가 옳은 것을 바라야 남에게도 그대로 해줄 수 있으니 오늘 주님 말씀 묵상을 제가 이 정도로 갈음해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도,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2.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 맺는 나무, 3.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7장 13절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베풀면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은 세상도 익히 아는 위대한 법칙, 이른바 황금률을 담고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똑같이 베푸는데, 어떤 베풂은 사람을 살리고 어떤 베풂은 사람을 망칩니다.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성인으로 키우고,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폭군으로 키웁니다. 그 둘을 가르는 경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저는 이 한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먼저 우리의 민낯을 봅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무조건적인 허용과 타협으로 곧잘 착각합니다. "신부님, 무조건 퍼주고 다 이해해 줘야 참사랑 아닙니까. 자식이 엇나가도, 이웃이 무례해도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참아야지요." 듣기엔 거룩한 희생 같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를 때가 많습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갈등을 감당하기 싫어서 질서를 뭉개 버린 비겁함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악의 경계를 허물고 스스로 영적 호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을 말씀하시기 바로 직전에 무서운 경고를 박아 두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무턱대고 내어 주는 가짜 사랑이 어떤 파국을 부르는지 미리 일러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진주가 짓밟히는 까닭은 진주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주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두려워서 주거나 어쩔 수 없이 주는 것은, 사실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것입니다. 강요당해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요당해 내놓은 것은 상대를 결코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도리어 "내가 으르렁대면 저 사람은 내놓는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 상대의 교만과 탐욕만 키웁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토르라는 개가 이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순하게 생긴 이 개는 온 식구를 지배하며 가스라이팅을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밥을 먹으려 하면 사납게 으르렁대며 덤볐습니다. 가족은 개가 화낼까 눈치를 보며 벌벌 떨면서도 밥을 챙겨 주고 비위를 맞췄습니다. 이를 본 훈련사가 일침을 놓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저 개에게 사냥감처럼 몰이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두려움의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가족은 분명 매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주었기에, 그 줌은 개를 길들이기는커녕 개를 폭군으로 키웠습니다. 두려움의 냄새를 맡은 짐승은, 받을수록 더 사납게 무는 법입니다.
같은 일이 사람 사이에서도 벌어집니다. 한 양육 프로그램에 나온 여섯 살 아이와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아이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어머니를 때리며 무법자처럼 구는데도, 어머니는 혼내지 못합니다. "우리 애가 기죽을까 봐요" 하며 달래기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머니에게는 어린 시절 제 친정어머니에게 한 번도 칭찬받지 못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결핍을 보상받으려고, 제 자식만은 무조건 오냐오냐 키우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아이를 올바로 이끌려고 준 것이 아니라, 제 옛 상처를 달래려고 주었습니다.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준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연민으로 덧칠된 줌 앞에서, 아이는 통제 불능의 돼지가 되어 어머니의 삶을 물어뜯게 되었습니다.
이 어긋난 사랑이 한 집안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구약의 엘리 사제가 똑똑히 증언합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피느하스는 주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가로채고 성소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대사제이자 아버지인 엘리는 마땅히 하느님의 율법으로 이들을 엄히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향한 눈먼 정 때문에 "얘들아, 그러지 마라"(1사무 2,24 참조) 하는 솜방망이로 그치고 맙니다. 거룩한 제물을 두 돼지에게 계속 던져 준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진노하며 물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존중하느냐?"(1사무 2,29 참조)
결국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비참히 죽고, 하느님의 궤는 빼앗기며,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율법의 선을 지우고 맹목적 정에 휘둘린 그 거짓 사랑이, 결국 온 집안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엘리는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과 부딪치기를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자식을 목숨처럼 사랑하고도, 정반대의 열매를 거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눈물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집에 돌아왔을 때, 모니카는 "그래도 내 자식이니 품어야지" 하며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단에 빠진 아들을 향해 단호히 집 문을 걸어 잠그고, 한 상에서 밥 먹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십시오. 모니카가 문을 닫은 것은 아들이 미워서도, 아들이 두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닫힌 문 뒤에서 평생을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단호함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자식이 두려워 진주를 던져 주었고, 모니카는 자식을 사랑하여 진주를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차이가 한 집안은 멸문으로, 한 아들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렇다면 호구가 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참된 줌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쁘게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저마다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지, 아까워하면서 하거나 마지못해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두려워서 주는 것도, 마지못해 주는 것도 하느님의 줌이 아닙니다. 강요당한 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쁘게, 자유로이 주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며, 그런 줌만이 받는 이를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의 냄새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탐욕을 키우지만,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마음을 녹입니다.
이것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협박당해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참조) 그분께서는 두려움 없이, 기쁘게, 당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강요당해 빼앗긴 줌이 아니라 자유로이 바친 줌이었기에, 그 줌은 온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빼앗기는 줌은 폭군을 키우고, 기뻐서 바치는 줌은 세상을 구원합니다.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두려움과 자기 연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상처를 메우려고, 혹은 미움받기 싫어서 마지못해서 주지 마십시오. 그런 줌은 사랑이 아니라 강요당한 헌납이며, 상대의 교만만 살찌울 뿐입니다. 상대를 교만하게 하는 내어줌은 가장 안 좋은 내어줌입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내어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줄 때는 기쁘게 주고, 거두어야 할 때는 사랑으로 단호히 거두십시오.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건히 서서 두려움의 냄새를 지울 때, 비로소 우리의 줌은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사람을 좁은 문으로 이끄는 보람된 사랑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청소년 자모회 어머니들이 주방에서 아이들을 위해 스파게티를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양파를 열심히 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십니다. 양파를 썰며 생긴 화학 반응으로 자극성 기체가 만들어져 눈이 매운 것입니다. 옆에 약간 떨어져 있었던 저 역시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 바로 앞에서 양파를 써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런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칼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 칼질을 해야 나중에 바라던 결과인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눈이 맵다고 양파 써는 것을 포기하고 양파를 넣지 않으면 당연히 스파게티의 맛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맛있는 스파게티를 위해, 또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면서 눈물을 쏟으면서도 양파를 썰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과 함께하는 길에 항상 기쁨과 행복이 충만할까요? 이 길에 갈등도 또 아픔과 상처도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곧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없고, 나중에 얻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눈물을 흘리며 노력해서 우리 자신 안에 거룩한 불을 지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흔히 황금률이라 하는 가장 위대한 윤리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당시 유다교의 랍비들이나 동양의 공자 등 많은 사람이 “네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소극적인 형태의 윤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적극적인 선행과 사랑의 명령으로 뒤집으십니다. 즉,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머무는 무관심을 넘어서, 자기가 위로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마태 7,13)
넓은 문, 널찍한 길은 세상의 가치관, 안락함, 그래서 다수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이기심과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은 문, 비좁은 길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셔서일까요? 아닙니다.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로는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철저한 자기 비움이 요구되는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 비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문이고 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또 불편한 이 문과 길을 선택할 용기가 있나요?
오늘의 명언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다보면 어느 길이든 행복하지 않은 길은 없습니다(조지.E.베일런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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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