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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남자세례명 12가지

피어나네 2023. 9.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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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네오트, 데모크리토, 디오니시오, 세쿤도, 에버라드 한스, 요한 콜롬비니,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이냐시오, 제르마노, 칼리메리오, 파비오, 피르모, 총 1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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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여자세례명 헬레나,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3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7월 3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네오트

  2. 데모크리토

  3. 디오니시오

  4. 세쿤도

  5. 에버라드 한스

  6. 요한 콜롬비니

  7.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8. 이냐시오

  9. 제르마노

  10. 칼리메리오

  11. 파비오

  12. 피르모

 

7월 3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 네오트

 

  • 가톨릭 성인 이름
    Neo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콘월

 

 

네오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오뜨, 네옷트.

 

 

네오트 자료

네오트 성인은 영국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콘월 지방에서 공경을 받는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글라스톤버리의 수도자로 살다가 콘월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는 생존시에도 이미 성인으로 공경받았으며, 그의 유해는 아이네스베리(Eynesbury)의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앨프레드(Alfred) 대왕과 가까운 사이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데모크리토

 

  • 가톨릭 성인 이름
    Democri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데모크리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모끄리또, 데모끄리뚜스, 데모크리또, 데모크리뚜스, 데모크리투스.

 

 

데모크리토 자료

성 데모크리투스(또는 데모크리토)와 성 세쿤두스(Secundus) 그리고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 혹은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디오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자료

성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성 세쿤두스(Secundus) 그리고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 혹은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세쿤도

 

  • 가톨릭 성인 이름
    Secun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세쿤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군도, 세꾼도, 세꾼두스, 세쿤두스.

 

 

세쿤도 자료

성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성 세쿤두스(또는 세쿤도) 그리고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 혹은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에버라드 한스

 

  • 가톨릭 성인 이름
    Everard Hans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1년 영국

 

 

에버라드 한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벨라두스, 에버라트, 에벨라도, 핸스.

 

 

에버라드 한스 자료

에버라드 한스는 영국 잉글랜드 노샘프턴셔(Northamptonshire)의 어느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선교사가 되어 가장 훌륭한 삶을 전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대중 설교자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579년에 가톨릭 사제가 되어 프랑스의 랭스(Reims)에서 영국 선교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돌아온 동생 윌리엄(William) 신부의 호소에도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 중병을 앓게 되고 자신의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그의 마음 안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편으로 그는 동생이 보여주는 뛰어난 모범과 말씀에 차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침내 스스로 자신의 고집을 꺾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영국 국교회를 떠나고 건강도 완전히 회복한 그는 1580년 랭스로 가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1년 정도 공부했는데, 특히 윤리신학에 뛰어난 적성을 보였다.

그는 1581년 3월 25일 사제품을 받고 한 달 만에 다른 사제와 함께 영국 선교를 위해 출발했다. 하지만 겨우 3개월 정도 선교활동을 하다가 7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런던(London)의 서더크(Southwark)에 있는 왕실 재판소 관할 감옥인 마셜시(Marshalsea)에 갇힌 가톨릭 신자를 방문했는데, 그가 신은 신발이 외국에서 만든 것임을 알아본 경비병의 추궁 끝에 가톨릭 사제임이 발각되어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다.

그는 재판 중 교황의 권위에 관한 질문에 “백 년 전이나 지금이 같다.”라고 대답했고,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에 대한 충성 맹세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그는 동생 신부에게 편지를 썼는데,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말이 가장 돋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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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모를 기억하고, 자신이 빚진 돈을 갚아 주며 또 빌린 책을 돌려주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는 1581년 7월 31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 행복한 날이여!”였다고 한다.

에버라드 한스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7월 31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에버라드 한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요한 콜롬비니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Colombin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증거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0-1367년

 

 

요한 콜롬비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콜룸비니, 한스, 후안.

 

 

요한 콜롬비니 자료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 출신인 요한 콜롬비니(Joannes Colombini)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으로 비아지야 체레티니와 결혼하였다. 그는 어느 성인전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자신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고,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하였으며 자기 집을 병원으로 꾸몄다.

아내를 위하여 약간의 배려를 해 준 뒤 그는 절대 가난과 회개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병원에서 병들고 가난한 이를 전적으로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들이 그를 존경하며 추종자들로 몰려들게 되자 시에나에서 잠적해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이리하여 그의 수많은 제자들은 예수 성명에 대한 특별한 신심 때문에 ‘예수아티’(Gesuati)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프라티첼리의 오류를 보전하는 임무를 위하여 조사할 때부터 교황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는 예수아티를 수도회로 인정하였고,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환자들을 돌보는 평수사회인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사도적 성직회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얼마 후 요한은 볼세나 호수에서 병을 얻어 시에나로 돌아오는 길에 운명하였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 가톨릭 성인 이름
    Justin de Jacob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0-1860년 에티오피아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자료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Justinus de Jacobis, 또는 유스티노)는 이탈리아 루치아나의 산 펠레(San Fele)에서 17명의 자녀 가운데 14번째 아들로 태어나 나폴리(Napoli)에서 성장하였다.

1818년 선교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1824년 6월 12일 브린디시(Brindisi)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선교단(빈첸시오회)의 일원으로 1839년에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2명의 동료 사제와 함께 그는 서서히 그 지방의 문화를 익히며 주민들의 친구도 되고 종도 되면서 온갖 장애들을 극복하며 선교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활동은 주민들의 무지와 중상모략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위하여 방인 사제 양성에 주력하여 3명의 방인 사제를 배출하고 자신은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주 대중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1853년경 에티오피아의 교세는 20명의 방인 사제와 5천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곤다르(Gondar)에서 체포되어 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재차 입국에 성공하였으나 또 다시 감옥에 갇혔고,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1860년 7월 31일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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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교회의 재건자였던 그는 193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5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이냐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Ign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91-1556년 로욜라

 

 

이냐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이냐시오 자료

성 이냐시오(또는 이그나티우스)는 1491년에 에스파냐 북부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城)에서 아버지 벨트란 야네즈 데 오냐즈 이 로욜라(Beltran Yanez de Onaz y Loyola)와 어머니 마리나 사에즈 데 리코나 이 발다(Marina Saez de Licona y Balda)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나(Ona)의 성 에네쿠스(Enecus, 6월 1일)의 에스파냐 이름인 이니고(Inigo)로 세례를 받았는데, 언제부터 라틴어로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이자 친척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Juan Velazquez de Cuellar)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후안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뒤인 1517년에 성 이냐시오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전투 중에 다리 부상을 당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욜라 성에 있는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한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 환시를 통해 그는 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세속적인 욕망을 따르던 지난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 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을 체험한 후 로욜라를 떠난 성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묵상에 몰입하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실천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 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그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그 당시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의 삶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나서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정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고, 1526년에는 알칼라(Alcala) 대학에서, 1527년에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에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 나바라(Navarra)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성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발로 다니기 등으로 자신을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소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했다. 그런데 성 이냐시오는 건강이 악화하여 1535년 봄에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했다.

그 후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와 모였지만,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인해 갈 수가 없었다. 성 이냐시오는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성 이냐시오는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 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성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성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 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에 힘쓰고,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한 성당에 안치했다가 1568년 기존의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건축한 예수회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그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 등과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1922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피정과 영성 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제르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erm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78?-448년 오세르

 

 

제르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르마노, 게르마누스, 제르마누스, 젤마노.

 

 

제르마노 자료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378년경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 있는 오세르의 좋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갈리아(Gallia)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로마(Roma)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여 로마 시의 변호사가 되었다.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는 6명의 고위 관리 중 하나로 임명받아 지방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그 후 내적 회개를 체험한 성 게르마누스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제가 되었다. 이때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 3월 17일)를 가르쳤다.

오세르의 주교였던 성 아마토르(Amator, 5월 1일)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그가 사망하자 즉시 선출되어 418년 7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이때 그는 로마에서 결혼한 부인 에우스타키아와 헤어져 엄격한 고행 생활을 하며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투르(Tours)의 주교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와 더불어 갈리아에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모범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자 성 게르마누스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 가난한 이들을 돕고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또한 아를(Arles)의 성 힐라리우스(Hilarius, 5월 5일) 주교와도 친분을 갖고 그를 도와주었다.

이 당시 영국에는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가 퍼져 교회가 동요하고 있었다. 영국 주교들이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는 429년 성 게르마누스에게 영국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후에 성녀가 된 어린 시절의 제노베파(Genovefa, 1월 3일)를 만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의 이단들을 평정하고, 영국 군대로 하여금 픽트족과 색슨족의 연합 공격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승리는 ‘알렐루야 승리’라고 기록되었다.

오세르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성 알바누스(Albanus) 무덤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렸다. 448년 갈리아로 돌아온 그는 혼란한 교구의 일을 수습하고, 훈족의 침입과 불안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를 중재하고자 애쓰다가 그해 7월 31일 라벤나(Ravenna)에서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오세르로 옮겨져 큰 공경을 받았고,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의 유해가 859년 성당으로 모셔졌으나 1567년 위그노들에 의해 하나도 남지 않고 훼손되었다.

성 게르마누스는 여러 세기 동안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 다음으로 가장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프랑스 성인이다. 말과 행동과 기적의 능력이 뛰어난 성인으로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은 그를 일컬어 ‘갈리아의 기적의 게르마누스’라고 불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칼리메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lim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0년 밀라노

 

 

칼리메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리메리오, 갈리메리우스, 깔리메리오, 깔리메리우스, 칼리메리우스.

 

 

칼리메리오 자료

그리스 태생의 성 칼리메리우스(또는 칼리메리오)는 교황 성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 1월 5일)에 의해 이탈리아 로마(Roma)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밀라노의 주교가 되어 북이탈리아 포(Po) 강 주변 계곡을 복음화하였다. 그는 콤모두스 황제 때 깊은 우물에 거꾸로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가 사목하던 밀라노 성당 제단 아래 묻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파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ab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년 모리타니

 

 

파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파비우스.

 

 

파비오 자료

성 파비우스(또는 파비오)는 로마의 군인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동안에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연안 모리타니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우상의 상징물을 지참하는 것을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피르모

 

  • 가톨릭 성인 이름
    Fir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타가스테

 

 

피르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피르무스.

 

 

피르모 자료

히포(Hippo)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성 피르무스(또는 피르모)가 그의 이름 때문에 굳건한(firm)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굳건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신자들의 은신처를 누설하지 않고 가장 끔찍한 고문을 견디어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찬사로 인해 바로니우스(Baronius)는 성 피르무스에 대한 현존하는 전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순교록에 그의 이름을 삽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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