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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남자세례명 11가지

피어나네 2023. 6. 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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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다윗, 막센시오, 바오로, 비질리오, 살비오, 수페리오, 안텔모, 요한 (궁중시종, 순교자), 요한 (주교), 펠라지오,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총 1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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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여자세례명 페르세베란다,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2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6월 26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다윗

  2. 막센시오

  3. 바오로

  4. 비질리오

  5. 살비오

  6. 수페리오

  7. 안텔모

  8. 요한 (궁중시종, 순교자)

  9. 요한 (주교)

  10. 펠라지오

  11.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6월 2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1. 다윗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50?-540년 테살로니카

 

 

다윗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다윗 자료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어난 성 다윗은 젊은 나이에 그리스 테살로니카 외곽에 있는 성 메르쿠리우스(Mercurius)와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작은 은둔처에서 은수자로서 또 영적 지도자로서 오랫동안 살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지혜로운 충고와 기도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는 더 한적한 곳에서 관상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아몬드 나무 위로 올라가 3년을 살았다.

그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테살로니카를 방어하기 위해 군인들을 보내주도록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청원하고자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540년 마케도니아로 가는 길에 배 위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테살로니카의 수호성인으로서 보통 ‘나무 위의 성 다윗’(St. David the Dendrite 또는 David the tree-dweller)으로 불린다. 그의 유해는 13세기 초 십자군에 의해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로 이장되었고, 1978년 9월 16일 그가 평생을 지낸 테살로니카로 돌아와 성 데메트리우스(Demetrius) 대성당에 모셔졌다.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6월 26일에, 그리스 정교회는 성인의 유해를 테살로니카로 다시 모셔온 9월 16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막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x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15년경

 

 

막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센시우스, 막센티오, 막센티우스, 막쎈씨오, 막쎈씨우스.

 

 

막센시오 자료

프랑스 리옹만(Gulf of Lion) 아지드 태생인 성 막센티우스(또는 막센시오)는 아주토르(Adjutor)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 세베루스(Severus)의 보호 아래서 그리스도교 덕행의 모델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동료 수도자들의 질투와 찬미 때문에 마음이 더욱 혼란해진 그는 2년여 동안 잠적해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그 자신이 일약 명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구세주 또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을 참지 못한 그는 볼크레르 계곡의 어느 공동체로 숨어 들어갔다. 여기서는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마음 놓고 수도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다른 음식물은 거의 먹지 않고 빵과 물 소량으로만 만족했으며, 허리가 굽을 정도로 엎드려 기도하였다.

특히 여기서도 그에게는 기적의 은혜가 빛나기 시작하였다. 한번은 무장한 강도들이 수도원을 급습하여 수도자들을 잡아간 일이 있는데, 그는 자기 수하 사람들을 구하려고 용감하게 달려가니, 강도 하나가 그를 죽이려고 칼을 치켜들자마자 팔이 마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기름을 발라 그의 팔을 낫게 하고 동료들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7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궁중시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경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요한(Joannes)과 성 바오로(Paulus)는 형제간으로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딸인 동정녀 콘스탄티아(Constantia)의 시종이었다. 나중에 그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중 로마의 첼리오(Celio) 언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순교를 기록한 행적에 따르면,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말살하고 로마의 신들에 대한 우상 숭배를 재건하기 위해 대박해를 시작했을 때, 콘스탄티아의 시종으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성 요한과 성 바오로 형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배교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들이 용감히 신앙을 지키며 대항하자 시민들 앞에서 공공연히 참수하지 못하고, 첼리오 언덕에 있는 그들의 별장에서 테렌티아누스(Terentianus)를 시켜 비밀리에 참수형에 처했다.

그들의 시신은 크리스푸스(Crispus)와 크리스피니아누스(Crispinianus) 그리고 베네딕타(Benedicta)라는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그들이 순교한 곳에 안장되었고, 이들 세 명의 신자들 또한 참수되어 그 옆에 묻혔다. 그리고 성 요한과 성 바오로가 순교한 별장 위에 그들에게 봉헌된 성당이 세워졌다.

4세기 중엽 로마 원로원 의원인 비잔티우스(Byzantius)와 그의 아들인 성 팜마키우스(Pammachius, 8월 30일)는 첼리오 언덕에 있는 순교자 성 요한과 성 바오로가 묻힌 별장 위에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성당을 건립했다. 그 성당은 비잔티우스 또는 팜마키우스 대성당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이미 5세기 초부터 로마 사람들의 순례와 공경의 대상이 된 가장 중요한 무덤 성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외적의 침략과 지진 등으로 파괴된 대성당은 수차례의 복원과 증축 과정을 거쳤고, 19세기 말 대성당 밑을 발굴했을 때 두 순교자가 묻힌 옛 저택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들이 묻힌 방에는 성 요한과 성 바오로의 순교와 관련된 내용 및 그리스도교적 주제를 담고 있는 고대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성 팜마키우스에 의해 대성당이 건립된 후 두 성인은 더욱 큰 공경을 받았고, 로마 전문(Canon, 오늘날 미사 경본의 감사기도 제1양식)에도 그 이름이 추가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비질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gi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05년 트렌토

 

 

비질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길리오, 비길리우스, 비질리우스.

 

 

비질리오 자료

이탈리아 트렌토의 주요 수호성인이 성 비길리우스(또는 비질리오)이다. 로마족인 그는 트렌토에서 태어났고, 아테네(Athenae)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385년에 트렌토의 주교가 되었는데, 밀라노(Milano) 대주교이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남아 있다.

이 편지에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적었고, 또 순례에 관한 의견도 나온다. 또 성 시시니우스(Sisinius)와 성 마르티리우스(Martyrius) 그리고 성 알렉산데르(Alexander)의 순교록을 적었다. 그는 렌데나 계곡으로 선교하던 중 사투른 신상을 파괴하여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살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alv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68년

 

 

살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살비우스, 소브, 쌀비오, 쌀비우스.

 

 

살비오 자료

768년경 소브(Sauve)로도 불리는 성 살비우스(또는 살비오) 주교가 제자 한 명을 대동하고 발랑시엔 지방에 도착하였다. 자세한 활동은 알 수 없으나 그는 뛰어난 선교사였으며,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성당에서 행한 설교로 말미암아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와 그의 제자는 그곳 행정관의 아들 손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제자의 이름은 수페리오(Superius) 혹은 수페로라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수페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up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68년

 

 

수페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수뻬로, 수뻬리오, 수뻬리우스, 수페로, 수페리우스.

 

 

수페리오 자료

768년경 소브(Sauve)로도 불리는 성 살비우스(Salvius) 주교가 제자 한 명을 대동하고 발랑시엔 지방에 도착하였다. 자세한 활동은 알 수 없으나 그는 뛰어난 선교사였으며,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성당에서 행한 설교로 말미암아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와 그의 제자는 그곳 행정관의 아들 손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제자의 이름은 수페리우스(혹은 수페리오) 혹은 수페로라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안텔모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el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07-1178년 벨리

 

 

안텔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뗄모, 안뗄무스, 안텔무스.

 

 

안텔모 자료

사부아(Savoie)의 샹베리 근교 시냉 성에서 출생한 성 안텔무스(Anthelmus, 또는 안텔모)는 교구사제가 된 후 1137년에 카르투지오회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랑드 샤르트뢰즈(Grande Chartreuse)로 파견되었다가 1139년에 제7대 원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그곳을 카르투지오회의 모원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카르투지오회의 제1차 총회를 소집하였으며, 복자 요한 스파니아드로 하여금 수도회의 회칙에 따라 살려는 여성들을 위하여 회헌을 마련토록 하였다. 1152년까지 총장직에 봉직하다가 은수자로 살았으나, 1154년부터 다시 2년 동안 포르트의 원장을 맡아야만 하였다.

그랑드 샤르트뢰즈로 돌아온 안텔무스는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후원을 받는 대립교황 빅토르 4세(Victor IV)에 대항하여 싸우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을 위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안텔무스는 1163년에 벨리의 주교로 임명되자 교구 개혁을 광범위하게 착수하였으며, 성직자의 독신제를 강화하고 잘못한 이들을 징계하였다. 훔베르투스에 의해 투옥된 어느 사제가 살해되자 그는 훔베르투스 3세를 파문하였다.

그는 또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도록 교황청의 영국사절로 임명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가지 못하였다. 그는 만년에 나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다가 1178년 6월 26일에 운명하였다. 그의 임종 때 훔베르투스가 찾아와 서로 화해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한 (궁중시종,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궁중시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경

 

 

요한 (궁중시종,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궁중시종, 순교자)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요한(Joannes)과 성 바오로(Paulus)는 형제간으로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딸인 동정녀 콘스탄티아(Constantia)의 시종이었다. 나중에 그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중 로마의 첼리오(Celio) 언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순교를 기록한 행적에 따르면,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말살하고 로마의 신들에 대한 우상 숭배를 재건하기 위해 대박해를 시작했을 때, 콘스탄티아의 시종으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성 요한과 성 바오로 형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배교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들이 용감히 신앙을 지키며 대항하자 시민들 앞에서 공공연히 참수하지 못하고, 첼리오 언덕에 있는 그들의 별장에서 테렌티아누스(Terentianus)를 시켜 비밀리에 참수형에 처했다. 그들의 시신은 크리스푸스(Crispus)와 크리스피니아누스(Crispinianus) 그리고 베네딕타(Benedicta)라는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그들이 순교한 곳에 안장되었고, 이들 세 명의 신자들 또한 참수되어 그 옆에 묻혔다. 그리고 성 요한과 성 바오로가 순교한 별장 위에 그들에게 봉헌된 성당이 세워졌다.

4세기 중엽 로마 원로원 의원인 비잔티우스(Byzantius)와 그의 아들인 성 팜마키우스(Pammachius, 8월 30일)는 첼리오 언덕에 있는 순교자 성 요한과 성 바오로가 묻힌 별장 위에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성당을 건립했다. 그 성당은 비잔티우스 또는 팜마키우스 대성당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이미 5세기 초부터 로마 사람들의 순례와 공경의 대상이 된 가장 중요한 무덤 성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외적의 침략과 지진 등으로 파괴된 대성당은 수차례의 복원과 증축 과정을 거쳤고, 19세기 말 대성당 밑을 발굴했을 때 두 순교자가 묻힌 옛 저택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들이 묻힌 방에는 성 요한과 성 바오로의 순교와 관련된 내용 및 그리스도교적 주제를 담고 있는 고대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성 팜마키우스에 의해 대성당이 건립된 후 두 성인은 더욱 큰 공경을 받았고, 로마 전문(Canon, 오늘날 미사 경본의 감사기도 제1양식)에도 그 이름이 추가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요한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00년경

 

 

요한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주교) 자료

고트족(Goths) 사람인 성 요한(Joannes)은 동방교회 안에서 성상 파괴주의자의 강력한 반대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는 흑해 지역 출신으로 그 당시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코프니무스가 성상 파괴를 명하는 칙서를 내리자, 그는 성상을 공경하는 이유를 들어가며 공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의 논리는 구약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지극히 타당성이 있었고 또 호응도가 높았다.

그는 787년의 니케아(Nicaea) 제2차 회의에 참석하여 성상 공경에 대한 가톨릭 교리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는 카자르인의 습격을 받고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소아시아의 아마스트리스에서 숨어 지내다가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펠라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elag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12년경-925/6년 코르도바

 

 

펠라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뻴라요, 뻴라지오, 뻴라지우스, 펠라기오, 펠라기우스, 펠라요, 펠라지우스.

 

 

펠라지오 자료

성 펠라기우스(또는 펠라지오)는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를 선언한 압드 알 라흐만 3세(Abd-ar-Rahman III)가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때, 코르도바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다가 무어인들의 손에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10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인질로 잡힌 그는 감옥에서 3년을 지내야 했다.

13세의 소년이 된 성 펠라기우스는 관리들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는 한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혹과 회유를 당했다. 관리들은 어린 소년에게 돈과 좋은 옷을 주고 훌륭한 말을 타게 해주며, 단지 배교하고 무함마드(Muhammad)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면 그 모든 것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성 펠라기우스는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며 끝까지 버티었다.

회유에 실패한 박해자들은 위협하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 또한 효과가 없었다.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팔이 잘리는 등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코르도바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불쌍한 소년의 잘린 팔을 수습해 순교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으로 보존했다.

그의 유해는 967년 레온(Leon)의 한 수도원에 모셨다가, 984년에서 999년 사이에 에스파냐 서북부에 있는 오비에도(Oviedo)의 성 펠라기우스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많은 성당과 도시들이 성 펠라요(San Pelayo)로도 불리는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거나 명명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maria Escriv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902-1975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라게르, 에스끄리바, 요셉마리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자료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02년 1월 9일 에스파냐의 바르바스트로(Barbastro)에서 아버지 호세 에스크리바(Jose Escriva)와 어머니 마리아 돌로레스 알바스(Maria Dolores Albas)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그 해 1월 13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굳건한 신앙과 그리스도인다운 덕행, 잦은 고해성사와 영성체, 기도를 향한 굳은 의지,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기초한 삶의 모범을 통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활기차고 건강하며 정직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든지 마음을 열고 모든 근심걱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호세마리아를 격려해 주었고, 항상 그의 질문에 애정을 갖고 다정하게 응답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세 명의 누이동생이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고, 소규모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에 따른 재정적인 문제로 1915년 그의 가족은 인근 마을인 로그로뇨(Logrono)로 이주하였다.

1917-1918년 겨울에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어떤 일을 경험했다. 그 해 성탄절에 로그로뇨에는 많은 눈이 내렸는데, 어느 날 그는 눈 위에 얼어붙은 발자국을 보았다. 그것은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자들이 남긴 것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호세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에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으로, 그는 어렴풋이나마 가장 위대한 사랑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사제가 되려는 결심을 했고,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로그로뇨의 신학교에서 사제직을 위한 과정을 시작했고, 1920년 사라고사(Saragossa)에 있는 교황청립 신학대학에 들어가 사제품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제의와 장상의 허락으로 사라고사의 대학에서 시민법도 함께 전공하였다. 

그의 관대하고 활기 있는 성품과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정직하고 침착한 성격은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경건한 생활은 동료들에게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적 열정 또한 동료 신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2년, 20살의 나이에 사라고사의 대주교에 의해 신학교의 감독 또는 학사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보냈고, 이는 그의 영성생활이 성체성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매일같이 필라르(Pilar)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찾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성모님께 전구하였다.

1924년 11월 27일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했고, 그해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3월 28일 사라고사의 성 카롤루스 신학교 성당에서 디아스 고마라(Diaz Gomar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틀 후 그는 필라르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경당에서 첫 번째 장엄미사를 집전하였고, 3월 31일에는 보좌신부로 발령받은 교구의 작은 시골마을인 페르디게라(Perdiguera)로 이동하였다. 

1927년 4월 그의 대주교의 승인을 받고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마드리드(Madrid)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이 학위는 에스파냐 수도에 있는 중앙 대학에 의해서만 주어졌었다. 마드리드에서 그의 사도적 열정은 그를 다양한 계층의 학생, 예술가, 노동자, 학자, 사제들과의 만남에로 인도했고, 많은 시간을 어린이들과 도시 외곽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내게 했다. 동시에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법률을 가르치며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도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일상적이거나 비범한 분야 모두에서 풍부한 은총을 주셨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1928년 10월 2일 마드리드에서 피정을 하던 호세마리아 신부는 지난 몇 해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내적인 움직임을 기록했고, 그러면서 어렴풋이 알던 자신의 소명을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오푸스 데이’(Opus Dei, 하느님의 사업이란 뜻)라는 재속 수도회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교회 안에서 새로운 소명의 길을 열어주셨고, 그것은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노동을 성화함으로써 사도직의 거룩함과 실천에 응답하도록 전파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몇 달 후인 1930년 2월 14일 하느님께서는 또한 오푸스 데이가 여성들 안에서도 전파될 수 있도록 그를 일깨워주셨다.

그 순간 이후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남녀들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도록 양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을 혁신가나 개혁가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압도되고 교회에 지속적인 활력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 쇄신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푸스 데이의 존재 이유라고 보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러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 안에 모든 이에게 봉사할 수 있는 진정한 결심을 굳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세상의 지식과 문화가 사회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한 열쇠가 됨을 깨달은 그는 1933년 대학 안에 ‘DYA 아카데미’라는 센터를 열고 이듬해 사회 복음화를 위해 ‘영성적 고려’라는 책을 처음 발간했으며, 그 이후 372권의 책을 더 출판하였다.

이렇게 오푸스 데이가 그 첫 걸음을 내디디는 동안 1936년에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했다. 마드리드에서도 심각한 종교 박해가 일어났지만 호세마리아는 기도와 인내 그리고 사도적 열정으로 이에 맞서 나갔다. 이 시기는 교회에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영성과 사도직이 성장하고 희망이 빛을 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39년 내전이 끝나자 그는 에스파냐 반도 전역에서 사도직 활동에 대한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는 많은 대학생들과 함께 사회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를 모셔다주며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깨닫도록 해주었다. 

특히 내전으로 인해 야기된 에스파냐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용서와 사랑, 평화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주교들이 교구의 성직자와 평신도들 위해 그의 강의를 청했고, 수도회 장상들 역시 그러했다. 그는 1941년 에스파냐 동북부 레리다(Lerida)에서 사제들을 위한 피정 강의를 하던 도중 오푸스 데이의 사도직 안에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어머니의 선종 소식을 듣기도 했다.

1943년 그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교구사제들의 삶에 육화시키기 위한 성 십자가의 사제회(Priestly Society of the Holy Cross)를 오푸스 데이 안에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1944년 6월 25일 세 명의 기술자가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인 알바로 델 포르틸로(Alvaro del Portillo)는 설립자를 계승하여 오푸스 데이의 대표가 되었다. 

성 십자가의 사제회는 교구사제와 사제직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영성적 형성과 활동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사목자들과 조화를 이루었고, 교구사제로 머물며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실천하는 성 십자가의 사제회에 참여하는 교구사제들은 더욱 많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호세마리아는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보편교회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의 사도직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6년 그는 오푸스 데이에 대한 교황청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로 본부를 옮겼고, 1947년 2월 2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데크레툼 라우디스’(decretum laudis, 특별법)에 의거해 가승인을 받았으며, 3년 후인 1950년 6월 16일 교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 교황청 직속 재속 수도회가 되었다. 

이로써 자신의 노동과 자선 그리고 기도로써 오푸스 데이의 사도적 활동에 동참할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 비가톨릭 신자와 심지어 비그리스도인까지도 오푸스 데이의 협력자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호세마리아 신부는 오푸스 데이 본부를 로마에 안착시킨 후 교회가 원하는 곳에서 봉사하며 사도좌와 교계제도에 더욱 일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건강상의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전 세계로 사도직 활동을 확장했고, 이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증인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행하는 것이 참된 덕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위대할수록 세상은 작아지기 마련이다. 세상 모든 곳에서 주교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의 사도직 안에서 복음화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이 흘러넘치도록 하려는 그의 소망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시행되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 농업 종사자를 위한 학교, 대학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병원과 의료센터 등 그의 활동은 종종 끝도 없는 바다와도 비교되었다.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을 발표했을 때 호세마리아는 이 공의회가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의 심의 결과로서 교회의 교도권은 거룩함에로의 보편적 부르심, 거룩함과 사도직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전문적인 일, 현세의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가치와 합당한 제한, 내적 생활의 중심이자 기초로서의 거룩한 미사 등 오푸스 데이 정신의 기초적인 측면들을 확인했다. 

호세마리아는 공의회의 자문위원으로서 수많은 교부와 전문가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공의회에서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오푸스 데이의 활동을 통해 공의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공의회의 정신을 촉진하도록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그는 조직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일상생활을 통해 성성(聖性)을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깊은 내면의 생활을 위해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모든 것은 기도가 되고 또한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때문이다. 

즉 모든 종류의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기도가 되고 사도직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호세마리아가 생각한 사도직의 기초는 세상 한가운데서 얻은 그의 내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기도와 성사로써 자라나고 성체성사를 위한 강렬한 사랑으로서 표현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많은 일정을 수행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단순하고 친밀한 목소리로 하느님과 성사, 그리스도인의 헌신, 노동의 신성함, 그리고 교회와 교황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1975년 6월 26일 정오 호세마리아는 작업실에서 심장 발작으로 선종했다. 그 당시 오푸스 데이는 이미 모든 대륙에 전파되었고, 80개 나라에서 6만여 명이 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선종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교황에게 그의 시복시성을 청했고, 1981년 심사가 시작되었다. 1992년 5월 1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서 그의 시복식을 거행했고, 2002년 10월 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교황은 30만 명이 운집한 시성식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상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새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이 알바스(Josemaria Escriva de Balaguer y Alba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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