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 따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쌓아 온 것들과 익숙한 것들을 쉽게 놓지 못하겠어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내려놓아야 할 것이 생길까 봐 마음 한편에서는 두렵기도 하고요.
무엇을 가장 먼저 붙들고 살아가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주님보다 앞자리에 두었던 것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7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7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아모 5,14-15.21-24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14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21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22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23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2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8,28-34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말씀을 따라가보세요.

2026년 7월 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7월 기도지향 00:20
✚ 미사 시작 00:37
✚ 제1독서 03:21
✚ 복음 07:15
✚ 강론 09:0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주님보다 더 붙들고 있는 것
복음 말씀을 글로 대하다 보면 당시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낯선 지명이나 등장인물의 뜻밖의 말과 행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속도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어려움을 마주합니다.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 마귀 들린 사람 둘, 그들이 예수님과 주고받는 대화, 그리고 갑작스러운 돼지 떼의 죽음과 고을 주민들의 반응까지, 여러 가지 상황이 연이어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미궁에 빠뜨리는 물음은 과연 이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두 가지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첫 번째는 마귀 들린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본 그들은 그분의 칭호를 대담하게 부르며 외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그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자신들의 자리가 위협받는 것이 불편하고 못마땅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을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한마디에 마귀들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예수님께 그 고장을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마귀를 쫓는 놀라운 기적보다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나 봅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과 관계를 끊고자 합니다.
너무 오래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던 탓일까요. 마귀들은 돼지 떼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느새 고을 주민들의 마음에 다시 자리 잡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돼지’, 곧 세속적 가치나 소유물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과 맺은 관계를 부인하려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과 나 사이의 어긋남은?
오늘 얘기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신 얘기입니다. 오늘 얘기에서 마귀들이 주님께 상관없는데 왜 왔느냐, 괴롭히려고 왔냐고 따지고 든 것은 그래도 이해되지만, 그리고 돼지 주인들이 떠나달라고 한 것도 이해되지만,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떠나가 달라고 한 것은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닐지라도 왠지 씁쓰레합니다.
사실 주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귀 들린 사람들의 불행을 다 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을 불행에서 건져주신 주님을 떠나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돼지 주인들이 재산상 피해받은 것을 보고 동정하거나 분노하여 그런 걸까요?
어쨌거나 주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재산상 피해를 주는 분으로 여기는 겁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도 이웃이고 돼지 주인들도 이웃인데 마귀 들린 사람들이 그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받은 것보다 돼지 주인들이 재산 피해받은 것이 마을 사람들에겐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이 비 구원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자 청년의 그 안타까움이 자연스럽게 소환됩니다. 하느님을 만남이 구원이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 구원이어야 하는데 그는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하나도 잃지 않고, 지금의 건강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지금의 부모, 형제, 아내, 자식과 그대로 영원히 같이 사는 것, 이것이 그가 주님께 얻고자 했던 영원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한 것은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었고, 하느님께 받고자 한 것도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거요 욕심부리는 거였습니다.
이는 마치 엄마와 아이의 그 어긋남과 같습니다. 엄마는 건강식품을 주려는데 아이는 불량식품을 달랍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이 어긋남이, 주님과 마귀 사이의 어긋남과 같거나 적어도 주님과 마을 사람들 사이의 어긋남과 같지 않습니까?
구원을 주시려는데 그것을 괴롭힘으로 여깁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데 그건 필요 없고 재물이나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어긋난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합니다. 이렇게 계속 어긋날 거면 떠나가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나는 어떻습니까? 주님과 나 사이에 이런 어긋남이 없습니까? 주님께 계셔주십사 청합니까? 떠나가 주십사 청합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빛이신 주만이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호수의 큰 풍랑’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큰 풍랑’, ‘마귀 들려 사나워진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길로’ 다니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길’은 관계 맺는 소통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길이신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길 밖’으로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로 추방시킵니다. ‘길’을 여시고, 동시에 마귀 들린 이들도 회복시킵니다.
사실, 당시에는 마귀들과 악령들이 추방되는 사건은 ‘종말의 표징’으로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29)
그러니 마귀들의 이 외침은 ‘종말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는 항변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시면서 ‘종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시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혹 우리도 하느님께 항변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치 마귀들처럼,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간섭하지 말고 괴롭히지 말라’고,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돼지를 치던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오히려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말합니다. 그들은 당신의 권능을 보고서도 오히려 달아납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빛’을 반겨 맞아들이지만, ‘어둠’은 ‘빛’을 보고 오히려 도망칩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손실을 볼뿐, 이웃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 또한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이들’이요, 어둠에 물든 이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과 이웃과의 통교를 막는 ‘돼지 떼’가 판치게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꺼이 빛이신 그분의 말씀과 권능을 반겨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빛’을 밝혀주시고, ‘빛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 살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이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제 안에 빛을 비추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권능과 영광이 빛나소서. 제가 당신 빛 가운데 살겠나이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8장 34절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진정, 제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무엇이 돼지 대신 그리스도를 선택하게 하는가?
오늘 복음에는 참으로 씁쓸하고도 기막힌 장면이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이르시자, 무덤에서 마귀 들린 사람 둘이 튀어나와 길을 막습니다. 그 마귀들은 사납기 그지없어 아무도 그 길로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그들을 돼지 떼 속으로 몰아넣으시고, 그러자 돼지 떼가 비탈을 내리달려 호수에 빠져 몰살합니다.
자, 여러분이 그 고장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온 마을이 두려워하던 그 사나운 이웃 둘이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땅히 잔치를 벌이고 예수님을 은인으로 모셔야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온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분을 보고 나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참조)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며 혀를 찹니다. "어리석은 속물들. 사람 둘이 살아났는데, 하느님보다 돼지가 더 중했단 말인가." 그러면서 은근히 선민의식에 빠집니다. 나는 주일 미사도 꼬박꼬박 나오고 봉사도 하니, 저들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저는 바로 이 착각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합시다. 가다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내쫓은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돼지가 본래 악해서가 아닙니다. 돼지는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을 뿐, 그 자체로는 죄가 없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가족의 생명도 지킬 수 없고 이웃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 돼지가, 그 재물이 예수님을 내 삶에서 밀어내게 만드는 순간, 바로 그때 그것은 마귀 들린 것이 됩니다. 가다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곧 재물을 이미 섬기고 있었기에, 사람이 치유되는 하느님의 기적 앞에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돼지만 헤아렸던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내 것"이라며, 그 내 것이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무서운 진실이 이것입니다. 내 것이라 움켜쥔 그것에서 단 한 푼의 육적 손해도 보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을 잃습니다.
영적인 이득을 챙길 것인가, 육적인 이득을 챙길 것인가. 우리는 매 순간 이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합니다. 사탄은 결코 뿔 달린 괴물로 나타나 "네 영혼을 내놓아라" 협박하지 않습니다. 사탄의 수법은 훨씬 교묘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육적인 손해를 보게 하는 모든 것을 슬그머니 멀리하게 만듭니다.
"성당 다니면 헌금 내야 하고, 시간 뺏기고, 봉사하느라 몸 축나잖아."
이렇게 속삭여, 영적인 이득을 위해 육적인 손해를 치러야 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데리고 나옵니다. 그렇게 사탄은 사람을 조금씩 철저한 물질주의자로 만들어 갑니다. 손해 보지 않는 것을 가장 똑똑한 삶이라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탄의 가장 큰 승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님을, 성경의 첫 장이 증언합니다. 에덴에서 사탄이 하와를 어떻게 무너뜨렸습니까. 그는 "하느님을 배신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선악과를 가리키며, 저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은 너의 손해라고 속삭였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 너희가 하느님처럼 된다."(창세 3,5 참조)
곧 "저 열매라는 육적 이득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손해다" 하고 꼬드긴 것입니다. 하와는 그 손해를 거부했습니다. 눈에 좋아 보이고 탐스러운 그 육적 이득을 차마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열매 하나를 손해 보지 않으려다, 그들은 하느님을 통째로 잃었습니다. 낙원을 잃고, 생명나무를 잃었습니다. 작은 육적 손해를 거부한 그 선택이, 가장 큰 영적 파멸을 불러온 것입니다. 가다라 사람들이 돼지를 지키려다 그분을 잃은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물질주의의 덫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곧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비교할 수 없이 값지다는 것, 그 영적인 보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육적인 손해쯤은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혜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참조)
보십시오. 그는 가진 것 전부를 손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뻐하며 그렇게 했습니다. 어리석어서가 아닙니다. 그 밭에 묻힌 보물이 자기 전 재산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값지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란, 무엇이 더 값진지를 알아 기쁘게 손해 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귀한 지혜는 어디서 얻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길에서 만난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끝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먼 길을 걸으며 그분께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시는 것을 오래도록 들었습니다. 마침내 집에 이르러 그분께서 빵을 떼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또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참조)
보십시오. 그들이 마침내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그분께 성경 말씀의 해설을 들으며 마음이 데워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깊이 듣고 새기는 일, 곧 거룩한 독서가 영적인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혜를 얻는 가장 좋은 길은 좋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보는 눈을 길러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얼마 전 한 자매님이 아이가 수학을 못해 학원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책을 많이 읽히시라 말씀드렸습니다. 학원에 보내 봐야 그저 보통 사람 하나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어 참 인생의 가치를 깨달은 아이는, 훗날 수학이 필요해지면 스스로 깊이 파고듭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를 아는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아갑니다. 성당의 신앙 교육도 꼭 이와 같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들어가면 거의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중학교 때까지 책을 읽히지 않아, 그 참된 가치가 온통 현세에만 묶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치고 독서를 강조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책은 사람을 사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이 빠져 있는 쇼츠와 짧은 동영상은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보는 이의 사고를 강요하여 점점 더 현세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한쪽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는 눈을 길러 주고, 다른 한쪽은 눈에 보이는 자극에만 매이게 합니다. 그러니 아이 때부터 무조건 책을 읽혀야 합니다. 그래야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에 가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돼지 대신 그리스도를 택할 줄 아는 사람,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 자랍니다.
제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저 또한 한 권의 책으로 이 지혜를 얻었습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육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적인 행복이야말로 참 행복임을, 그것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많은 것을 손해 보아도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가 되기로 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많은 것을 포기한 손해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참된 행복을 찾았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의 그 기쁨을, 저는 압니다.
오늘 우리 앞에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돼지를 지키며 그분을 떠나보내는 가다라의 길과, 가진 것을 기쁘게 내려놓고 보물을 얻는 지혜의 길입니다. 이것은 동영상을 선택하느냐, 책을 선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적인 것이 더 값지다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 자신도, 우리 아이들도 좋은 책을 가까이하여, 그 지혜로 무엇이 참으로 값진지를 보는 눈을 기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게 손해가 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련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최고조로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던 시련이 조금씩 극복됩니다. 그리고 이보다 작은 시련이면(또는 같은 크기의 시련이면) ‘이쯤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시련을 통한 스트레스가 우리의 면역력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5년 전, 처음 갑곳성지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는 막연하게 ‘잘될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갑곳성지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보일러도 없고, 온수도 나오지 않고, 아토피까지 생겼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순례객도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위 ‘노가다’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있는 미사에는 동네 어르신 한두 분 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활이 신부 생활에 큰 면역력으로 자리 잡아서 웬만한 일로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승용차에 운전사와 조수석에 한 명씩 타고 있습니다. 아주 먼 거리로 장거리 여행을 합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힘들까요? 운전하는 사람이 더 힘들 것 같지만, 실제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수석에 앉으면 운전자와 같은 시야로 전방을 주시하게 됩니다. 다른 차가 끼어들 때, 내 차가 차선을 바꿀 때, 속도를 낼 때…. 운전자처럼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기가 차를 제어할 수는 없기에 피곤한 것입니다.
조절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는 무게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배려가 놀랍지 않습니까? 면역력을 주시고, 조절 가능성까지…. 감사의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이들을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고을 주민들의 반응은 치유되어 건강해진 것에 환희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명도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이고, 그 고을 사람들은 자기 이기심과 물질적 풍요를 지키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사실 마귀들은 예수님의 권위 앞에 쫓겨날 것을 직감하고 부정한 짐승인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들어간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이렇게 악령의 궁극적인 목적이 생명의 파괴와 죽음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악령의 목적을 따르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래서 폭력과 생명 경시가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목적을 따라야 합니다. 그 목적은 오로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원에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진실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한결같이 앞으로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정약용).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7월의 햇살이 만물을 익혀가듯,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성숙하게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무덤은 죽은 이들의 집이 아니라 희망을 잃은 이들의 이름과 집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성찰하고 반성합니다. 분별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보이지 않고, 집착이 커질수록 진실은 가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억누르던 악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무덤같은 자리까지 찾아오십니다. 고통 속에 갇힌 한 사람을 향합니다. 참된 힘은 억누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힘입니다. 진리를 향한 불편함은 성숙의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버린 곳으로 가셨고, 세상이 포기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한 상처를 당신 사랑으로 안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원의 빛이십니다. 주님 앞에서 무너져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우리를 묶고 있는 거짓과 집착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이 희망으로 아름답게 익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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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