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되곤 해요.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보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26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26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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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2열왕 25,1-12

유다 백성은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갔다.
1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치드키야 통치 제구년 열째 달 초열흘날에,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곳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공격 축대를 쌓았다.
2 이렇게 도성은 치드키야 임금 제십일년까지 포위당하였다.
3 그달 초아흐렛날, 도성에 기근이 심해지고 나라 백성에게 양식이 떨어졌다.
4 드디어 성벽이 뚫렸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칼데아인들이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임금의 정원 곁에 있는 두 성벽 사이 대문을 통하여 아라바 쪽으로 갔다.
5 칼데아인들의 군대가 임금을 뒤쫓아 예리코의 들판에서 그를 따라잡자, 그의 모든 군대는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6 그들이 임금을 사로잡은 다음,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 임금에게 데리고 올라가니, 바빌론 임금이 그에게 판결을 내렸다.
7 그는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8 다섯째 달 초이렛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제십구년에 바빌론 임금의 신하인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9 그는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태웠다. 이렇게 그는 큰 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10 또한 친위대장이 이끄는 칼데아인들의 모든 군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가며 허물었다.
11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은 또 도성에 남아 있던 나머지 백성과 바빌론 임금에게 넘어간 자들, 그리고 그 밖의 남은 무리를 끌고 갔다.
12 그러나 친위대장은 그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8,1-4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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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6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제1독서 03:12
✚ 복음 07:46
✚ 강론 09:0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그 손길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 뒤에 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따르지만, 예수님의 눈길은 한 나병 환자에게 향합니다. 고대의 ‘나병’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질병의 수준에서 이해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14장이 서술하듯 나병 환자는 격리되고 소외되는 것을 참아야 하였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고 고립되어야 하였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절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 고백은 그저 치유를 바라는 요청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다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불리고 싶다는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그 접촉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었지요(레위 5,3 참조). 사회가 부정하다 여긴 그곳에 예수님께서는 과감히 함께하셨고, 부정이 전염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에게서 깨끗함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위험이 아니라 회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율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도록 보내십니다. 이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산상 설교의 선언을(마태 5,17 참조)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8,4)라는 당부는 묘한 긴장을 남깁니다.
많은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의 치유는 소문으로만 머물기보다는 서로를 향한 인정과 용서와 화해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저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면 됩니다. 마음을 열기보다 말만 앞세운다면 서로가 야속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주시는 모든 것을 선으로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나병환자의 이 말은 주님께 대한 그의 두 믿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주님의 능력-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선의-하고자 하시면-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치유를 받으려면 두 믿음이 필요한데 전능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겐 치유의 능력을 믿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선의를 믿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인데 사실 의외로 주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탈렌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듯이 많은 사람이 조금 주고 많이 요구하시는 모진 분이요,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주님을 믿습니다. 설사 주님을 선하신 분으로 믿긴 하더라도 주님의 선하심이 내가 생각하는 선과 다르기에 주님의 선하심을 전폭적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견해 차이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들이 지금 시험에 붙는 것이 선인데 공부 안 한 아들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선이라고 하시고, 우리는 꽃길 걷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선이라고 하시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자기가 생각하고 원하는 선을 내려놓고 무엇을 주시든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나병을 고쳐주십사고 청하지만 고쳐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다시 말해 계속 나병을 앓으며 살아도 된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고쳐주지 않으셔도 그것이 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병을 이미 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며, 적어도 꼭 벗어나야 할 악으로 그는 생각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병으로 인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나병환자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하며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는 여생이 되길 비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 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8장 3절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기도의 응답을 받은 이들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찬미 예수님! 오늘도 한 날을 잘 지내셨는지요.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의 가장 완벽한 모범을 만납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며 간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참조)
짧은 기도지만, 그 안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모든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비밀을 한 문장으로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는 사람입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도 누군가 무섭게 협박한다고 해서, 혹은 하도 졸라 댄다고 해서 무언가를 내어 주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강요당하면 주고 싶던 마음마저 싹 달아납니다. 우리가 기꺼이 무언가를 내어 주는 때는, 그렇게 주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베풀 때 우리가 행복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주는 것 자체가 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기도의 첫 번째 원칙이 나옵니다. 무언가를 청하려거든, 그것을 주려는 사람의 기분부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자기 행복을 위해 주는 법이니, 주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얻어내는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분의 기분은 헤아리지도 않고 무작정 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어리석음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부르는지, 윌리엄 제이콥스의 단편 「원숭이 손」이 섬뜩하게 보여 줍니다. 한 부부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원숭이 앞발 부적을 얻습니다. 그들은 그 앞발에게 마음이 있는지, 그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무엇을 원하는지 따위는 묻지 않습니다. 그저 죽은 물건을 문지르듯, 당장 빚 갚을 이백 파운드를 달라고 빌 뿐입니다. 소원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돈은 하나뿐인 아들이 공장 기계에 끼어 참혹하게 죽은 대가로 나온 사망 보상금이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비탄에 빠진 어머니가 두 번째 소원으로 "아들을 다시 살려 달라" 빌자, 묻혔던 아들이 짓이겨진 몸 그대로 문을 두드리며 돌아옵니다. 공포에 질린 아버지는 마지막 소원으로 황급히 그를 도로 무덤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경고가 있습니다. 이 부부의 비극은 소원을 빌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는 쪽의 마음과 기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 있는 힘을 죽은 부적처럼 대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들어주는 분이 누구이신가, 그분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묻지 않고, 제 욕망만 기계에 입력하듯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꼭 이렇지 않습니까. 살아 계신 하느님, 마음과 기쁨을 지니신 그 아버지를, 동전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자판기처럼, 문지르면 소원이 나오는 원숭이 앞발처럼 대하지는 않습니까. 주는 분의 기분은 헤아리지 않고 내 욕망만 들이미는 청은, 그 자체가 이미 저주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는 분의 기분을 좋게 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영광스러워질 때입니다. 자기가 높여지고, 그 가치가 알아봐질 때 사람은 가장 흐뭇해집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 주고 싶어지는 순간도, 자식이 그 부모를 진심으로 알아보고 자랑스러워할 때입니다.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당신께서 영광스럽게 높여질 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참되게 고백받을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얻어내는 길은 분명합니다. 청하기 전에 먼저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 기분 좋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바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 보십시오. 그는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제 욕망부터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고 먼저 고백했습니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낸 위대한 신앙고백이며,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드린 찬미였습니다. "당신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는 제 병의 절박함보다 그분의 능력과 자유를 앞세웠습니다. 자기가 받을 것에 골몰하기 전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영광스럽게 고백한 것입니다. 어느 분이 이런 고백 앞에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체없이 손을 내미시며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참조) 환자가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고 그분의 뜻을 높이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하고 그 뜻을 기꺼이 펼치신 것입니다.
이 비밀을 뼛속까지 깨달은 인물이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남북전쟁 때 북군이 극도로 몰리던 어느 날, 한 참모가 초조하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느님께서 우리 북군 편에 서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러자 링컨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기를 기도하지 않소. 하느님은 언제나 옳은 편에 계시기 때문이오. 내가 날마다 무릎 꿇고 드리는 기도는 오직 하나,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게 해 달라는 것이오." 우리는 늘 하느님을 내 편으로 끌어와 내 뜻에 굴복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내가 하느님 편으로 건너가,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찾으려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밀을 통째로 응축하여 손수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순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주님의 기도는 결코 내 소원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처음 세 청원을 온전히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높여 드리는 데 바칩니다. 곧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찬미하여 그분을 기분 좋으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내 양식과 용서와 보호를 청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곧 주님의 기도는, 나병 환자가 그러했듯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을 먼저 길게 바쳐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드리고, 그 뒤에 내 청을 살며시 얹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 습관을 따끔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며 입으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면서, 머릿속은 온통 "제발 그 시험에 합격하게, 그 병이 낫게 해 주십시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높이는 그 앞부분은 빨리 해치울 인사치레로 흘려보내고, 마음의 무게는 전부 내 소원에 실어 두지는 않습니까. 성체조배를 하러 들어가서도, 그분을 찬미하고 그 마음에 귀 기울이기보다 내 청원 목록만 일방적으로 읽어 내려가다 나오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바치는 기도는, 형식은 주님의 기도이되 속내는 원숭이 앞발을 문지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영광 받으셔야 할 살아 계신 아버지를, 기분도 헤아리지 않고 죽은 부적처럼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그 앞부분을 결코 대충 흘리지 말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한마디 한마디에 온 마음을 실으십시오. 그것이 곧 나병 환자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며, 그분을 기분 좋으시게 해 드리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기쁘시게 해 드릴 때, 예수님께서는 지체 없이 손을 내미시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응답하시고, 상상하지 못한 하늘의 축복까지 기쁘게 얹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낙관주의자가 잘살까요? 비관주의자가 잘살까요? 아마 낙관주의자가 잘 살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이 훨씬 더 편안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어떤 낙관주의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전망이 불확실해도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변화를 시도하기에 희망을 품게 되고 실제로 진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유형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불행이 있지만 자기에게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닥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확률의 법칙에서 자기들에게는 예외라고 믿는 것입니다. 기후,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자기에게는 그 피해가 도망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변화와 진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유형인 변화를 지향하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세상의 변화와 자기 변화를 위해 힘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든 다 해 주리리라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함께하려는 그래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두 번째 유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그래서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하느님의 벌을 받는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이들을 무조건 거부하고 멀리해야 부정해지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병 환자가 나타났습니다.
나병은 하느님의 징벌이자 율법적 부정함으로 여겼기에 마을 밖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이 오면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쳐서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수많은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 다가선 것입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고, 예수님께 온 희망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예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직접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깨끗한 사람이 부정한 것에 닿으면 똑같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을 때, 부정이 예수님을 전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함과 생명이 나병 환자의 부정함을 씻어버렸습니다.
굳이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누구의 따뜻한 손길도 느껴보지 못했을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주님께 희망을 두고 나아가는 사람을 절대로 주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이 나병 환자처럼 변화를 지향하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이 끝은 아니며, 실패가 치명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계속 나아갈 용기다(윈스턴 처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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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