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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남자세례명 19가지

피어나네 2023. 5.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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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비노, 루카 커비, 리카르도 뉴포트, 마델지실로, 마우로 스콧, 마티아 물룸바, 바실리오, 발스타노, 시코, 아나스타시오, 안드레아, 야고보 베르토니, 엑스수페란시오, 요셉 마렐로, 이사악, 크리스풀로, 팔라시노, 페르디난도 3세, 펠릭스 1세, 총 1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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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여자세례명 딤프나, 엠멜리아, 잔 다르크, 총 3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3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9가지

 

 

 

 

5월 30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가비노

  2. 루카 커비

  3. 리카르도 뉴포트

  4. 마델지실로

  5. 마우로 스콧

  6. 마티아 물룸바

  7. 바실리오

  8. 발스타노

  9. 시코

  10. 아나스타시오

  11. 안드레아

  12. 야고보 베르토니

  13. 엑스수페란시오

  14. 요셉 마렐로

  15. 이사악

  16. 크리스풀로

  17. 팔라시노

  18. 페르디난도 3세

  19. 펠릭스 1세

 

5월 3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9가지

 

 

1. 가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ab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년

 

 

가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비누스.

 

 

가비노 자료

성 가비누스(또는 가비노)와 성 크리스풀루스(Crispulus)는 사르데냐(Sardegna)의 최초의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신들이 복음을 선포하던 토레스(Torres)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카 커비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Kirb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9?-1582년 영국

 

 

루카 커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키르비.

 

 

루카 커비 자료

성 루카 커비(Lucas Kirby, 또는 루가 커비)는 1549년경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Yorkshire)의 리치몬드(Richmond) 부근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마도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을 졸업한 듯한데, 그 이후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영국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577년 두에 또는 캉브레(Cambrai)에서 사제품을 받고 다음 해에 로마의 영국 신학교로 가서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580년에 그는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12월 1일)과 성 랄프 셔윈(Ralph Sherwin, 12월 1일) 등과 함께 영국 선교단의 일원으로 선택되었다. 그들은 그해 4월 중순 로마에서 출발해 5월 말에 랭스(Reims)에 도착했다. 그리고 6월 중순 복자 윌리엄 하틀리(William Hartley, 10월 5일) 신부와 함께 랭스를 떠나 걸어서 두에와 덩케르트(dunkirk)까지 갔다.

그는 계속해서 잉글랜드로 건너가 항구마을인 도버(Dover)에 도착했는데, 미처 선교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체포되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 있는 게이트하우스(Gatehouse)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12월 4일 런던탑으로 이송되어 ‘스캐빈져 더터’(Scavenger’s Daughter)로 알려진 금속 도구를 이용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는 1581년 11월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과 그 동료들과 함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에 대한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집행은 다음 해 5월까지 연기되었다. 처형일까지 쇠사슬에 묶여 지내야 했던 그는 1582년 5월 30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루카 커비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5월 30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리카르도 뉴포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Newport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2년 영국

 

 

리카르도 뉴포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스미스.

 

 

리카르도 뉴포트 자료

리카르두스 뉴포트(Richardus Newport, 또는 리카르도 뉴포트)는 영국 잉글랜드 중부 노샘프턴셔(Northamptonshire)의 해링워스(Harringworth)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와 이탈리아 로마(Roma)의 영국 대학에서 수학한 후 1597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교구 사제로서 몇 년 동안 런던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성공적인 사목을 했으나 두 번이나 체포되고 추방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세 번째로 체포되어 런던의 성공회 주교에게 심문을 받으며 제임스 1세(James I)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제안받았지만, 그 서약이 교황과 가톨릭 교회에 불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베네딕토회의 마우루스 스콧(Maurus Scott) 신부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1612년 5월 30일 아침에 타이번(Tyburn)으로 함께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리카르두스 스미스(Richardus Smith)로도 불린다.

리카르두스 뉴포트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5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리카르두스 뉴포트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델지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delgis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55년경

 

 

마델지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델기실로, 마델기실루스, 마델지실루스.

 

 

마델지실로 자료

성 마델지실루스(또는 마델지실로)는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성 푸르세우스(Furseus)와 함께 영국으로 그 다음에는 프랑스 지방으로 가서 선교하였다.

그의 스승이 서거한 뒤에 그는 생리퀴에(Saint-Riquier)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동료들로부터 지나친 공경을 받는 것이 불편하여 오티에 강의 몬스틀렛산의 은둔소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관상생활에 전념하던 중에, 영국인 은수자 불간의 방문으로 이 두 사람의 우정이 꽃피기 시작하였다. 그의 유해는 생리퀴에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우로 스콧

 

  • 가톨릭 성인 이름
    Maurus Scott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79?-1612년 영국

 

 

마우로 스콧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굴리엘모, 마우러스, 마우루스, 빌리암, 빌헬름, 스캇, 스코트, 윌리암, 윌리엄.

 

 

마우로 스콧 자료

마우루스 스콧(또는 마우로 스콧)은 1579년경 영국 잉글랜드 동부 에식스(Essex)의 치그웰(Chigwell)에서 태어나 윌리엄 스콧(William Scott)이란 이름으로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런던(London)의 학교에서 수학한 후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와 트리니티 홀(Trinity Hall)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민법 분야에 관심과 재능이 탁월했다. 

그는 1600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런던으로 가서 이너 템플(Inner Temple) 법학원에서 변호사 수습 과정을 거쳤다. 이때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거짓이고 반역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가톨릭 신자인 친구를 만나 대화하면서 우연히 신학 서적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2년 정도 많은 가톨릭 문학 및 영성 서적을 읽고 연구하고 기도하다가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개종에 있어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으로 당시 런던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성 요한 로버츠(Joannes Roberts, 12월 10일) 신부의 영향이 컸다. 성 요한 로버츠는 윌리엄 스콧을 가톨릭 교회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베네딕토회의 지원자로도 받아들였다.

1604년 사순시기에 윌리엄 스콧과 다른 세 명의 지원자는 성 요한 로버츠 신부와 함께 수도 생활을 위해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를 향해 출항하다가 체포되었다. 다행히 그들은 바로 풀려났고, 윌리엄 스콧과 지원자들은 다른 베네딕토회 수도승의 인도로 사아군(Sahagun)의 성 파쿤두스(Facundus) 수도원으로 가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윌리엄 스콧은 베네딕토회에서 마우루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1610년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되자마자 영국 선교를 간절히 원한 그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의 성 그레고리우스 수도원으로 가서 선교 여행을 준비한 마우루스 스콧은 그해 12월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마우루스 스콧은 런던으로 들어가는 길에 자신을 가톨릭 신앙과 베네딕토회로 이끌어준 성 요한 로버츠 신부를 보았는데, 이때 그는 가톨릭 사제로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죄로 체포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타이번(Tyburn)에서 성 요한 로버츠 신부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처형이 끝난 후 마우루스 스콧은 순교자의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 기회를 보다가 몇몇 사람과 함께 순교자의 유해를 최대한 찾아 모셨으나 그 과정에서 그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1611년 12월까지 1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사부아(Savoie)의 대사가 감옥에 갇힌 가톨릭 사제들을 풀어주기 위해 협상에 나서면서 국외로 추방되었다. 두에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잉글랜드로 되돌아가길 원했고, 1612년 주님 부활 대축일 즈음에 배를 타고 들어왔으나 런던에 발을 딛기도 전에 템스(Thames) 강에서 체포되었다.

마우루스 스콧은 체포된 후 성공회의 주교에게 심문을 받고 제임스 1세(James I)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제안을 받았지만, 그 서약이 교황과 가톨릭 교회에 불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612년 5월 28일,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중앙 형사 법원인 올드 베일리(Old Bailey)에서 재판을 받고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는 5월 30일 아침에 교구 사제인 리카르두스 뉴포트(Richardus Newport) 신부와 함께 타이번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몇 개 남은 금화를 선의로 건네며 자신을 처형하는 행위에 대해 기꺼이 용서한다고 말했다.

마우루스 스콧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5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마우루스 스콧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마티아 물룸바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Mulumb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6?-1886년 우간다

 

 

마티아 물룸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깔렘바,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무룸바, 므룸바, 칼렘바.

 

 

마티아 물룸바 자료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바실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as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58년

 

 

바실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실리우스.

 

 

바실리오 자료

성 바실리우스(Basilius the Elder, 또는 바실리오)와 성녀 엠멜리아(Emmelia)는 성 대 바실리우스(1월 2일),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 세바스테(Sebaste)의 성 베드로(Petrus, 1월 9일) 그리고 성녀 마크리나(Macrina the Younger, 7월 19일)의 부모이다.

그들은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흑해 연안으로 이주했다가 후에 그들이 살던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로 돌아왔다. 아내와 함께 그리스도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칠 자녀들을 양육하다가 선종한 후 그의 가족 영지는 여성 동정녀들을 위한 수도 공동체로 변경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발스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Walst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평신도

  • 활동 연도와 지역
    +1016년 노리치

 

 

발스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스타누스, 왈스탄, 월스탄.

 

 

발스타노 자료

성 발스타누스(Walstanus, 또는 발스타노)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노리치 근교 바우버(Bawbough)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부친 베네딕투스와 모친 블리다의 좋은 표양을 받고 자람으로써 그의 앞날을 미리 예견할 수 있었다.

12세 때에 이미 그는 유산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테버햄(Taverham)에서 하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애덕이 지극하여 자기의 음식이나 신, 옷가지들을 항상 걸인에게 주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받는 세경조차 보속이 정신으로 남에게 주었다.

그는 독신서원을 발했으나 수도원 생활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일하던 목장에서 선종했는데, 잉글랜드의 하인들은 그의 무덤을 순례하고 큰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월스탄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시코

 

  • 가톨릭 성인 이름
    Sy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시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꼬, 시꾸스, 시쿠스.

 

 

시코 자료

성 시쿠스(또는 시코)와 성 팔라티누스(Palatinus)는 시리아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순교자들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아나스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80년 파비아

 

 

아나스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오, 아나스따시우스, 아나스타시우스.

 

 

아나스타시오 자료

성 아나스타시우스(또는 아나스타시오)는 아리우스주의에 빠졌다가 개종하였고, 668년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파비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교구를 다스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401년 피스토이아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안드레아 자료

안드레아(Andreas)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피스토이아의 프란치 보카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뛰어난 설교가이던 그는 1378년에 고향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23년 동안이나 교구를 지혜롭게 다스렸는데, 주로 교회를 재건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러므로 주교의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극도로 단순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능한 한 규칙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임종하기 일 년 전에 주교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에서 죽음을 준비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야고보 베르토니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Berton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444-1483년

 

 

야고보 베르토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야고보 베르토니 자료

이탈리아 파엔차(Faenza) 출신인 야고보 베르토니(Jacobus Bertoni)는 아홉 살에 성모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 서원을 앞두고 부친의 중병으로 연기하였다가, 몇 년 뒤에 서원하여 가장 훌륭한 수도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는 죄를 철저히 미워하여 매일같이 고해성사를 본 사람으로 유명하다.

외관상으로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매우 여위었다. 사제로 서품된 뒤에 그는 수도원내의 여러 직책을 맡아 모범적으로 수행하다가, 39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66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엑스수페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xsupera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18년 라벤나

 

 

엑스수페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엑수페란시오, 엑수페란시우스, 엑수페란티오, 엑수페란티우스, 엑스수뻬란시오, 엑스수뻬란시우스, 엑스수페란시우스, 엑스수페란티오, 엑스수페란티우스.

 

 

엑스수페란시오 자료

이탈리아 라벤나의 대주교이던 성 우르수스(Ursus)의 후임자인 성 엑스수페란티우스(또는 엑스수페란시오)는 교구민들의 현세적, 영신적 이익을 위하여 일생을 불사른 분이다.

그는 호노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살았는데, 스틸리코족이 라벤나를 침략했을 때 그가 직접 군인들을 이끌고 나가 이 도시를 방어하였다. 그는 거의 20년 동안 주교직에 있으면서 위대한 사목자로 추앙받다가 418년에 운명하였으며, 유해는 지금 라벤나 대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요셉 마렐로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Marell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4-1895년 아퀴

 

 

요셉 마렐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렐루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요셉 마렐로 자료

성 요셉 마렐로(Josephus Marello)는 1844년 12월 26일 이탈리아 북서부의 토리노(Torino)에서 아버지 빈첸초(Vincenzo)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마렐로(Anna Maria Marello)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은 토리노에서 아스티(Asti) 근방의 산 마르티노 알피에리(San Martino Alfieri)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정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고, 이 신심은 후에 그가 성소를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충실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12살 때 아스티의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그의 선한 품성과 거룩한 생활은 동료들의 모범이 되었다. 19살에 발진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는 살려주시면 꼭 사제가 되겠다고 성모님께 약속했고, 무사히 병이 나아 1868년 9월 19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그는 열성을 다해 사제다운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처음에 그는 아스티 교구에서 주교의 비서로 일했고, 이어 교구청의 행정을 조정하는 사무처장의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사목직 안에서 고해성사와 영적 지도와 교리교육에 헌신하며 젊은이들의 윤리와 종교 교육을 충실히 도왔다. 또한 어려운 시기를 맞은 교회를 위해 교황과 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통해 평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면서 그는 카르투지오회에 들어가 전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삶에 대해 고심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일깨우며 단념하도록 설득했다. 주교는 성 요한 마렐로의 전인적인 헌신과 열망이 새로운 수도회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 당시 혁명 법의 여파로 아스티에서 질식하다시피 쇠퇴한 남자 수도회의 소생을 알리는 시작이 되기를 원했다.

결국 성 요셉 마렐로는 1878년 3월 14일 하느님 말씀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돌본 성 요셉의 모범을 따르는 ‘성 요셉의 봉헌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새로운 수도회의 신부와 수사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성 요셉의 헌신을 전파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하며, 지역 교회의 직무를 충실히 돕는 임무를 맡겼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회기 중 그는 자신의 주교를 돕는 비서로 동행했는데, 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가 된 조악키노 페치(Vincenzo Gioacchino Pecci) 추기경은 이때 그의 덕성과 재능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에 즉위한 레오 13세는 그를 아퀴의 주교로 임명하였고, 그는 1889년 2월 17일 주교품을 받았다.

성 요셉 마렐로 주교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자신의 주교직을 수행하면서 그는 교리교육과 젊은이들의 신앙교육 그리고 본당사목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 필리푸스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 선종 30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사보나(Savona)에 갔다가 1895년 5월 30일 선종하였다.

1993년 9월 2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아스티에서 그를 복자품에 올리면서 애덕의 모범으로, 젊은이와 소외된 이들을 위해 꾸준하면서도 소리 없이 노력한 모범으로 그를 제시하였다. 또한 하느님 백성의 모든 사목자와 전 세계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이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2001년 11월 2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이사악

 

  • 가톨릭 성인 이름
    Isaa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410년경 콘스탄티노플

 

 

이사악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삭, 아이작, 이사크, 이삭, 이자크.

 

 

이사악 자료

아리우스파(Arianism)의 황제인 발렌스가 가톨릭을 박해할 때 이사악이란 은수자가 자기 은둔소를 떠나 이에 항의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래서 성 이사악은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수차례에 걸쳐서 가톨릭에 대한 박해의 중지를 호소하고 경고하였다. 만일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큰 재앙이 내린다고도 하였다.

황제는 한 은수자의 이런 경고를 비웃으며 그가 이 도시를 벗어나면 가까운 수렁에 빠트려 죽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이를 모면하고 또 다시 예언의 말을 하다가 결국은 투옥되었다. 그 얼마 뒤에 이사악의 예언대로 왕은 전투에서 참패하여 죽었다. 이때부터 그를 위대한 수도자로 또 예언자로 공경하였다. 그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에도 참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크리스풀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rispu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년

 

 

크리스풀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끄리스뿔로, 끄리스뿔루스, 크리스풀루스.

 

 

크리스풀로 자료

성 가비누스(Gabinus)와 성 크리스풀루스(또는 크리스풀로)는 사르데냐(Sardegna)의 최초의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신들이 복음을 선포하던 토레스(Torres)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팔라시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alat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팔라시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빨라씨노, 빨라씨누스, 팔라시누스, 팔라씨노, 팔라씨누스, 팔라티노, 팔라티누스.

 

 

팔라시노 자료

성 시쿠스(Sycus)와 성 팔라티누스(또는 팔라시노)는 시리아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순교자들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페르디난도 3세

 

  • 가톨릭 성인 이름
    Ferdinand I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 활동 연도와 지역
    1199-1252년 카스티야

 

 

페르디난도 3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페르디난두스, 페르디난드.

 

 

페르디난도 3세 자료

중세 후기 에스파냐 북서부에 있던 레온 왕국(Kingdom of Leun)의 왕 알폰소 9세(Alfonso IX)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3세의 장녀인 베렌가리아(Berengaria)의 아들인 성 페르디난도(Ferdinandus)는 살라망카(Salamanca) 교외에서 태어나서 18세 때에 카스티야 왕국의 왕이 되었다. 또 그는 1219년에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국왕 필립의 딸인 베아트릭스(Beatrix)와 결혼하였고,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레온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재임 20년 동안 늘 무어인들과 싸웠으며 우베다(Ubeda), 코르도바(Cordoba), 카디스(Cadiz) 그리고 끝내는 세비야(Sevilla)에서까지 그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여 안달루시아(Andalusia) 지방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통치하여 뛰어난 왕으로 칭송받았으며 두 나라 간의 내적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는 시메네스 대주교를 재상으로 모셨고, 1243년에는 살라망카에 대학교를 세웠으며,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을 재건하고, 세비야의 회교 사원을 성당으로 개조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또 아내 베아트릭스가 죽고 난 뒤에 퐁티외의 요안나(Joanna)와 재혼하였다.

그의 장례식 때에 그에게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의 수도복이 입혀졌고,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되어 국민들의 공경을 받아온다. 그는 1655년 5월 31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펠릭스 1세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4년

 

 

펠릭스 1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1세 자료

성 펠릭스는 로마 태생이며 그의 부친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269년 1월 3일 교황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2월 26일)를 계승하여 교황좌에 올랐고, 카타콤바의 순교자 묘지 위에서 미사를 봉헌하도록 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는 로마 순교록에 순교자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4세기의 "리베리오 교황표"에 의하면 그의 시신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5월 30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12월 30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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