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특별한 무언가보다 작고 평범한 사랑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작은 친절과 따뜻한 마음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알아보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 주님.
오늘도 사랑으로 저희 곁에 머물러 주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2026년 6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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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2열왕 4,8-11.14-16ㄴ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한 부유한 여자가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
9 그 여자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10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하나 꾸미고, 침상과 식탁과 의자와 등잔을 놓아 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11 어느 날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옥상 방에 들어 쉬게 되었다.
14 엘리사는 종에게 “저 부인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하고 물었다. 게하지가 “저 부인은 아들이 없는 데다가 남편은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엘리사는 “여자를 불러라.” 하고 일렀다. 종이 여자를 부르니 그 여자가 문간에 섰다.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
제2독서
로마 6,3-4.8-11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10,37-42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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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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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8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06
✚ 제1독서 08:18
✚ 제2독서 13:26
✚ 복음 16:14
✚ 강론 18:2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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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십자가 끝에 남은 물 한 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얼핏 차갑게 들리는 이 말씀 속에는 급진적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질서, 혈연과 그에 따른 기대, 보호와 인정의 체계가 더 이상 궁극적 기준이 아니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ㅍ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합당함’은 개인의 완전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순발력을 가리킵니다.
그 응답은 때로 가족의 시선과 어긋나기도 하지요. 가족의 자랑이 아닌 실망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기존의 관계와 질서는 흔들립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8).
십자가는 기존의 관계와 질서를 깨뜨리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흔드는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 가는 느낌, 안전한 자리에 남아 있으려는 본능과 복음을 향하여 걸어가라는 부르심 사이의 갈등, 예수님께서는 그 상실감과 갈등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오히려 당당히 맞서라고 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0,39).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숨이 단순히 이어지는 것만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지키려다 잃고 내려놓았다가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목숨일 테지요. 이 말씀은 지켜야 할 목숨의 가치에 대하여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일까요?
이러한 거창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오늘 복음이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시원한 물 한 잔입니다. 누군가를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맞아들이는 작은 손길을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급진적 요구를 말하면서도 작은 친절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물 한 잔의 배려 속에서도 열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서로가 서로에게 상이 되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상을 받을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가 상을 받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문득 누가 상을 받을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무엇이 상인지 먼저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상은 당연히 인간이 주는 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으로서 생명이고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인간도 상을 주긴 하지만 그것은 상금이나 명예나 칭찬과 같은 세상 것들로서 죽고 나면 두고 떠나야 할 것들이고 생명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길 원하고 받아야 할 상은 당연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요 영원한 생명이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진정 이 상을 받길 원하냐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진정 받길 원합니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원한다면 진정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상을 진정 원한다면 그다음의 문제가 또 있습니다. 그 상을 받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것들을 받아들이냐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을 받기 위해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먼저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뜻도 있지만 그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들어가신 영원한 생명에 같이 들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고통을 주님 없이 받습니까? 고통을 주님 없이 그저 꾸역꾸역 받고 억지로 받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아무런 상급이 없고, 고통이 아무런 성사(聖事)가 되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예언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사람을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십자가를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를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맺어주신 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지요. 그리고 수도원에서 같이 살게 된 형제도 관구장이 보낸 것이거나 같이 살기를 서로 원해서 같이 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같이 살게 해주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지요.
이렇게 배우자나 같이 사는 형제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개인의 성화는 물론 공동체 전체의 성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이 있었는데 형제들끼리 갈등과 다툼이 그렇게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위대한 스승이 그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 수도자들은 그 위대한 스승이 자기들에게 좋은 말씀을 남기고 가길 바랐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스승이 남긴 말은 여러분 가운데 성인이 하나 있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곳 수도자들은 누가 성인일까 찾기 시작했고 성인이 아닐까 생각하며 서로를 대하다 보니 모두 성화(聖化)되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사람을 그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죽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이 세상에서 서로가 성인과 같이 살게 되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파견된 사람의 세 가지 자세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주일입니다.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한 해의 중간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을 새겨야 할 때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에는 꺼지지 않는 그리움을 품고, 그리움의 길을 가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말입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라는 박노해 님의 시가 떠올려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받아들임’(환대)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숙소를 제공하고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를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뒤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이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파견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파견한 제자들은 당신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당신의 제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규칙 53,1)
“인사로서 오고 가는 모든 손님들에게 온갖 겸손을 드러낼 것이니, 머리를 숙이거나 온몸을 땅에 엎드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흠숭 받으시고 영접 받으시게 할 것이다.”(규칙 53,6-7)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맞아들임에 있어 각별한 주의를 세심히 기울일 것이니,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접되시기 때문이다.”(규칙 53,15)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각오와 태도’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파견설교’의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것은 ‘파견하신 분에 대한 오롯한 사랑’과 ‘십자가를 지고 따름’과 ‘목숨을 내놓는 헌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렇습니다. 파견하신 분을 향한 ‘사랑’과 ‘따름’과 ‘헌신’을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져야 할 것’이 있고, ‘바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다른 것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고’, ‘목숨을 바쳐 헌신’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파견 받은 자로서 ‘합당한 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잃으면 ‘얻는 자’가 될 것입니다.
‘비움’에는 ‘향하여 하는 사랑’이 담겨야 하고, ‘십자가를 짐’에는 ‘향하여 따르는 추종’이 담겨야 하고, ‘헌신’에는 ‘그분 때문에 바치는 지향’이 요청됩니다. 그러니 ‘떠남’도, ‘십자가를 짐’도, ‘헌신’도, 오롯이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기꺼이 자신이 훼손되고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하고, 노고와 수고를 감수하고, 상실을 감하는 일이지만, ‘더 귀한 것을 얻음’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그 무엇보다 당신을 앞세워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데 노고와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하시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저의 가난하고 비천한 헌신이 오롯이 당신께 바치는 제물과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10장 40절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곡해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하십니다. 파견된 이를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하신 분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상급의 법칙을 일러 주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고 받아들이면, 그 예언자가 받을 상을 내가 받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참 예언자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예언자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온 사람, 곧 파견하신 분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 예언자에게는 분명한 표가 있습니다. 참 예언자는 반드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파견하신 분의 뜻을 전하기에, 나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나에게 순종을 청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순종하면, 반드시 성령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를 그대로 두는 자는 예언자가 아니며, 그 말을 들어도 내 믿음이 조금도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 예언자입니다. 참 예언자의 말에 순종했을 때는 언제나 상이 옵니다. 이것이 예언자를 알아보는 법칙입니다.
바로 여기서 구약의 나아만 장군을 보아야 합니다. 시리아의 위대한 장군이던 그는 나병에 걸려 엘리사 예언자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심부름꾼을 통해 이렇게만 전합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2열왕 5,10 참조)
나아만은 격분합니다. "다마스쿠스의 강물이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낫지 않으냐"(2열왕 5,12 참조) 하며 발길을 돌리려 합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했습니까. 일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너무 쉬워서, 그 쉬운 말에 순종하면 부하들 앞에서 자기 영광이 깎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장군인 자기에게는 걸맞게 대단하고 번지르르한 치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안수만 어서 해 달라던 그분들처럼, 나아만도 자기 방식의 치유만을 고집한 것입니다. 그가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한 것 자체가, 그가 하늘의 증언을 거부하고 땅에 속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나병이라는 진노는 그에게 그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그를 살린 것은 한 부하의 말이었습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더 큰일을 하라고 하였더라도 하셨을 텐데, 그저 몸을 씻고 깨끗해지라는데 못 하실 것이 무엇입니까."(2열왕 5,13 참조) 이 부하야말로 순종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아마 어릴 적부터 알았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 하고 입을 벌려라" 할 때 입을 벌리면 밥이 들어온다는 것을. 작은 순종이 생명을 채워 준다는 것을 몸으로 익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을 시켰어도 했을 텐데 그깟 목욕이 무어 어렵냐고 권합니다. 나아만이 마침내 자존심을 꺾고 그 쉬운 말에 순종하여 요르단에 몸을 담그자,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새로 돋아 깨끗해졌습니다(2열왕 5,14 참조). 그 작은 순종이, 자기에게 명령한 그 예언자가 참으로 하느님께 파견된 분임을 인정하는 인장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순종이 표징보다 먼저임을 배웁니다. 표징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순종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요한 복음은 이를 놀랍게 표현합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참되심에 인장을 찍은 것이다"가 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감히 창조주께 "당신은 참되십니다" 하고 도장을 찍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 걸음 내디딜 때, 그 순종이 곧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참되심에 찍는 인장이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독을 채운 일꾼들만이 그 물이 포도주가 된 표징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파견된 이에게는 파견하신 분의 권능이 함께 주어집니다. 나라의 특명을 받은 전권 대사가 외국에 나가면, 본국은 그 대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지원합니다. 대사의 체면이 곧 나라의 체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신다. 그분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참조)
가장 완전하게 파견된 분, 곧 아버지의 말씀 자체가 되어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가장 완전한 예언자의 말씀마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쉬운 말을 마다했듯이, 안수만 청하던 그분들이 제 말을 마다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합니다. 그냥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죽어 가며 백억짜리 수표를 내밀며 말한다고 합시다.
"사실 내가 네 아버지다. 잃어버린 너를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이것이 너를 위해 평생 모은 전 재산이다. 은행에 가서 찾아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는 시늉이라도 해 보는 것입니다. 잠깐의 창피를 무릅쓰고 은행에 그 수표를 내밀어 보는 것입니다. 찢어 버리거나 방치하면 그것은 한낱 종잇조각이 되고,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이 참되신지 알아보려 시도라도 한다면, 은행은 분명 돈을 내어 줄 것이고, 그제야 우리는 온전히 믿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하니, 우선 믿고 한번 실천해보는 것 외에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제가 조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목회 위원들에게 한 가지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날마다 읽고 한 줄씩 단체 대화방에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위원들은 거의 다 따랐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하기 싫어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주임신부가 그것을 왜 시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실천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습니까. 그 책을 읽으며 나아간 사목위원들은 하나같이 마음이 일치하고, 순종하며, 맡은 임무를 훌륭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사목회를 한 것보다 그 책을 읽게 된 것이 더 감사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요구가 있었고, 그 요구에 순종했더니, 표징이 따라온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순종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사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께, 혹은 마음의 병으로 시달리는 분께 저는 종종 권합니다. 그 책을 읽고 날마다 성체조배를 하시라고. 그렇게 하는 분들은 표징을 봅니다. 그 힘든 병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서 안수나 해 달라고 합니다. 안수 한 번으로 빨리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제 말은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이 정한 그 방식대로만 하면 나으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왜이겠습니까. 저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견된 이가 청하는 그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황 주일이며, 교회의 권위를 묵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고스란히 달려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끝까지 공경했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어도 "내 어찌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겠느냐"(1사무 26,9 참조) 하며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그 인품을 따진 것이 아니라, 파견되어 세워진 분이라는 그 하나를 본 것입니다.
이제 예언자를 알아보는 법을 정리해 봅니다. 참 예언자는 반드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를 그대로 두는 자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반드시 상이 따라옵니다. 순종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그러니 그 인품이 훌륭하면 더 좋겠지만, 인품을 따지기 전에 그분이 파견된 분이라는 그 한 가지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나아만처럼 자존심을 꺾고, 안수만 구하던 그 손을 내려놓고, 청해진 그 작은 일에 그냥 한번 순종해 보십시오. 그 작은 순종이 어린아이의 새살처럼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재미있는 치료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거절 치료라는 것인데, 100일 동안 매일 최소한 한 번씩은 거절당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거절당할 부탁을 해서 거절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ㅡ 낯선 사람에게 10만 원만 빌려 달라고 묻기.
ㅡ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를 리필 해달라고 요청하기.
ㅡ 방송국에 가서 자기가 직접 날씨 예보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
ㅡ 도넛을 올림픽 오륜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기.
어떻습니까?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고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거절이 생각보다 덜 고통스럽고, 때로는 즐겁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거절에 크게 아파하기보다 오히려 웃어넘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거절당하기 위해 말했는데, 이를 거절하지 않고 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거절에 큰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이의 거절에 굳이 상처받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뜻밖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결국 사람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에게는 실망도 하게 되고, 아픔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에 머물면 이를 극복해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사랑 그 자체인 하느님께 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가족을 미워하거나 인륜을 저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가족의 기대와 혈연적 이기심과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타협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자기의 이익과 안전만을 움켜쥐려고 아등바등하는 삶은 결국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기 시간, 에너지, 나아가 생명까지 내어놓는 이타적인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다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은 우선순위를 주님께 아직 두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는 가장 단단하며 어려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강철, 다이아몬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벤자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촛불은 자신을 태우기에 어둠을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교황은 교회를 하나로 묶는 일치의 표징이며,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희망을 전하는 믿음의 증인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랑의 봉사자입니다.
사랑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랑의 근원이며 완성이신 하느님을 삶의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먼저 사랑할 때, 사람에 대한 사랑도 비로소 참되고 자유로워집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파스카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사랑의 진실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으면 봉사는 의무가 되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 있으면 봉사는 참된 기쁨이 됩니다. 세상을 향한 복음의 향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일치의 봉사자인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의 주일 되십시오. 교황을 위한 기도는 베드로의 후계자를 위한 기도를 넘어, 오늘도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도적 전승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하나의 믿음 안에서 믿고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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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