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 마음이 놓여요. 하지만 오늘 복음을 통해 신앙은 모든 것을 이해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는 데서 자라난다는 것을 배웁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게 이끌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7월 1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7월 1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이사 10,5-7.13-16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11,25-27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말씀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7월 15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보나벤투라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15
✚ 제1독서 04:00
✚ 복음 08:24
✚ 강론 09:3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사랑 안으로 한 걸음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서 ‘암묵적 지식’을 이야기하며, 장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가 작업에서 결합해 둔 온갖 실마리와 통찰력을 되살리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인의 비밀은 그와 함께 죽는다.’는 가혹한 숙명이 드러납니다.
이제 그 작업장에는 스승의 기술을 어느 정도 이어받은 제자가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가 다시 장인의 반열에 들려면 스승이 남겨 놓은 은밀한 표준과 암묵적 지식을 처음부터 다시 익혀서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신앙을 전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앙의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는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진리는 손을 뻗기만 하면 얻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마태 11,25 참조), 그것을 삶에 녹여 내는 일은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이어받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11,27).
우리가 여전히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까닭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작업장’을 기웃거리고만 있을 뿐 그 안으로 과감하게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분의 사랑을 제대로 느껴 보지도 않은 채 너무 쉽게 포기하고,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만 해결하려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공간 속으로 직접 뛰어들 때만 발견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오늘은 그 작업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한 시간 넘게 끙끙거리다 지난 강론을 올립니다.
지혜로운 자인 소크라테스가 'Know yourself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하였다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웠지요. 그러나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는 배운 바가 없고 다만 그의 명언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서 종종 그 뜻이 무엇일까? 저 나름대로 해석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히 오늘 주님 말씀과 연결시키면서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 자신인지를 알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존재인데 오늘 주님께서 꼬집으시듯이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슬기롭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혜롭다는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는 실제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가 아니라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에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알기에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겸손할 것이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할 것입니다.
이미 많이 알고 있고 충분히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성장판이 닫히듯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 닫혀 있지만 자신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고 겸손하게 생각하며 계속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미지의 세계가 열려 있지요. 이것을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에서 지혜롭다는 자에게 하느님께서 감추시는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고 미지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와 미지의 세계를 하느님께서 감추신다는 것이 하느님 친히 신비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잠그신다는 뜻일까요?
하느님께서 지혜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신다고 하니 말마디만 놓고 보면 하느님 친히 문을 닫으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신비와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알려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기에 스스로 문을 닫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신다는 말씀은 우는 아기에게 젖 준다는 말이 있듯이 더 이상 알기를 원치 않거나 더 나아가 알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으시고 자신을 철부지처럼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알려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성 보나벤투라 축일을 지내는데 성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인은 지식을 교만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더 깊이 그리고 더 많이 깨닫기를 원한 분이셨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은총을 더 많이 내려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도 하실 수 있는 것이 있고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지혜를 원치 않고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실 수 없고, 원하는 사람에게 그 됫박만큼 주실 수 있으심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빨리 어디를 가야 하기 때문인지 강론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한 시간 넘게 끙끙거리다 지난 강론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 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녀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감사의 이유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리십니다.”
그리고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찬미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에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졌음을 찬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눈에 감추어 있더라도 드러나 있더라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을 이루시는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당신께서는 그 선하신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십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오니, 주님!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시고, 이 모든 것 안에서 저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11장 26절
아버지의 선하신 뜻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을 알려거든 순종해 보라 .
오늘 복음은 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철부지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철부지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보아서는 잘 모릅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래에서 보니 잘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의 모습이지만 그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는 철부지 같은 처지가 되면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면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쉽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려면 철부지처럼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의뢰인’(2019)은 칠곡 어린이 학대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 보는 내내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는 그나마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덜 주게 하려고 현실보다 많이 순화되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새엄마는 아빠의 묵인하에 어린 남매를 학대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도 경찰도, 복지센터도, 학교 선생님도 그냥 골치 아파질까 봐 모든 것을 묵인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사회 분위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아이들 앞에서 발각되게 됩니다.
너무 솔직해서 진급하지 못하던 한 변호사만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남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처음엔 성공만을 바랐던 그였지만 아이들은 그의 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변호사는 아이들에게까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유일하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멀리서 들리는 한 음성에 순종할 수 있어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데 이해하려면 이렇게 누구에게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사실, 이 아버지는 자신이 마약 중독자 아들의 역할을 하기를 꺼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워 그 역할을 맡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높이 있어서 자신이 보이지 않지만, 아들의 위치로 낮아지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성경에서는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도 몰랐고 그래서 아버지도 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철부지가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니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어린이처럼 진정으로 순종해 본 적이 없어서 그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철부지의 마음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서 누군가에게 순종하게 될 때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알고 싶거든 모든 사람에게 순종해 보십시오. 물론 죄가 되지 않는 한계 내에서. 그러면 그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교만하게 위에서 명령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게 됩니다. 아는 것이 사랑이기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고 싶으면 철부지처럼 순종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알고 싶거든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하는 대상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비평가나 평론가의 글이나 말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어느 책을 읽었는데 도무지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어느 평론가의 글이 작품 설명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이 글에 이런 뜻이 담겨있었다니….’라면서 다시 읽으며 그 의미를 새길 수가 있었습니다.
작가의 해설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평론가의 글은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평론을 쓸 수 있었을까요? 아마 많이 읽고, 많이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하느님의 작품을 보십시오. 과연 설명 없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너무 쉽게 판단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판단은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평론가의 노력을 떠올리며 우리 역시 주님을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계속 읽고 기도와 묵상으로 그 뜻을 계속 생각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좋으신 주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기원을 드러내는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믿고 받아들이는 데 더뎠던 세 고을의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으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게 된 이들을 따듯하게 칭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많이 배우고 영리하다고 자부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곧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라고 하십니다.
철부지는 단순히 학식이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겸손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오직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께 철저히 내맡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를 떠올리면, 주로 사회의 낮은 계층과 노예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알려진 것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그러면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아는 것이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말씀하십니다. 그 선물이 2,000년 전에만 주어진 것일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 선물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만에 빠져서는 절대로 그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철부지와 같은 겸손을 갖추고, 자기 부족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 안에서 머물러야 선물을 온전하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예술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신앙의 반대는 이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그리고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엘리 위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더 신뢰하며 찬미합니다. 선하신 뜻은 생명을 살리고, 잃은 이를 찾으며, 죄인을 구원하는 사랑의 뜻입니다. 우리의 뜻을 비울수록 우리의 뜻은 작아지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더욱 선명하게 우리 삶 안에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계획을 넘어서는 가장 좋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순간에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을 우리 뜻에 맞추려 하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겸손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삶을 온전히 맡길 때 우리의 일상은 은총의 길이 됩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지식보다 사랑을, 성공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참된 지혜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참된 믿음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는 가장 깊은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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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해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