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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남자세례명 11가지

피어나네 2023. 6.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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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라디슬라오, 벤베누토, 삼손, 아넥토, 아리알도, 요한, 제오르지오 므타스민델리, 조일로, 치릴로, 크레센스, 페르디난도, 총 1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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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2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6월 2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라디슬라오

  2. 벤베누토

  3. 삼손

  4. 아넥토

  5. 아리알도

  6. 요한

  7. 제오르지오 므타스민델리

  8. 조일로

  9. 치릴로

  10. 크레센스

  11. 페르디난도

 

6월 2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1. 라디슬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adisla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 활동 연도와 지역
    1040-1095년 헝가리

 

 

라디슬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디슬라우스, 라슬로.

 

 

라디슬라오 자료

성 라디슬라우스(또는 라디슬라오)는 후에 헝가리의 왕이 된 벨라 1세(Bela I)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사촌들의 핍박을 피해 폴란드에 가서 잠시 머물 때 태어났다. 벨라 1세는 1048년경에 헝가리로 돌아와서 형인 언드라시 1세(Andras I)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아르파드 왕가의 왕위에 올랐다.

1063년 벨라 1세가 사망한 후 왕위는 언드라시 1세의 아들인 셜러몬(Salamon)이 이어받았고, 1074년 다시 벨라 1세의 첫째 아들인 게저 1세(Geza I)가 계승했다. 성 라디슬라우스는 1077년 형이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형인 게저 1세에게 밀려난 셜러몬과 그의 추종 세력들로부터 퇴위 요구를 받기도 했지만, 이를 무사히 넘기고 왕권을 안정시켰다.

그는 1078년경 슈바벤(Swabia)의 공작 라인펠덴(Rheinfelden)의 루돌프(Rudolf)의 딸인 애들레이드(Adelaide)와 결혼하였다. 국가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그는 우선적으로 유목민 시절의 풍습에 기초한 법들을 개정해 그리스도교 국가의 이념에 맞는 법들로 정비하여 새롭게 법전을 편찬했다. 그는 또한 헝가리의 국가 영웅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왕이다.

1091년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을 정복해 헝가리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한 위대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 정복한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고 이교도의 개종을 돕기 위해 자그레브(Zagreb)에 주교좌성당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출전에 앞서 체코 정복을 위한 전쟁에 나갔다가 1095년 7월 29일 헝가리와 보헤미아(Bohemia)의 국경지대에 있는 니트라(Nitra, 현재 슬로바키아 서부의 도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라디슬라우스는 통치자로서 헝가리를 안정시킨 왕일 뿐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며 덕행을 쌓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헝가리 내에 여러 교구를 신설하고 많은 성당을 세우며 교계제도를 재정비해 교회에 대한 왕권의 영향력을 키우기도 했다. 그는 왕국 내 이교도들의 개종에 큰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유다교와 이슬람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베풀며 화합을 도모하는 관대함도 보였다.

성 라디슬라우스는 헝가리의 성왕(聖王)으로 칭송받는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를 거울삼아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하여 헝가리의 가톨릭교회 발전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선종 직후부터 사람들로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선종 후 쇼모지(Somogy)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1106년 그가 건립한 너지바러드(Nagyvarad) 대성당으로 이장해 안장되었다. 너지바러드는 오늘날 헝가리 국경 부근 루마니아 영토에 속한 오라데아(Oradea)이다. 1192년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성 라디슬라우스는 헝가리와 헝가리 군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벤베누토

 

  • 가톨릭 성인 이름
    Benvenut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32년 구비오

 

 

벤베누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벤베누또, 벤베누뚜스, 벤베누투스.

 

 

벤베누토 자료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구비오 태생인 벤베누투스(Benvenutus, 또는 벤베누토)는 맹세한 군인이었으나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프란치스코회의 영향이 미치자 그 역시 회원이 되었다. 

그가 수도회에 입회한 날부터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할 만큼 그는 단순하였다. 자신의 요청에 따라 나환자들을 돌보게 되자, 그는 그들을 우리 주님 당신으로 생각하고 상처를 싸매고 몸을 씻겨주었다. 항상 예모 있게 처신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그의 사랑이 이토록 지극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자신이 여러 병으로 늘 고생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온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였고, 미사 때에는 자주 아름다운 아기 예수의 환시를 보았으며, 자신도 모르게 끌어안으려고 팔을 내밀었다고 전해온다.

이처럼 단순한 그의 생활은 즉시 온 세상에 두루 퍼졌으며, 1232년에 풀리아(Puglia)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사망이 있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서 베네치아(Venazia)와 아말피의 주교들로부터 그의 공경이 허락되었으며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삼손

 

  • 가톨릭 성인 이름
    Sams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530년

 

 

삼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삼손 자료

성 삼손 세노도키우스(Samson Xenodochius, 또는 삼손 세노도치오)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유명한 시민으로 의학을 공부하였고 자신의 삶을 병들고 가난한 이들의 영성적, 육체적 보호에 헌신하고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산타 소피아(Santa Sophia) 근처에 좋은 시설을 갖춘 대형 병원을 설립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넥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nec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아넥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넥또, 아넥뚜스, 아넥투스.

 

 

아넥토 자료

성 아넥투스(또는 아넥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바로니우스(Baronius)는 로마 순교록을 정리하면서 그의 순교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리알도

 

  • 가톨릭 성인 이름
    Arial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66년 밀라노

 

 

아리알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리알두스.

 

 

아리알도 자료

성 아리알두스(또는 아리알도) 부제는 당대 주로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행해진 성직매매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요 개혁운동의 대표자로 알려졌다. 그로 인해 그는 파문되는 등 갖은 박해를 받다가 성직매매를 행한 밀라노의 대주교에 의해 살해되어 호수에 던져졌다.

그의 시신은 10개월 후 발견되었는데, 부패하지도 않았고 감미로운 향기가 났다. 그 후 그의 유해는 밀라노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고, 1067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에 의해 순교자로 선포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4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시농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에 의하면 성 요한(Joannes)은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출신의 이방인으로서 투렌(Touraine) 지방의 시농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의 성 막시무스(Maximus) 성당과 가까운 곳에 작은 방과 기도실을 만들고 운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교제를 삼가고 약간의 월계수를 심은 정원을 돌보며 그곳에 앉아 독서와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성녀 라데군다(Radegundis, 8월 13일) 왕후의 영적 조언자였다. 그는 사망한 후 자신의 작은 방에 묻혔고, 많은 순례자들이 그의 전구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제오르지오 므타스민델리

 

  • 가톨릭 성인 이름
    George Mtasmindel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14-1066년

 

 

제오르지오 므타스민델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오르그, 게오르기오, 게오르기우스, 제오르지우스, 조지, 호르헤.

 

 

제오르지오 므타스민델리 자료

성 게오르기우스 므타스민델리(Georgius Mtasmindeli, 또는 제오르지오)는 흔히 ‘블랙 마운틴의 조지’로 불린다. 젊었을 때 그는 유명한 은수자 힐라리온의 제자가 되어 시리아의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성 에우티미우스(Euthymius)에 의하면 그는 성서 번역 사업을 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는 방랑생활을 더 많이 하면서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성지들을 두루 다녔고, 아토스 산(Mount Athos) 수도원의 원장도 역임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조일로

 

  • 가톨릭 성인 이름
    Zo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코르도바

 

 

조일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조일루스.

 

 

조일로 자료

성 조일루스(또는 조일로)와 약 스무 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순교했다. 성 조일루스는 지방 귀족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모범적 신자로 성장했다.

재판관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를 배교시키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유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젊은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사형 집행관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없도록 이교도들 가운데 묻도록 했다.

그의 유해는 7세기 초 코르도바의 주교에 의해 기적으로 발견되어 수도원에 모셔졌고, 후에 그의 이름으로 봉헌된 팔렌시아(Palencia) 지방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와 코르도바 인근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시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는 4세기에 성 아키스클루스(Acisclus, 11월 17일)과 성 조일루스를 찬미하는 시를 지어 그들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치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 활동 연도와 지역
    380?-444년 알렉산드리아

 

 

치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치릴로 자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삼촌인 테오필루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인 삼촌을 수행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isostomus, 9월 13일)를 단죄한 퀘르키아(Quercia) 주교 회의에 참석했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삼촌을 계승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삼촌보다 더 뛰어난 신학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경쟁자였던 티모테우스(Timotheus)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재개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던 유다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관여했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오레스테스 총독 또한 그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성 키릴루스는 세속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며 유다인들 문제에서 손을 뗐다.

성 키릴루스는 신학적으로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노선을 따르며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였다.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그는 430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분쟁에 휘말렸다.

네스토리우스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동일하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즉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이단에 빠지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성 키릴루스는 강론과 서한을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430년 8월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교황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성 키릴루스도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는 교황이 아닌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성 키릴루스를 이단으로 고소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황제의 신임을 믿고 고소했지만, 황제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주교 회의를 소집했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431년의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이다.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는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에페수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 요한 1세(Joannes I)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 세력을 단죄함으로써 성 키릴루스의 승리로 끝났다.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유배되었고, 이런 과정을 겪으며 그리스도론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리가 확고히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인 433년에 성 키릴루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화해를 이루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의한 대로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했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하며 인간 예수와 동일함을 인정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성 키릴루스는 이러한 결의와 합의를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고,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신학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이단이 사라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후로도 성 키릴루스는 모든 생애를 바쳐 이단 척결을 위해 사목적, 학문적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의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지속해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관한 여러 주석서와 많은 교의 신학 논문을 비롯해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에 대한 반박문과 편지 그리고 다양한 강론들이 전해져 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6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크레센스

 

  • 가톨릭 성인 이름
    Crescen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바오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크레센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스겐스, 끄레쎈스, 크레셴스, 크레스켄스, 크레쎈스.

 

 

크레센스 자료

성 크레스켄스(또는 크레센스)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제자로서 디모테오 2서 4장 10절에 갈라티아(Galatia)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는 갈라티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교회 전승은 그의 프랑스에서의 사도직 활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독일 마인츠(Mainz)의 주교좌를 신설했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은 그가 동방으로 돌아와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했다고 추가하였다. 그런데 교회 전승에 약간의 혼동이 있는데, 사도 바오로의 제자인 성 크레스켄스가 프랑스 비엔(Vienne)의 초대주교인 것은 확실하나 독일 마인츠에서 활동한 크레스켄스는 그가 참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의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페르디난도

 

  • 가톨릭 성인 이름
    Ferdinan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3세기 아라곤

 

 

페르디난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페르디난두스, 페르디난드.

 

 

페르디난도 자료

에스파냐 아라곤의 왕실 가문과 친척 관계인 성 페르디난두스(Ferdinandus, 또는 페르디난도)는 양시칠리아 왕국(the Two Sicilies)의 통치자가 되었고 이어 왕국 내 카자초(Cajazzo)의 제5대 주교가 되었다. 그의 유해는 시칠리아 섬의 코르넬로(Cornello)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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