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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남자세례명 12가지

피어나네 2023. 5.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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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디오니시오, 베아토, 빈첸시오, 요한, 이사야, 제론시오, 제오르지오 프레카, 토마스 피커링, 파코미오, 헤르마스, 총 1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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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5월 9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레고리오

  2.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3. 디오니시오

  4. 베아토

  5. 빈첸시오

  6. 요한

  7. 이사야

  8. 제론시오

  9. 제오르지오 프레카

  10. 토마스 피커링

  11. 파코미오

  12. 헤르마스

 

5월 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 그레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44년 오스티아

 

그레고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자료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 오스티아의 주교가 되었고, 후에 에스파냐 지방에 있던 옛 왕국인 나바라(Navarra)와 카스티야(Castilla)의 교황대사로서 활동하였다. 에스파냐의 나바라와 라리오하(La Rioja) 지방에서 널리 공경받고 있는 그는 1044년 로그로뇨(Logrono)에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Alberg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추기경

  • 활동 연도와 지역
    +1443년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알베르가투스, 알베르가티.

 

 

니콜라오 알베르가토 자료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우스 알베르가투스(Nicolaus Albergatus, 또는 니콜라오 알베르가토)는 법률을 공부하던 중 20세의 나이로 카르투지오회에 입회하였다.

탁월한 그의 능력이 너무나 돋보였으므로 그는 여러 수도원의 장상을 역임하였으나 항상 단순한 집에서 살았고, 또 그의 수도원은 가난한 사람의 거처와 다름없이 꾸몄다고 한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는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외교 사명을 맡긴 일이 있다. 1426년 그는 마침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흔히 ‘평화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것은 그의 외교 수완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페라라(Ferrara) 공의회와 피렌체(Firenze) 공의회의 개회를 맡았고, 그리스와의 화해를 모색한 공로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보호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회를 방문하던 중에 시에나(Siena)에서 서거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44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디오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93년경 비엔

 

 

디오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자료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2세기 초 교황 성 식스투스 1세(Sixtus I, 4월 3일)가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한 10명의 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프랑스 남동부에서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는 옛 지방인 도피네(Dauphine)에 있는 비엔의 주교가 되어 성 유스투스(Justus)를 계승하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으나 옛 “로마 순교록”은 ‘증거자’로 기록하였다.

또한 그가 활동하던 시기도 2세기기 아닌 4세기로 보기도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5월 8일에 기념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9일로 옮겨 기념하도록 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베아토

 

  • 가톨릭 성인 이름
    Be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2년? 베아텐베르크

 

 

베아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아또, 베아뚜스, 베아투스.

 

 

베아토 자료

성 베아투스(또는 베아토)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형편이나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영국에서 사도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로마(Roma)에서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에게 사제품을 받은 후 스위스의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이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그가 112년경에 툰(Thun) 호수 위 베아텐베르크 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임종하였다고 전해온다. 용을 물리쳤다는 전설까지 있는 그의 동굴은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고 츠빙글리파가 폐쇄할 때까지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12월 21일)가 그의 생애를 이야기하며 그의 놀라운 신심을 전파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빈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950년 몬테스

 

 

빈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빈첸시오 자료

성 빈첸시오(Vincentius)는 성 겐나디우스(Gennadius, 5월 25일)의 제자로 그의 스승이 에스파냐 아스토르가(Astorga) 교구의 주교가 되었을 때 스승을 계승하여 비에르소(Vierzo)의 몬테스에 있는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75년 샬롱쉬르손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성 요한은 리옹의 성 파티엔스(Patiens, 9월 11일)에 의해 샬롱쉬르손의 세 번째 주교로 축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이사야

 

  • 가톨릭 성인 이름
    Isai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세기 BC

 

 

이사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사이야.

 

 

이사야 자료

“야(훼님)는 구원이시다” 또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성 이사야(Isaias)는 기원전 760년경 아모츠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이사 1,1). 그 밖에 그의 가족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체나 언어 기법, 도시인들이 즐겨 쓰는 은유, 또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 때문에 그를 이 도성 출신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시찰 나갔을 때 그가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7,3), 귀족이었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귀족처럼 왕궁을 수시로 드나들 수 없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또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소명 환시를 근거로 이사야가 사제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사야의 소명을 전하는 6장의 배경은 성전 안팎 모두가 될 수 있다. 6장의 환시를 보기 위해서 이사야가 굳이 사제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격조 높은 문체를 구사하고 강력한 웅변력을 발휘하는 이사야가 평범한 집안 이상의 출신으로 고급 교육까지 받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런 기초가 있었기에 이사야는 임금이나 조정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의 종교 · 정치 · 사회 정책에 관해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출신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에게는 아모스(Amos)나 호세아(Hosea) 예언자처럼 ‘광야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집트 탈출 등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알지만 별다르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도 그가 ‘시나이 계약’과 함께 선택된 민족의 두 기둥을 이루는 ‘다윗 계약’(2사무 7장)을 강조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왕실과 가까운 계층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생활은 그의 사명 수행과 관련된 사항만 몇 가지 간략히 제시되었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하는데 두 아들에게 모두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7,3; 8,3). 자식들의 이름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8,18). 이렇듯 이사야 예언자는 혼인과 가정생활까지 통틀어 온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이사야서는 시편을 제외하고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은 66장의 방대한 분량을 지니고 있다. 바빌론 유배 시기를 기준으로 예언서를 분류할 때, 이사야서는 이 세 시기를 모두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제1부는 1-39장까지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치는 바빌론 유배 이전의 이야기이다.

제2부는 40-55장으로 바빌론 유배 중의 이야기로 타향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위로의 말씀과 함께 유배가 거의 끝나갈 때가 되었다는 희망을 전해준다. 제3부는 56-66장으로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책 전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1부만을 가리킨다. 나머지 제2부와 제3부는 다른 예언자가 거론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제2 이사야서’, ‘제3 이사야서’라고 부른다. 이사야서는 구약성경 중에서 시편 다음으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성경으로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과 수난과 죽음 등 예수님의 구원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소명을 받고(6,1) 그 뒤에 세 임금(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치하에서 활동하였다(1,1). 그에 대한 마지막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기원전 701년이다.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6일 목록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므나쎄 왕 시기(기원전 687-642년)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며 축일을 기념해 왔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순교했다는 전통은 성경에 언급된 것이 아니라 외경에 속한 이야기다(이사야의 승천; 에녹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왕 시기에는 살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므나쎄 왕은 온갖 외국 종교 관습을 끌어들였고, 주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이사야가 순교했을 것으로 여기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이사야 예언자에 관해 소개하면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그가 므나쎄 왕 치하에서 순교했다는 말이 전해진다는 언급과 함께 기념일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5월 9일로 변경하여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제론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ero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01년 체르비아

 

 

제론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론티오, 게론티우스, 제론시우스, 제론씨오, 제론씨우스, 제론티오, 제론티우스.

 

 

제론시오 자료

성 게론티우스(또는 제론시오)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탈리아 체르비아 교구의 주교였다는 것뿐이다. 또 그는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 7월 19일)가 주재한 로마(Roma) 시노드에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간주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제오르지오 프레카

 

  • 가톨릭 성인 이름
    George Prec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0-1962년

 

 

제오르지오 프레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오르그, 게오르기오, 게오르기우스, 쁘레까, 제오르지우스, 조지, 호르헤.

 

 

제오르지오 프레카 자료

성 게오르기우스 프레카(Georgius Preca, 또는 제오르지오 프레카)는 1880년 2월 12일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몰타(Malta)의 수도인 발레타(Valletta)에서 빈첸조 프레카(Vincenzo Preca)와 나탈리나 체라볼로(Natalina Ceravolo)의 아홉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열심한 부모에 의해 그는 그 해 2월 17일 발레타의 포르토 살보(Porto Salvo)에 있는 동정 마리아 본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88년 프레카 가족은 발레타에서 멀지 않고 빠르게 성장하는 항구도시인 함룬(Hamrun)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의 성 카예타누스(Cajetanus) 본당에서 게오르기우스는 견진성사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다.

17살이 된 어느 날 그는 플로리아나(Floriana)에 있는 마글리오(Maglio) 정원을 따라 걷던 중 그가 다니던 리케움(Lyceum) 학원의 교수인 에르콜레 몸팔라오(Ercole Mompalao) 신부를 만났다.

에르콜레 신부는 그에게 “네가 어른이 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의 친구가 되고, 너도 그들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너는 그들을 통해 너의 좋은 운명을 찾을 것이고, 그들도 너를 통해서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케움 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게오르기우스는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몰타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 그의 고해사제였던 알로이시우스 갈레아(Aloysius Galea) 신부가 1905년 4월 8일에 선종했는데 며칠 뒤 게오르기우스에게 발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가르치도록 너를 선택하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에 감동한 게오르기우스는 라틴어로 규칙서를 작성하여 교황 비오 10세(Pius X)의 승인을 받고자 했다. 그는 모든 본당에서 평신도 보조자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양성할 책임을 맡을 7명의 종신 부제들의 모임을 마음속에 그렸다.

1905-1906년 사이에 그는 함룬에서 남성으로 구성된 한 청년 모임을 알게 되어 그들을 자신의 영성 모임에 초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청년 모임의 지도자였던 에우게니오 보르그(Eugenio Borg)를 주목하였고, 그에게 요한 복음에 대해 설명하였다. 에우게니오 보르그는 후에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는 사제 서품을 몇 달 앞두고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성 요셉(Josephus)에게 전구하여 호된 시련에서 살아났지만 그 질병의 결과로 왼쪽 허파가 영구적으로 손상되었다.

그는 1906년 12월 22일 피에트로 파체(Pietro Pace)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예수 성탄 대축일에 함룬의 성 카에타누스 본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서품식 이후 여러 주간 동안 그는 미사를 봉헌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작은 다락방에 칩거하여 하루 종일 묵상과 관상 생활에 전념하였다.

1907년 1월 말경 그는 예전에 보았던 청년 모임을 불렀고, 2월 2일 함룬의 타누초(Ta’Nuzzo) 성당에서 열린 영성 모임에 그들을 초대하였다. 그 후 이 작은 모임은 함룬의 프라 디에구(Fra Diegu) 거리에 작은 공간을 빌려 같은 해 3월 7일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두 날이 그리스도교 교리회(the Society of Christian Doctrine)의 시작으로 기록되었다.

이 평신도 모임의 회원들은 모범적 생활과 가톨릭 신앙의 원리로 충실히 양성되어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처음에 이 모임을 ‘교황의 아들과 딸회’(Societas Papidum et Papidissarum)로 불렀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들이 모임을 갖던 낡고 허름한 공간 때문에 농담 삼아 ‘박물관’(Museum)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별명은 곧 그들 모임의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박물관’ 철자에 라틴어의 첫 글자를 따서 ‘M.U.S.E.U.M’(Magister Utinam Sequatur Evangelium Universus Mundus!)이라는 이름을 고안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선생님, 전 세계가 복음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1910년에는 지안니나 쿠타자르(Giannina Cutajar)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여성 모임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후에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1910년경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스스로 늘 ‘아기 예수님의 놀라운 발현’이라고 부른 매우 강한 신비 체험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마르사 크로스(Marsa Cross) 근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거름 자루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있는 12살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그를 바라보며 급히 도와달라고 청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손수레에 손을 얹는 순간 너무도 큰 영적 감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를 갔는지 또 그 소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기억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이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그 소년이 예수님이었고, 주님께서는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정통한 교리와 양성으로써 주님의 들판과 포도밭을 재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계신다고 이해하였다.

이 교리교사들의 모임(M.U.S.E.U.M.)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회로 발전하였다. 교리교육 사도직에 헌신하는 이 평신도 모임은 자신들을 단순한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인도했고, 그들 스스로 짧은 기도나 규칙적인 묵상을 통해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매일 한 시간 동안 교리교육을 받고 이어서 그룹 모임을 가졌다. 1909년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센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상심하였지만 주저함 없이 이 명령을 따랐다. 그 후 교구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교구청에 이의를 제기해 이 금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14년과 1915년 사이에 여러 일간지들이 새로운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모욕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회원들에게 온유함의 서약 또는 약속을 하도록 명했고, 장난삼아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기꺼이 용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모욕까지 사랑하도록 가르치며 모든 고통을 참아내었다.

1916년 마우로 카루아나(Mauro Caruana) 주교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우여곡절 끝에 호의적인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비록 몇 가지 변경 요구는 있었지만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교회의 최종적 승인을 위한 길이 열렸고, 그 결과 1932년 4월 12일 카루아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 승인을 받았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몰타 제도(諸島)에 복음의 가치와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몰타 사람들을 위해 교리 · 윤리 · 영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회원들의 개인적 사용을 위한 기도나 대중적인 신심을 위한 기도를 담은 수많은 소책자들도 출판하였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 특히 ‘사랑 받은 이의 목소리’라고 부른 복음의 위대한 사도였다. 그는 회원들과 대중들에게 복음서의 문장과 구절들을 기억하도록 고무하였고, 카리스마에 충만한 그의 강론은 항상 성경의 비유나 이야기 그리고 성인들의 생애를 참조하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할 영광을 지켰고, 어떤 것이 추악한 죄악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또한 죽음과 심판, 지옥과 천국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는데 주저하지도 않았다.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철저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감동적으로 선포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언이나 격려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왔고, 그의 전구로 이루어진 치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사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초자연적 은총을 받았다. 사제로서 겸손과 친절, 온유와 관대함을 지닌 그는 진정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목자였다.

몰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강생(降生)의 신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17년부터 그는 요한 복음 1장 14절의 말씀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Verbum Dei caro factum est!”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회원들이 이 말씀의 배지(badge)를 두르기를 원했다.

1921년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에 그리스도교 교리회는 몰타와 고조(Gozo) 섬의 도시와 촌락에서 처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구유 예식을 준비했는데, 이는 그 이후 몰타 제도에서 성탄절을 경축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모든 어린이들이 교리반에 참석하여 성탄절을 위해 준비한 작은 구유나 아기 예수상을 만져보기를 원했다.

이 거룩한 사제는 특별히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어려운 순간마다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 보호하심에 의탁하도록 배웠다. 그는 1918년 7월 21일 카르멜회의 3회원이 되어 이듬해 9월에 서원을 하면서 프란코(Franco)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 센터에 모인 어린이들에게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스카풀라(Scapulars)와 기적의 메달 사용을 장려했고, 그리스도교 교리회 본원 성당을 기적의 메달 성모님께 봉헌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개인적으로 묵주기도를 암송하기 위해 ‘빛의 신비’ 5단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951년 5월 19일에는 산타 베네라(Santa Venera)에 성 미카엘(Michael) 학교 주춧돌 축복식을 가졌고, 1952년에는 호주에서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시작하기 위해 회원들을 파견하였다. 이후 영국, 알바니아, 수단, 케냐, 페루에도 진출하였다.

복음에 대한 봉사와 하느님 백성의 그리스도교적 양성을 위한 길고도 활동적인 삶을 산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1962년 7월 26일 목요일 저녁에 산타 베네라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몰타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깊은 애도를 받았다.

생전에 그는 매우 검소한 장례식을 원했지만 시 당국과 교회의 고위층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의 유해는 함룬 인근에 있는 기적의 메달 동정 마리아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곳은 곧 지속적인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2001년 5월 9일 몰타의 플로리아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전례적으로 5월 9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토마스 피커링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Pickering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79년

 

 

토마스 피커링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토머스, 픽케링.

 

 

토마스 피커링 자료

영국의 웨스트모얼랜드(Westmoreland)에서 태어난 토마스 피커링은 1660년 프랑스 두에(Douai)에 있는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으로서 서원을 하였다. 그 후 그는 고향인 영국으로 파견되어 찰스 2세(Charles II) 국왕의 부인인 브라간사(Braganza)의 카타리나(Catharina) 여왕의 왕실 경당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678년 오츠(Oates)라는 영국 국교회 소속 사제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처럼 속인 후 로마 가톨릭신자들이 정권을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런던에 공포정치를 일으킨 이른바 '가톨릭 음모사건'(Popish Plot)에 휘말려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이듬해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파코미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chom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290?-346/347년 이집트

 

 

파코미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꼬미오, 빠꼬미우스, 파코미우스.

 

 

파코미오 자료

'왕의 독수리'라는 뜻을 지닌 성 파코미우스(또는 파코미오)는 290년경 북이집트 에스네(Esneh)에서 이교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310년경 군대에 징집되어 이곳저곳에서 복무하던 중 라토폴리스(Latopolis)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적인 자선활동에 매력을 느껴 1년간 군복무를 한 후 셰네시트(Shenesit)로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좀 더 완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은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은수자 성 팔레몬(Palaemon, 1월 11일)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성 파코미우스는 몇 년 동안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던 스승과 함께 머물며 은수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이집트 상부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타벤니시(Tabennisi)라는 황폐한 마을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 머물며 기도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너를 찾아와 수도자가 될 것이니 그곳에 머물러 집을 한 채 지어라" 하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하느님의 뜻은 그가 인류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320년경 그곳에 움막을 세웠다. 그러자 즉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후 그는 테베에만도 6개의 큰 수도원을 세웠고, 자매들을 위한 수녀원도 세웠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를 철저히 배격했고, 라토폴리스의 주교회의를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그가 임종할 즈음에는 그의 수하에 약 3천 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2개의 수녀원도 있었지만 사제로 서품되지는 않았다. 그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346년 또는 347년 9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성 파코미우스는 공주(共住) 수도생활(vita coenobitica)의 창시자로 꼽히며,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 역시 그의 규칙을 여러 번 인용하여 자신의 규칙을 만들만큼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는다.

그의 수도생활은 영성적인 요소가 강하면서도 성사적 생활과 전례에 충실하였다. 성사적 생활과 전례는 성 파코미우스 수도자들의 영성을 담는 그릇이자 수도생활에 힘을 불어넣는 활력소였다. 그리고 각자의 영적인 부(富)는 공동생활에 있어서 전체를 위한 선물로 이해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헤르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Herm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교부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로마

 

 

헤르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헤르마스 자료

성 헤르마스는 2세기 초 로마에 살던 그리스도교 신자로 교부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마도 유태인 내지 유대적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그리스어로 환시적인 개심(改心)을 권하는 묵시문학적 책인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를 저술하였다.

그는 사도교부로 볼 수 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저서에 의존하는 것밖에는 알 길이 없다. 그는 원래 로데라는 부인의 노예로 로마에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결혼을 하고 상인이 되어 때로는 부정수단으로 축재를 했으나, 박해 때 전 재산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식들에 의해 밀고를 당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를 비롯한 가족 전원이 회개하였다.

그 자신의 서술에 의하면 그는 사도교부의 한 사람인 로마의 성 클레멘스(Clemens, 11월 23일) 교황의 친구이고,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canon)에 의하면 교황 성 비오 1세(Pius I, 7월 11일)의 형제이며, 오리게네스(Origenes)에 의하면 신약성서 로마서 16장 14절에 나오는 헤르마스와 동일 인물이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고대 라틴역에 의하면 5편으로 된 환시 또는 묵시(visiones), 12편으로 된 계명(mandata), 10편으로 된 비유(similitudines)의 3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에서는 처음에 노부인이 교회를 대표하여 헤르마스와 그의 가족 모두가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제5편의 환시에서는 노부인 대신 한 목자가 회개의 천사로서 등장한다. 이 책의 이름도 이 목자에서 딴 것이다.

제2부에서 헤르마스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 · 성실 · 자선 등 그리스도교 도덕을 가르치고 있고, 제3부에서는 여러 가지 그리스도교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2-3세기 그리스 교회에서는, 이를테면 리옹(Lyon)의 주교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클레멘스(그리스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서방교회 신학자) 등에 의해서 이 책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도 증언하고 있듯이 주로 그 도덕적 가치가 존중되어 세례 지원자들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시나이 사본에서는 신약성경 다음에 넣어졌으나 라틴 교회에서는 별로 중용(重用)되지 않았다. 이 책의 주요 목적은 한 번은 죄를 용서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려 하는 데 있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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