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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남자세례명 11가지

피어나네 2023. 4.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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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간둘포, 니체타, 루이지 스크로소피, 리카르도, 베니뇨, 불피아노, 식스토 1세, 아탈라, 에바그리오, 요한, 판크라시오, 총 1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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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여자세례명 부르군도파라, 아가페, 키오니아, 총 3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4월 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4월 3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간둘포

  2. 니체타

  3. 루이지 스크로소피

  4. 리카르도

  5. 베니뇨

  6. 불피아노

  7. 식스토 1세

  8. 아탈라

  9. 에바그리오

  10. 요한

  11. 판크라시오

 

4월 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1. 간둘포

 

  • 가톨릭 성인 이름
    Gandulf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60년 비나스코

 

 

간둘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간둘푸스, 간둘프.

 

 

간둘포 자료

간둘푸스(Gandulphus, 또는 간둘포)는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교외 비나스코에서 태어나서 성 프란치스코 생존시에 입회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일생은 극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은 은둔생활을 하려는 헛된 꿈을 꾸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파스칼 수사와 더불어 팔레즈모를 떠나 황야로 갔으나,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폴리치에서 행한 그의 설교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한 날인 성 토요일에 운명하였는데, 한 무리의 새들이 지붕 위에 날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니체타

 

  • 가톨릭 성인 이름
    Nicet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824년 메디키온

 

 

니체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체따, 니체따스, 니체타스, 니케따스, 니케타.

 

 

니체타 자료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카이사레아(Caesarea) 출신인 성 니케타(또는 니체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부친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도 역시 수도원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가 장성한 후에는 자발적으로 수도자가 될 결심을 하고, 비티니아의 올림푸스 산에 있는 메디키온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가, 790년에 성 타라시우스(Tarasius, 2월 25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아르메니아인 황제 레오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서 테오도투스(Theodotus)라는 사람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자, 그는 끝까지 반대하다가 아나톨리아로 유배당하여 모진 고생을 하였다.

그 후 그는 테오도투스를 인정한다는 각서를 쓰고 귀향하였으나, 이를 공식적으로 뉘우치고 재차 반대하여 글리체리아(Glyceria) 섬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루이지 스크로소피

 

  • 가톨릭 성인 이름
    Luigi Scrosopp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4-1884년 우디네

 

 

루이지 스크로소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크로쏘피, 알로이시오, 알로이시우스.

 

 

루이지 스크로소피 자료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는 1804년 8월 4일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Friuli) 지역의 우디네에서 신심 깊고 자애심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2살 때 그는 우디네 교구의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해 1827년 사제품을 받았는데, 첫 미사를 봉헌할 때 그의 형제인 카롤루스(Carolus)와 세례자 요한(Joannes) 신부가 옆에서 그를 도왔다.

1800년대 프리울리는 기근과 전쟁 그리고 페스트로 말미암아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형제인 카롤루스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운영을 도와 우디네와 그 주변 지역의 가난하고 버려진 소녀들을 모아 교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재물과 힘과 애정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소녀들을 위해 더 큰 시설이 필요해지면 우디네와 인근 지역의 거리를 돌며 구걸하듯이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그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속에서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인근 지역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몇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여성들은 재봉과 자수에 숙달된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연령대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에 이끌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살며 하느님을 섬기고자 했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봉사하던 9명의 여성들은 마침내 1837년 2월 1일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동참했는데, 그들은 부자, 가난한 자, 교육 받은 자, 문맹자, 귀족 출신, 비천한 출신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는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설립자는 그들이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소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도록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가난에 대한 이상과 보편적 형제애에 매혹되어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필요성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를 기쁨과 자유의 시인, 기도의 성인, 겸손과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성 필리푸스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이끌었다.

결국 그는 1846년 42세의 나이에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에 가입하여 성 필리푸스 네리의 영적 아들이 되었고, 그로부터 온순함과 다정함을 배웠다. 이는 그가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 설립자이자 사제로서 더 합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녀들의 자기 개발과 성덕의 성장을 위해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수녀들의 성소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들이 더욱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때때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도 했다.

또한 허영과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고 위선과 천박한 태도를 보일 때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아버지다운 자애로써 수녀들의 약점을 바라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원하고 위로하였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베들레헴의 육화에서 드러난 겸손과 가난, 나자렛의 노동자로서의 단순함, 십자가 위에서 바친 온전한 희생, 성체성사의 침묵 안에서 수녀회를 이끌 영성의 기초를 만들어갔다.

그는 일생 동안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추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열두 개의 수녀원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열두 개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은 겸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젊은 소녀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늙어 홀로 남겨진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또한 그는 수녀들이 선의를 지닌 사람들과의 폭넓은 공동 협력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협력했던 그는 우디네 신학교의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들이 통일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정치적 · 군사적 측면에서 이러한 통일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의 국경이자 교차로인 프리울리 지역 전체에 고통스런 시련을 가져왔다.

통일의 결과물 중 하나는 불행하게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였다. 이러한 풍토는 고아원과 오라토리회 사제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자신들의 활동과 고아들의 선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고아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우디네의 오라토리회의 파괴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영적인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83년 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병마와 싸웠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그는 모든 수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썼다.

“나의 죽음 이후 수녀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이다. 애덕! 애덕! 이것은 수녀회 가족의 정신이다. 영혼들을 구하고 애덕으로 그들을 구하여라.”

1884년 4월 3일 목요일 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러 떠났다. 우디네 전체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서둘러 모였고, 하느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가난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일치, 동정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도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이들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다.

그는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알로이시우스 스크로소피(Aloysius Scrosoppi)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리카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97-1253년 치체스터

 

 

리카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자료

잉글랜드(England)의 위치(Wych)에서 태어난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옥스퍼드를 비롯하여 파리(Paris)와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했다.

1235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사무국장이 되었으나, 당시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애빙던(Abingdon)의 성 에드문두스 리치(Edmundus Rich, 11월 16일)를 만나 그를 돕기 위해 즉시 사무국장의 직책을 사임하였다.

그 후 1240년 성 에드문두스 대주교가 프랑스의 퐁티니로 망명했을 때 그를 수행한 성 리카르두스는 에드문두스 성인이 사망한 후 오를레앙(Orleans)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은거하며 신학을 연구하고 서품을 받은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1244년 성 리카르두스는 치체스터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업적은 교구의 완전한 개혁으로 교회 내의 친족 등용과 성직매매를 적극 반대하고 금지시킨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베니뇨

 

  • 가톨릭 성인 이름
    Benig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베니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니그노, 베니그누스, 베닉누스, 베닝누스.

 

 

베니뇨 자료

성 에바그리우스(Evagrius)와 성 베니뇨는 흑해 연안의 토미(Tomi)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불피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Vulp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티레

 

 

불피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불삐아노, 불삐아누스, 불피아누스.

 

 

불피아노 자료

성 불피아누스(Vulpianus, 또는 불피아노)는 시리아 사람으로 고대 페니키아(Phoenicia) 지방의 티레에서 순교하였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그는 굳건하게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했기 때문에 고문대 위에서 관절이 전부 빠질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 가죽부대에 개와 장수말벌(또는 독뱀)을 넣은 후 꿰매어 바다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식스토 1세

 

  • 가톨릭 성인 이름
    Sixtus 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6-125년?

 

 

식스토 1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식스또, 식스뚜스, 식스투스, 씩스또, 씩스뚜스.

 

 

식스토 1세 자료

이탈리아 로마(Roma) 출신인 성 식스투스(또는 식스토)는 교황 성 알렉산데르 1세(Alexander I, 5월 3일)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고, 10여 년 동안 재위하였는데, 순교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남아 있는 자료는 전혀 없다.

그의 칙서로 남아 있는 것은 교우들이 미사 중에 ‘거룩하시다’(상투스)를 입으로 발설해야 한다는 내용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오직 성직자들만이 성구를 만질 수 있다는 규정을 명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아탈라

 

  • 가톨릭 성인 이름
    Attal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800년경 타오르미나

 

 

아탈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딸라, 아딸로, 아딸루스, 아탈로, 아탈루스, 앗탈라.

 

 

아탈라 자료

성 아탈라는 시칠리아(Sicilia) 타오르미나의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그는 아탈루스(Attal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에바그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vag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에바그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바그리우스.

 

 

에바그리오 자료

성 에바그리우스(또는 에바그리오)와 성 베니뇨(Benignus)는 흑해 연안의 토미(Tomi)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93-1271년 펜나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의 펜나에서 태어난 요한(Joannes)은 1213년경에 레카나티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고,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는 4반세기 동안 프로방스(Provence)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1242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30여 년을 살면서 수덕생활에 더욱 정진하여 높은 덕을 쌓았다. 그는 여러 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예언도 하였으며, 영적인 무미건조로 인하여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는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제 4장과 5장 속에 묘사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판크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ncr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베드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0년경? 타오르미나

 

 

판크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그라시오, 방그라씨오, 판크라스, 판크라시우스, 판크라씨오, 판크라씨우스, 판크라티오, 판크라티우스.

 

 

판크라시오 자료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또는 판크라시오)는 시칠리아(Sicilia)를 중심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으나 기록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구전에 의하면 그는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 개종자이며, 그의 부모와 함께 성 베드로(Petrus)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시칠리아의 선교 책임을 맡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 베드로가 그를 주교로 축성하였다. 그는 시칠리아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며 우상을 파괴했는데, 그의 뛰어난 설교로 인하여 시칠리아 총독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를 개종시킴으로써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산적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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