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말씀이 무척 찔려요.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지만, 성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사소한 일에 마음이 날카로워지고 누가 옳은지부터 따지게 되니까요.
미사는 강복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삶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성당에서 만난 주님을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서 다시 알아보고, 제 생각보다 사람을 먼저 바라볼 수 있도록 사랑의 눈을 열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8월 2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여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8월 2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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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에제 37,1-14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온 이스라엘 집안인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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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비오 10세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32
✚ 제1독서 04:21
✚ 복음 10:22
✚ 강론 11:3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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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유청 안셀모 신부
미사는 성당 문 밖에서도 계속됩니다.
비 오는 날 저녁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성당 입구에서 한바탕 큰 소리가 들립니다.
“이거 제 우산인데 왜 가져가세요?”
“아니예요. 이 우산은 제 것이 맞아요.”
“제가 여기에 두었는데요?”
“거참, 제 것이 맞다니까요!”
소리는 점점 더 커집니다. 결국 한 사람이 자기는 우산에 표시해 두었다며 문제의 우산을 들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립니다. 알고 보니 그 우산 옆에 같은 우산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본당의 날 기념 우산을 가지고 와서 헷갈렸던 모양입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할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전까지 거룩한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의 모습이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슬며시 듭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라는 율법 교사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데(신명 6,5; 레위 19,18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를 하나로 연결하여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서로 밀접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준에 따라서 모든 것을 바라보며 말하고 행동한다면, 작고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크게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샘은 없어도 저장고는 있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 곧 제일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에 머리로는 이의가 있는 분이 여러분 가운데 없을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 모두 사랑하려고 무진 애를 쓰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그래서 오늘은 이에 대해서 좀 길게 나누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지었다고 얘기되는 평화의 기도에서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를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리하려고 애쓰는데 저는 오늘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사랑을 잘 받아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샘이 나에게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의 샘은 없고 사랑의 저장고는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사랑의 샘이 없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사랑이 있는 줄 알고 헛심 쓰다 지치거나 사랑하고서는 보답적인 사랑을 요구하게 되고, 사랑의 보답이 없을 때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제넘게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겸손하게 사랑 없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겸손하게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하게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웃의 작은 사랑도 감지덕지하는 것이고, 마치 쌀 한 톨도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랑을 소중히 여겨 작은 사랑도 큰 사랑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반대의 경우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애인의 작은 사랑은 큰 사랑으로 받아들이면서 엄마의 큰 사랑은 당연한 것 또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 자기가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엄마의 사랑보다 훨씬 큰 사랑이지요. 사실 사랑은 큰 사랑일수록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는 것마다 다 사랑이기 때문인데 뒤집으면 작은 사랑은 드문 사랑이 되겠지요.
어쨌거나 사랑을 잘 받는 사람은 작은 사랑도 큰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큰 사랑이든 작은 사랑이든 흘려버리지 않는 사람이며 그리하여 사랑의 샘은 없어도 저장고가 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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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애초에 ‘남’이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고,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마디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며,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 곧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며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미국 통화 화폐 달러(dollar)를 ‘불’로 표현하는 경우를 봅니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달러’와 ‘불’은 단어 자체가 다른데, 그리고 미국에서도 ‘불’이라고 쓰지 않는데 왜 ‘불’이라고 할까요? 이는 일본의 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달러를 의미하는 기호 ‘$’가 한자의 아닐 불(弗)자와 닮았다고, 일본에서는 ‘弗’으로 쓴 것입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한자음대로 ‘불’이라 읽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낭만이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일본에서 ‘Romance’를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浪漫(낭만)’으로 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한자어 낭만으로 읽었고, 이 단어가 오늘날에는 ‘꿈과 정취가 있는 분위기’라는 뜻의 한국어로 정착된 것입니다.
의심 없이 평소에 사용하던 단어에 많은 오해와 착각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말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말로서 오해와 착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문제는 그 오해와 착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맞고 상대는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이 안에서 아픔과 상처가 계속 생기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억울하다고 또 너무 힘들다고 할 때도 있지만, 이 겸손의 사랑으로만 함께할 여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다교 랍비 전통은 모세오경에서 613개의 계명을 도출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어떤 계명은 덜 중요하지 않은지, 그리고 이 방대한 법률들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곤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율법 교사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특정 계명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계명을 소홀히 여기거나 율법 전체의 권위를 훼손하는지 흠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과 전 존재를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둘째도 이와 같다.”(마태 22,39)라면서 레위기 19,18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와 같다’라는 것은 첫째 계명과 동등한 본질과 무게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를 통합하셨습니다. 계명의 세부 규칙에 얽매여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제대로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립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편협한 생각들이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와 함께할 주님과도 멀어집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그대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일하라(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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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 6가지
마음에 머무른 한 말씀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지금 이 순간을 빚어 갑니다. 오늘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의 모든 순간에 천천히 스며들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