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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남자세례명 9가지

피어나네 2023. 5.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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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루피치노, 야고보 살로모네, 칸시아노, 칸시오, 크레센시아노, 파스카시오, 펠릭스, 프로토, 헤르미아, 총 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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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여자세례명 로즈마리, 메히틸다, 베드로닐라, 카밀라 바티스타 바라노, 칸시아넬라,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3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9가지

 

 

 

 

5월 3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루피치노

  2. 야고보 살로모네

  3. 칸시아노

  4. 칸시오

  5. 크레센시아노

  6. 파스카시오

  7. 펠릭스

  8. 프로토

  9. 헤르미아

 

5월 3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9가지

 

 

1. 루피치노

 

  • 가톨릭 성인 이름
    Lupic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베로나

 

 

루피치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피치누스, 루피키노, 루피키누스.

 

 

루피치노 자료

성 루피키누스(또는 루피치노)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주교였다. 그는 “가장 거룩하며 최고의 주교”라고 묘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야고보 살로모네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Salomon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31-1314년

 

 

야고보 살로모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야고보 살로모네 자료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의 귀족가문 출신인 야고보 살로모네(Jacobus Salomone)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의 손에 의해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몇 년 동안 시토회에서 지냈기 때문이었다. 17세 때에 그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분배해 주고 도미니코회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더욱 엄격한 기도생활에 전념하는 한편 병자와 가난한 이들의 구호에 늘 부지런하였다. 성서 외에도 그는 매일같이 성인록을 공부하였고, 묵상이 그의 밥이었다고 한다. 이 거룩한 수도자는 수많은 탈혼을 경험하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암으로 4년 동안이나 고생하였으나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82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칸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anti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년 사사리

 

 

칸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간시아노, 간시아누스, 깐씨아노, 깐씨아누스, 칸시아누스, 칸티아노, 칸티아누스.

 

 

칸시아노 자료

성녀 칸티아넬라(Cantianella)와 성 칸티우스(Cantius)와 성 칸티아누스(또는 칸시아노)는 모두 한 형제들로서 아니치이의 유명한 로마(Roma)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고아가 되었다. 고아원을 떠난 후에 그들은 로마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인 후견인을 만났다. 그 후견인이 바로 성 프로투스(Protus)인데 그들은 프로투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그들은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퀼레이아(Aquileia)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곳 역시 황제의 칙령이 엄격히 시행되고 있었다.

당국은 이들 젊은 귀족들의 도착을 알고서 신전에 희생을 드리도록 명하였다. 그들 형제는 참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예배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들의 후견인인 프로투스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간시오, 간시우스, 깐씨오, 깐씨우스, 칸시우스, 칸티오, 칸티우스.

 

 

칸시오 자료

성녀 칸티아넬라(Cantianella)와 성 칸티우스(또는 칸시오)와 성 칸티아누스(Cantianus)는 모두 한 형제들로서 아니치이의 유명한 로마(Roma)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고아가 되었다. 고아원을 떠난 후에 그들은 로마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인 후견인을 만났다. 그 후견인이 바로 성 프로투스(Protus)인데 그들은 프로투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그들은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퀼레이아(Aquileia)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곳 역시 황제의 칙령이 엄격히 시행되고 있었다.

당국은 이들 젊은 귀족들의 도착을 알고서 신전에 희생을 드리도록 명하였다. 그들 형제는 참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예배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들의 후견인인 프로투스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크레센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rescen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년 사사리

 

 

크레센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끄레쎈씨아노, 끄레쎈씨아누스, 크레센시아누스, 크레센씨아노, 크레센씨아누스, 크레셴시아노, 크레셴시아누스, 크레스켄티아노, 크레스켄티아누스.

 

 

크레센시아노 자료

성 크레스켄티아누스(Crescentianus, 또는 크레센시아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사르데냐(Sardegna)의 사사리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전날 축일을 기념하는 성 가비누스(Gabinus)와 성 크리스풀루스(Crispulus)와 같은 박해 중에 순교하였고, 오늘날까지 사르데냐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파스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sch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 활동 연도와 지역
    +512년 로마

 

 

파스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스까시오, 빠스까시우스, 빠스카시오, 빠스카시우스, 파스카시우스.

 

 

파스카시오 자료

성 파스카시우스(또는 파스카시오)는 교회의 관대함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의 대립교황이었던 라우렌티우스(Laurentius)를 지지하던 로마의 부제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Gregorius)는 그의 대화집에서 성 파스카시우스의 이름을 기념하고 있다. 그는 몇 권의 신학적 저서를 집필했으나 지금은 모두 분실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715-1787년 니코시아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는 1715년 11월 5일 시칠리아(Sicilia) 섬의 니코시아에서 아버지 필리포 아모로소(Filippo Amoroso)와 어머니 카르멜라 피로(Carmela Pirro)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로 바로 필리푸스 야고보(Philippus Jacobu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던 제화공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인 10월 12일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펠릭스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반니 카바렐리(Giovanni Cavarelli)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종종 수도원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얻어 수도원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섬의 소년들처럼 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더 많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수도자들의 생활, 즉 그들의 자발적인 엄격함과 자유로운 가난, 참회와 기도, 애덕과 선교 정신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20살 때 그는 니코시아 수도원의 원장에게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도록 메시나(Messina)의 관구장 신부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문맹이었던 그는 성직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평수사로서의 성소는 그의 겸손하고 단순한 천성에 비추어 더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8년 동안 계속해서 입회를 요청했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거절의 답변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성소를 더욱 굳건히 키워갔다. 이렇듯 그는 충분한 숙고의 기회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잘 준비한 성소자였다.

그토록 많은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비슷한 수도회에 입회할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람과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하나이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1743년 메시나의 관구장 신부가 니코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그를 만나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고자 청했고, 마침내 관구장 신부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고 미스트레타(Mistretta)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743년 10월 10일 수련기에 들어가면서 그는 펠릭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련기는 많은 덕행들을 실천하며 지낸 특별한 해였다. 그의 전기를 쓴 모든 작가들은 펠릭스 수사야말로 순명과 순결, 금욕에 대한 사랑과 천사적 인내에 있어서 그 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런 덕행들을 간직한 채 그는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1744년 10월 10일 첫 서원을 발했다.

첫 서원 후 미스트레타의 수도원장은 평소 관례와는 달리 펠릭스 수사를 고향인 니코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사실 젊은 수도자가 고향 마을로 파견되는 것은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초연한 펠릭스 수사라면 그곳에서도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펠릭스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금언대로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코시아 수도원에서 구호금 모금의 소임을 받는 그는 매일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탁발에 나섰다. 그는 부자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부유함을 나누도록 초대했고,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대문을 두드리면서는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하는 구호품을 제공하였다.

거리에서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그는 늘 평온함과 신중함을 간직했다. 그는 어떤 것을 받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으며, 심지어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어 교리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배우고 삶으로 풀어가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갔다. 그는 수도원 식탁에서 들려주는 교훈적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노력했고, 니코시아 성당에서 강론을 들을 기회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3월의 매 금요일에는 단단히 굳은 빵과 물만 먹으며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무릎 꿇은 상태로 십자고상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기에 매일의 고된 일들을 마친 후에도 감실 앞에서 몇 시간씩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엄격한 참회와 금욕 생활의 결과로 육체적으로 병약해져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펠릭스 수사는 수도원의 병실에 머물면서도 늘 다른 병든 수사들을 위해 어떠한 봉사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집중과 기쁨 그리고 단순한 순명의 정신은 더욱 더 강해졌다.

1787년 5월 말경 정원에서 일하던 펠릭스 수사에게 갑작스런 고열이 찾아왔다. 마카리오(Macario) 원장 신부는 그에게 순명의 자세로 누워서 쉬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그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하고, 5월 31일 새벽 2시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해는 1891년에 니코시아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성 펠릭스 수사는 일생 동안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써 큰 덕을 쌓았으며 이웃에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다. 또한 그에게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까지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늘 하느님께 간구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일생을 순명하며 살았던 그는 1888년 2월 12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6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프로토

 

  • 가톨릭 성인 이름
    Pro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프로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또, 쁘로뚜스, 프로또, 프로뚜스, 프로투스.

 

 

프로토 자료

성녀 칸티아넬라(또는 칸시아넬라)와 성 칸티우스(Cantius)와 칸티아누스(Cantianus)는 모두 한 형제들로서 아니치이의 유명한 로마(Roma)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고아가 되었다. 고아원을 떠난 후에 그들은 로마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인 후견인을 만났다. 그 후견인이 바로 성 프로투스(또는 프로토)인데 그들은 프로투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그들은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퀼레이아(Aquileia)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곳 역시 황제의 칙령이 엄격히 시행되고 있었다.

당국은 이들 젊은 귀족들의 도착을 알고서 신전에 희생을 드리도록 명하였다. 그들 형제는 참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예배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들의 후견인인 프로투스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헤르미아

 

  • 가톨릭 성인 이름
    Hermi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0년 카파도키아

 

 

헤르미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헤르미아스.

 

 

헤르미아 자료

베테랑 군인이었던 성 헤르미아는 카파도키아의 코마나(Comana)에서 순교하였다. 성인전 작가 바로니우스(Baronius)는 그의 순교 장소를 폰투스(Pontus)로 잘못 기술하였다. 그는 특별히 그리스 전례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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