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얼마나 많이 용서해야 하는지를 세기보다, 먼저 얼마나 많이 용서받으며 살아왔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받은 자비가 제 안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갈 수 있도록 마음을 넓혀 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2026년 9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24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여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9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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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집회 27,30―28,7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30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28,1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엄격히 헤아리시리라.
2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3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4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5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6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7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제2독서
로마 14,7-9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18,21-35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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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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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3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소개 00:20
✚ 미사 시작 01:23
✚ 제1독서 08:39
✚ 제2독서 15:04
✚ 복음 17:24
✚ 강론 20:3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왕태언 요셉 신부
용서하면 내가 지는 것 같을 때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하여 돌아보게 해 줍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도, 해 주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비굴한 것 같고, 자존심도 구겨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어떨 때는 시간이 지나도 분이 풀리지 않고 계속 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빚은 탕감받았지만 동료의 빚은 탕감해 주지 않는 종의 모습처럼, 만일 용서를 채무처럼 생각하면, 이득과 손해를 따지게 됩니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의 잘못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를 청하거나 베풀 때는,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많이 용서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용서에 대하여 올바르게 고민할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용서와 하느님께 청해야 할 용서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우리가 받은 용서에 감사하며, 다른 이를 용서하는 기쁨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직도 분노의 폭약과 복수의 칼을?
오늘 주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드시고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런데 몇 번을 따지지 말고 계속 용서하라는 것은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고 하시는 것은 별문제 없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정 용서하지 않는 우리를 하느님도 용서하지 않으실까요? 이것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하시는데 그런데 악한 사람이 아닌 선한 사람, 죄악이 없는 선한 사람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더 악하고 덜 악하고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악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에 결국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모두 사랑하시고 모두 용서하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굳이 구별하여 말씀하신 것은 다 악하지만 서로 용서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른 악한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여전히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일 겁니다. 사실 오늘 주님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더 큰 죄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러신 다음 이웃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우리도 용서해 주기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이웃의 작은 죄를 용서해 주지 않았고, 그래서 비유의 주인은 “이 악한 종아!”라고 하시며 베푸셨던 용서를 거두십니다. 그리고 이웃이 내게 지은 죄는 내가 하느님께 지은 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비유에서 내가 하느님께 지은 죄는 만 탈렌트이고, 이웃이 내게 지은 죄는 고작 백 데나리온입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노동자가 하루 일한 품삯이니 만 달란트는 8천만 데나리온이고 16만 년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액수지요. 이렇게 큰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용서해 주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기에 용서하시고 용서하셨던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 줄 때까지는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 줄 때 우리의 더 큰 과거의 죄에다 새로 지은 죄까지 기다리고 계셨다가 즉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질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냐고. 물론 그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의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그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우린 작은 용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느님 은총과 만나야 하는데 용서만 받고 용서하지 않으면 은총과 만난 것이 못 되고, 용서해야지만 죄와 은총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독서 집회서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내 죄를 먼저 뉘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내 죄를 뉘우친다면 남에게 잘못한 것을 뉘우쳐야 하지만 특히 이웃을 용서하지 않은 과거와 현재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수하지 말고 화를 품지 말라는 집회서 말씀도 귀여겨들어야겠습니다.
용서란 분노의 폭약을 내 안에서 제거하고 복수의 칼을 내려놓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 은총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 안에 살면서 어떻게 분노의 폭약과 복수의 칼을 지니고 살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일흔일곱 배의 앙갚음에서 일흔일곱 번의 용서로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 너희도 그렇게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현인 벤시라는 말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이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도 용서해 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 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이 질문은 앞 장면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의 반론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이는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창세 4,15절). 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곧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그를 보호해 주신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반면에, 카인의 후손 라멕은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창세 4,23-24)라고 떠벌립니다.
여기서 보듯이,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 혹은 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를 보호해 주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아주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청하지도 않은 빚을 조건 없이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과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후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고백하기도 전에,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입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그러니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으로 마지못해서 혹은 관대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가 아니라 그를 위하는 진실한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당신의 호의로 용서한 다음에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제가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아도,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18장 22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전에 신학생 때의 한 아이가 생각이 납니다. 이 아이는 마치 껌딱지처럼 부모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 나중에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아?”라고 묻자, 자기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어떨까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배우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자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친절하고 늘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시댁 식구들도 자기를 한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당연히 행복한 삶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함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충만함과 완전함의 숫자 ‘7’을 쓴 것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77번까지 용서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예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라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끌려옵니다. 한 탈렌트를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한다면, 만 탈렌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한 데나리온을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계산하면, 쓰지 않고 자그마치 16만 년 이상 일해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런데 종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그래, 꼭 갚아라.” 정도는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유해도 아니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탕감해 줍니다.
이렇게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종은 문을 나서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지요. 그의 동료가 똑같이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 18,29)라고 말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감옥에 가둡니다. 같은 종의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갑자기 임금, 심판관의 모습을 취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로 계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비를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정의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저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수 없어.”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께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속 계산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자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받은 자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비유의 첫 번째 종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망하게 된 것은 용서받은 뒤의 태도입니다. 결국 심각하게 경고하는 사람은 단순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잡고 있는 종과 닮게 됩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먼저 당신이 그의 진정한 친구임을 확인시켜야 한다(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매일 반복되는 용서의 여정입니다. 용서는 몇 번 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진정한 용서입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용서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깊이 체험할수록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도 달라집니다. 우리 또한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를 또 다시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상처는 있지만 우리는 상처 그 자체가 아니며, 분노는 있지만 우리는 분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미움을 하느님께 맡기는 순간, 미움을 붙잡고 있던 우리가 먼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우리 자신을 만나고 풀어주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사랑과 은총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다시 용서의 길로 걸어가는 아름다운 삶이 바로 복음입니다. 상처의 손으로 또 다시 용서를 건네시는 주님이십니다. 용서는 받은 상처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자비를 다시 만나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가장 좋은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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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 6가지
마음에 머무른 한 말씀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지금 이 순간을 빚어 갑니다. 오늘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의 모든 순간에 천천히 스며들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