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보다 같은 상처를 마주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못하는 마음, 문득 마음이 쓰이고, 다시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멀어지지 못할 때가 있어요. 어쩌면 이런 작은 마음이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사랑의 씨앗인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작은 마음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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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신명 30,1-5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에페 4,29―5,2

서로 용서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18,19ㄴ-22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6월 25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16
✚ 제1독서 06:21
✚ 제2독서 10:38
✚ 복음 12:58
✚ 강론 14:2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상처 속에서도 서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는 절차,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자리, 그리고 기도로 이루어지는 분별. 그러나 이 모든 규정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지요. 누군가는 이미 상처를 입었고, 누군가는 그 상처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 마음을 모아 …… 청하면”(마태 18,19).
이는 단순한 합의의 기술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저마다 분노와 억울함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함께 서 있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공동체는 자기 확신 대신 서로를 향한 두려움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누군가의 생각과 삶을 더 무너뜨리지는 않을지, 그 조심스러운 두려움을 안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청은, 먼저 서로의 아픔을 오래 바라본 뒤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용서를 서로 간의 계산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을 무너뜨리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18,22).
이 말씀은 형제에게 받은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가 되풀이되는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고단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용서는 상처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지치면서도, 다시! 분노가 식지 않았는데도, 다시! 그 ‘다시’가 용서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공동체가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상처 속에서도 서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 배움의 자리 한가운데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배우기 참 힘들지요. 배우기 싫기도 합니다. 그런 상처받은 마음 또한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분명히!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 의지
솔직히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저의 기도 의지가 점차 줄고 있습니다. 이제 남과 북은 전혀 다른 두 개의 국가라고 북한이 헌법 개정까지 하며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것 때문에 저의 기대와 희망이 꺾인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그런다고 저의 기대와 희망이 꺾이고 기도 의지마저 꺾인다면 제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간적 오기로라도 통일 의지랄까 화해와 일치 의지가 꺾으면 안 되지요.
옛날의 저는 너 때문에 내 희망이 꺾일 수 없다는 자존심과 자주 의지 때문에 통일 의지와 화해와 일치 의지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분발했지요. 그랬던 제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분명 나이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힘이 없어지자 의지도 꺾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이 없으니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고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그래서 안 되지요. 내가 못하고 우리 인간이 못하니 하느님께서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힘이 없으니 주님의 힘으로 이루어 주십사고 오히려 기도해야겠지요.
이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이고 나이 먹은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원하는가? 나는 하느님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가? 우리는 남북이 완전히 두 국가가 되고 통일이 불가능해질라도 민족의 화해와 평화만이라도 이루어지길 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힘으론 안 돼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리라 믿는다면 그리고 같이하는 기도를 주님께서 꼭 들어주신다고 믿는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같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제1독서>의 말씀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2-3)
이는 축복과 저주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에게도 달려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이처럼, 분단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을 요청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화해와 평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에페 4,29)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 등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서로가 고무하고 찬양해야 될 터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은총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 축복의 말로 신의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에페 4,30)고 하십니다.
곧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과 온갖 악의”는 성령에 대한 모독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의 몸이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셋째>로,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에페 4,32)고 하십니다.
사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 받은 것을 마땅히 이웃에게 거주 주어야 할 일입니다. 남과 북이 한 형제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넷째>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에페 5,1)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 자신을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내어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을 본받는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는 두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로,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라.”(마태 18,19 참조)고 하십니다.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일치에 대한 호소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 20)
<둘째>로,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태 18, 22)고 하십니다.
용서하는데 있어서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만, 혹은 용서를 청해야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완고하고 고집부리더라도 혹은 계속해서 똑같은 죄를 반복하더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용서하셨듯이, 바로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남북통일기원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일치’와 ‘사랑’을 위한 ‘헌신’과 ‘투신’을 실현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18장 22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우리는 통일을 원하는가, 통일의 이득을 원하는가.
찬미 예수님! 오늘도 한 날을 잘 지내셨는지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복음 묵상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상처인 6·25 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이맘때 제단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통일을 간절히 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뼈아픈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통일을 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더 정확히 묻겠습니다. 우리는 '통일' 그 자체를 원합니까, 아니면 통일이 가져다줄 '이득'을 원합니까.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전혀 다른 것을 바랍니다. 고해소에서 "신부님, 저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는데 잘 안 됩니다" 하며 눈물짓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훨씬 클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워하면서 얻는 묘한 쾌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 나는 피해자니까 동정받을 권리가 있어." 나아가 상대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내가 너를 용서해 주느냐 마느냐"의 자리에 올라서서 군림하는 즐거움마저 은근히 누립니다. 속으로는 이 미움의 드라마를 끝내고 싶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용서하게 해 주세요" 하고 청합니다. 어느 하느님께서 그 가짜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무서운 진실을 마주합니다. 사람은 결과는 원하면서도 그 결과의 본질은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화해의 '평온함'은 원하지만 화해에 드는 '자기 낮춤'은 원하지 않습니다. 용서가 가져올 '마음의 평화'는 탐나지만, 용서 그 자체, 곧 상대를 나와 같은 자리로 끌어올려 품는 일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가짜가 됩니다. 본질은 빼고 열매만 달라고 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통일 기도가 정확히 이러합니다. 입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지만, 냉정히 보면 분단을 꽤 쏠쏠하게 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덕에 방위산업이 번창하고 무기 수출이 막대한 흑자를 냅니다. 어떤 이들은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규율을 배운다며 이 체제를 은근히 긍정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선거철마다 북녘의 위협과 분단의 긴장을 끌어다 제 권력을 연장하는 데 써먹습니다. 이렇게 분단이 주는 달콤함을 속으로 계산하면서 제단에 모여 "주님, 휴전선을 무너뜨려 주소서" 한다면, 이것은 하느님을 기만하는 위선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더 아프게 짚고 싶은 것은 이 노골적인 위선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고 은밀한 문제입니다. 설령 분단으로 이득을 보지 않는 선량한 우리조차, 사실은 통일 그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이 가져올 '편안한 평화'는 원하지만, 통일 그 자체가 요구하는 '하나 됨의 대가'는 원하지 않습니다. 갈라선 형제를 다시 내 살붙이로 끌어안는 일, 그 낯섦과 부담과 손해를 감당하는 일, 내 것을 덜어 저쪽을 채우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곧 우리는 통일의 열매는 따 먹고 싶지만, 하나가 되는 그 일 자체는 치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하나 되게 하소서"가 아니라 "내 손해 없이 평화만 주소서"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됨이란 본디 무엇이며 무엇을 요구하는가. 솔로몬 임금의 명재판이 이를 환히 비춥니다(1열왕 3장 참조).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제 아들이라 우깁니다. 임금이 칼을 가져와 아기를 반으로 잘라 나누라 하자, 가짜 어미는 통쾌해하며 외칩니다. "내 것도 네 것도 안 될 터이니 반으로 가르십시오." 가짜 어미, 곧 마귀에게 속한 자는 제가 갖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생명을 찢어 갈라 버리는 쪽을 택합니다.
분열은 생명을 죽이는 사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진짜 어미는 다릅니다. 자식을 잃는 찢어지는 고통을 무릅쓰고, 아기를 살리려 제 소유권을 통째로 포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나 됨을 진정 원하는 사람은, 그 하나 됨을 위해 '제 몫을 내려놓는 고통'을 먼저 받아들입니다. 진짜 어미가 원한 것은 '내가 아기를 차지하는 결과'가 아니라 '아기가 살아 하나로 온전한 것' 그 자체였습니다. 통일을 원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진짜 어미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해를 청하려면, 먼저 '갈라짐은 악이며 악은 곧 고통'이라는 확신이 영혼에 새겨져야 합니다. 머리로는 죄인 줄 알면서 몸은 죄로 달려갈 때, 영과 육이 갈라진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우리는 압니다. 부부가 집에서 매일 으르렁대면서 성당에 와 "우리 자녀는 우애 깊게 하나 되게 하소서" 청하면 그 기도가 하늘에 닿겠습니까. 교우끼리 파벌을 짓고 뒤에서 헐뜯으면서 민족의 일치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성령께서는 일치의 영이시며, 사랑은 둘을 하나로 묶는 신성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든 공동체든 민족이든, 갈라져 있다는 것은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빠져나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 됨이 이토록 절대적인 선일까요. 뇌과학이 말하는 '분리뇌 증후군'이 그 까닭을 섬뜩하게 보여 줍니다. 극심한 뇌전증을 치료하려 좌뇌와 우뇌를 잇는 신경 다리, 곧 뇌량을 끊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뇌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둘로 갈라지자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오른손이 셔츠 단추를 채우면 왼손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 단추를 풀어 버립니다. 아내를 안으려 오른팔을 뻗는데 왼팔이 아내를 밀쳐 냅니다. 한 몸 안에서 끝없는 내전이 벌어지는 지옥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우리 민족도 그러합니다.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갈라진 생명은 스스로를 공격하며 파멸로 치닫습니다.
성경은 이 하나 됨이 곧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수난을 앞두신 그 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참조)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하나 됨을 위해 단지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갈라진 하늘과 땅을 다시 잇고자 당신 몸을 십자가 위에서 찢기게 내어 주셨습니다. 참된 하나 됨은 언제나 누군가의 자기 내어 줌을 대가로 이루어집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통일을 '구호로 외치는 법'이 아니라 '몸으로 치르는 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통일은 철책선이 무너지는 정치적 사건이기 이전에, 우리 마음이 하나로 포개어지는 영적 사건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기도를 정직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내 손해 없는 평화를 주소서"가 아니라 "하나 되기 위해 제 몫을 내려놓을 용기를 주소서"라고 청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척하며 우월감을 즐기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내 가족, 내 이웃, 우리 교우와 끊어진 뇌량을 사랑과 용서로 다시 꿰매지 못한다면, 남북통일은 영영 오지 않을 헛된 구호일 뿐입니다.
우리가 통일의 '이득'이 아니라 하나 됨 '그 자체'를 원하여, 그 하나 됨에 드는 고통까지 끌어안고 피눈물로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이 한반도에 드리운 미움의 장벽을 허무시고 참된 화해와 일치의 기적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전자 제품을 하나 인터넷에서 샀습니다. 택배 상자를 뜯어 이 제품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전원을 켰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불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저것 살펴보았지만 작동되지 않는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해서 제품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전기선이 있었습니다. 무선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사실 유선으로 전원을 연결해야 했던 것입니다. 콘센트에 이 전기선을 꽂아야 했습니다. 전기선을 연결하고 전원을 켜자, 정상적으로 작동했습니다.
이 전기선을 생각하니, 기도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라는 전기선을 모든 힘의 근원인 하느님이라는 콘센트에 꽂아야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전기선을 하느님이라는 콘센트에 꽂지 않고 왜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냐고 불평불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커다란 착각입니다.
‘기도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보다, ‘기도로 뭘 못 하겠는가?’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25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지 벌써 7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모은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평화를 구하는 우리의 작지만 진실한 기도가 모일 때,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적대감을 내려놓아야 한다면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다교 랍비들은 통상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기에, 베드로가 일곱 번이라는 용서 숫자를 제시했지만, 예수님은 일흔일곱이라는 말씀으로 인간의 계산법을 완전히 무너뜨리십니다. 한계 없는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남긴 깊은 상처와 오랜 세월 쌓인 불신을 단숨에 씻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앙갚음을 앙갚음으로 갚는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는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사랑을 완성하셨듯이, 우리도 기도와 용서로 하느님과 함께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로 뭘 못 하겠는가?’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라는 전기선으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만드신 하느님과 연결할 때, 하느님 뜻이 우리 나라에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스스로가 맡을 것이니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밀란 쿤데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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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