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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6.2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6. 24.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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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불러 주시는 이름에 귀 기울이고 싶어요. 무엇을 이루려 애쓰거나 무엇을 얻으려 매달리기보다, 그저 사랑하게 하시고 제게 맡겨진 오늘을 살아가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6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이사 49,1-6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독서

사도 13,22-26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루카 1,57-66.80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6월 24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21

✚ 제1독서 08:00

✚ 제2독서 13:01

✚ 복음 15:31

✚ 강론 17:3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하느님은 조용히 일하신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마을의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지만, 그 중심에는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어긋나는 긴장이 흐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말씀이 결국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것도 인간의 저항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이 긴장의 바탕이지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을 가진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으라는 사회적 압력은 하느님을 향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순종 앞에서 힘을 잃고 맙니다. 즈카르야가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그는 다시 말을 하게 되고, 그가 처음으로 하는 말은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 됩니다.

즈카르야의 해방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 인간의 망설임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거침없이 펼쳐지리라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즈카르야의 이웃들은 두려움, 곧 거룩한 경외심에 사로잡힙니다. 사람들은 이를 마음에 간직하며 묻지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오늘 복음은 다음 말을 덧붙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1,66).

여기서 우리는 루카 복음서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역사 안에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이 오랫동안 간직한 전통 의식과 이름 하나를 통하여 구원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통과 관습을 넘어서는 구원과 은총이 그렇게 인간 공동체 한가운데에 새겨집니다.

현실 논리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과학이나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식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섭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즈카르야의 이웃들처럼 우리도 묻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펼쳐질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물음으로써 하느님을 잊지 않고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나는 그분이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위인과 성인이 있습니다. 위인전이 있고 성인전이 있습니다. 제가 성소계발의 책임을 겸직할 때 성소자들이 오면 제가 두 가지를 꼭 물었습니다. 좌우명은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이냐? 닮고 싶은 위인이 누구였고 지금은 누구냐? 아무런 좌우명도 없고 닮고 싶은 위인도 없으면 그것으로 성소가 없다고 판단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목표 없이 되는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뜻이며 지금까지 닮고 싶은 위인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닮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되는대로 살아왔고 닮고 싶은 분도 없었지만 이제 깨달아 예수님과 프란치스코를 닮는 삶을 살고자 마음먹고 저희 수도원을 찾아온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본받고 싶은 위인이 없이 살아왔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본받고 싶은 성인이 생기고 그분을 닮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아주, 아주 정말 특별한 사람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위인과 성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일까? 위인과 성인의 차이는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위인은 그 인물 자신이 큰 존재입니다. 큰 뜻을 품고 있고,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큰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에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있으며 그들 가운데서 뛰어난 존재일 뿐입니다.

이에 비해 성인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늘 하느님 앞에 있으며 그 자신이 큰 인물이 아니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듯 자기는 주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인들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자기에게 몰려와도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자신은 늘 하느님 앞에 머물며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를 훌륭하다고 추켜세워도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작은 자로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인들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많은 사람 가운데 있지만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이런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하신 분입니다.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오.”라고 세례자 요한은 분명하게 얘기하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고 하며 주님을 가리키고,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내어드립니다.

저는 위인도 못 되지만 성인은 더더욱 못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인은 못 되도 좋지만 성인은 되어야 할 존재지요. 이것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르야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복음 1장 66절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 정녕 당신께서는 당신 손길로 저를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아오셨고 알아보지 못하여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응답하지 않아도 돌보아주셨고 배척할 때도 떠나지 않고 늘 품고서 기다리셨습니다.

고통과 상처를 눈물로 씻어주시고 좌절과 실망에 빠졌을 때는 바닥이 되어 떠받치셨습니다.

침묵으로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제 심장에 들어와 당신 손길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가 당신의 손길이 되어 맡겨진 이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당신의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입니까?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즈카르야 주니어라는 집안의 든든한 전통을 단호하게 깨부수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짓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요, 그가 누구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며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증명하는 거룩한 낙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읊조리지만, 실제로는 누구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갑니까? 내 자식의 이름이 명문대 합격자 명단에 오르기를, 내 이름이 세상의 성공한 자들의 명부에 오르기를 미친 듯이 갈망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드높이기는커녕, 하느님을 내 이름과 내 집안의 대를 빛내주는 소원 수리 자판기로 철저히 조작해 버립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내 발아래 짓밟고, 내 이름을 우상으로 세우는 끔찍한 영적 교만입니다.

하느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 이름을 드높이려 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은 구약 성경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에 명백히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교만에 빠져 "자, 성읍과 탑을 세워 우리 이름을 날리자." 하며 탑을 쌓았습니다. 내 탐욕으로 내 이름을 높이려 한 결과는 처참한 혼돈과 파멸뿐이었습니다. 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순명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내가 너의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진정한 영광과 이름은 내가 편법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할 때 하느님께서 친히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고 신해철 씨의 노래 중에 어릴 적 키우던 병아리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그 500원짜리 노란 병아리에게 얄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그 작은 미물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내 슬픔을 나누고 내 곁을 지키는 나와 동등한 친구로 격상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세례명을 주시며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도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너는 한낱 썩어 없어질 흙먼지가 아니라,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맞바꿀 만큼 나와 동등하게 귀하고 소중한 존재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만약 오늘 복음의 아기가 사람들의 뜻대로 즈카르야 주니어라는 이름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훌륭한 인간 사제는 되었겠지만, 평생 인간 아버지 즈카르야의 명예를 지키며 살다가 결국 즈카르야라는 인간의 수준과 한계 안에 갇혀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평생 하느님의 이름을 들어 높였을 때, 그는 단순한 인간의 대를 잇는 자가 아니라 구세주의 길을 닦는 가장 위대한 하느님의 예언자로 성장했습니다.

생물학에 코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코이 잉어는 작은 어항에 기르면 5센티미터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에 넣으면 25센티미터까지 자라고,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무려 120센티미터의 거대한 물고기로 성장합니다. 사람의 영혼도 똑같습니다. 인간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려 하면 딱 그 인간의 수준만큼인 작은 어항 크기로 자라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려 하면 하느님의 거대한 강물처럼 신적인 차원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영광을 돌리는 그 대상의 크기만큼 자라나는 법입니다.

이름을 잃어버리고 세속의 어항에 갇히는 과정은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에도 기가 막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마녀 유바바는 온천장에 끌려온 소녀 치히로의 진짜 이름을 빼앗고 센이라는 가짜 이름을 줍니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세속의 욕망에 휘둘리는 노예가 된다는 뜻입니다. 소녀가 끝까지 자기를 잃지 않고 마침내 부모를 구해낼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자기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증명하는 진짜 이름을 끝까지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방송에서 성인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대신 "김경희 님, 엄마로 사느라 힘들지 않으셨나요?" 하고 어머니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는 실험을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펑펑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도구'로만 여기다가, 비로소 부모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며 인격적인 성인으로 성장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 (1993)에서 아들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이름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세상과 싸우며 참된 자유인으로 훌쩍 성장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거룩한 율법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를 뼛속까지 살아내어 코이 잉어처럼 거대하게 성장한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아사 감방에서 사람들은 절망하며 신의 이름을 저주했습니다. 하지만 콜베 신부님은 그 생지옥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갇힌 자들과 함께 성가를 부르며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했습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내 목숨, 내 이름 좀 살려주세요"라며 즈카르야 주니어의 수준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낸 것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죄수 번호 16670번이었던 그를, 하느님과 같은 사랑의 반열에 오른 위대한 성인으로 가장 높이 들어 올려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내 이름 한 줄 남겨보겠다고 인간의 좁은 어항 속에서 아등바등 살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내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영적 교만을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내게 생명과 이름을 내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빛나도록, 내 삶을 온전히 그분의 강물로 던지십시오. 우리가 나의 비루한 이름을 지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온 삶으로 들어 높일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완벽하게 키워내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소금 장수와 솜 장수가 등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강이 깊어지면서 등에 짊어진 짐이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이 등에 짐을 지고 있지만, 한 사람은 무사히 강을 건넜고 다른 사람은 그만 강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누가 살아남았을까요? 소금 장수일까요? 솜 장수일까요?

소금이 물에 녹으니 당연히 소금 장수가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솜 장수였습니다. 솜 장수는 짐이 점점 무거워지자 감당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강물에 짐을 던져버렸지만, 소금 장수는 짐이 점점 가벼워지니까 소금이 물에 녹는 것이 안타까워 어떻게든 간수하려고 허둥대다가 힘이 빠져서 강에 떠내려가고 만 것입니다.

버려야 될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미련을 가지면 그만큼 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히’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집착에 빠져서 더 안 좋은 상황을 만들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것보다 세상 것을 놓지 못합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까요?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 것을 쫓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요한 세례자와 그의 부모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명명식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첫아들에게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줬습니다. 친척들이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던 것은 가문의 전통과 과거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인간적인 계획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단호히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장합니다. 요한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부모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라야 하기에 인간의 혈통이나 관습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처음에 천사가 전한 아기 잉태 소식을 믿지 못해 열 달 동안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이 긴 침묵은 단순한 징벌이 아니라, 인간적인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신비 순명하는 법을 배우는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석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고,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성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요한 세례자는 사제의 아들로서 성전에서 편안하고 보장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락한 삶을 떠나 광야로 향합니다.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것. 무엇을 쫓아야 할까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참된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것을 쫓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평생 갇힐 인생의 사슬을 스스로 만든다(찰스 디킨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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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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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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