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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남자세례명 5가지

피어나네 2023. 9.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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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심플리치아노, 아르눌포, 알리피오, 타르시치오, 총 5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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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여자세례명 마리 스텔라, 마리아, 스텔라, 아숨타,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1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5가지

 

 

 

 

8월 1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2. 심플리치아노

  3. 아르눌포

  4. 알리피오

  5. 타르시치오

 

8월 1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5가지

 

 

1.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 가톨릭 성인 이름
    Stanislaus Kostk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신비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550-1568년 폴란드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꼬스뜨까, 스따니수아프, 스따니스와프, 스따니슬라오, 스따니슬라우스, 스타니수아프,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슬라우스.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자료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또는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는 1550년 10월 28일 폴란드 중동부 로스트코보(Rostkowo)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국의 의회 의원이자 자크로짐(Zakroczym)의 성주였고, 어머니 또한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는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와 그의 형 파벨(Pawel, Paulus)의 교육을 중요시했고, 특히 가톨릭 신앙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14살이던 1564년에 형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며 성녀 바르바라회(St. Barbara Sodality)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등 신앙심과 신심 행위에서 주위 학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학교 기숙사 건물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생겨 인근의 한 정부 인사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신심 깊은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는 가능한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만남을 피하고 공부와 기도에 전념하며 고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반면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을 지닌 그의 형 파벨은 동생을 이해하기보다는 ‘예수회원’이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며 조롱하거나 질투하고 심지어는 괴롭히기까지 했다. 

1565년 12월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가 갑자기 고열로 앓아눕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병색이 깊어 회복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형에게 마지막으로 노자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사제를 불러달라고 했지만, 형은 그의 병이 위중하지 않다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이는 루터교 신자인 집주인이 가톨릭 사제의 방문을 싫어할까 봐 염려해서 그랬던 것이었다. 결국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는 죽기 전에 꼭 성체를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성녀 바르바라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녀 바르바라가 두 천사와 함께 그에게 직접 나타나 성체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어서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이 발현해 그가 예수회원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여러 번의 환시를 경험하고 회복된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무렵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는 예수회에 입회해 예수회원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예수회의 오스트리아 관구장을 만나 입회를 요청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등의 이유로 부모의 허락을 먼저 받아오라는 말과 함께 거절당했다. 

그는 부모의 허락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회 독일 관구가 있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 가서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12월 21일) 관구장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1567년 8월 10일 몰래 학교를 빠져나온 그는 빈 외곽에 이르자 순례자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했다. 무사히 형의 추적을 따돌린 그는 72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가 딜링엔(Dillingen)에 있다는 말을 듣고 며칠을 더 걸어 그곳에 도착해 입회를 청했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그가 비록 17살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착실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반해 입회를 허락했다. 그는 잠시 딜링엔에 머물다가 다른 두 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있는 예수회 수련소로 떠났다.

1567년 10월 25일 로마에 도착한 그는 마침내 예수회의 수련자로 받아들여졌다. 그 뒤로 그는 더욱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며 수련 기간을 보냈다.

그는 미사 중에 자주 탈혼을 경험하는 등 거룩한 삶을 살다가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걸려 예수회 수련자로서 단지 10개월 정도 지낸 1568년 8월 14일 노자성체를 모시고 다음 날 새벽, 자신이 예언한 대로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수련소 옆 예수회 성당에 묻혔다가, 나중에 로마의 퀴리날레(Quirinale) 언덕에 있는 예수회의 성 안드레아 성당 제대 밑으로 옮겨졌다.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로마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그는 1605년 10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31일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서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교회 전통대로 선종한 날인 8월 15일에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8월 15일에 그를 기념하고 있다. 다만 예수회에서는 그의 축일이 매년 성모 승천 대축일과 겹치는 관계로 11월 13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천사에게 성체를 받아 모시거나 동정 마리아의 손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예수회 수련자와 폴란드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그는 폴란드 말로는 스타니스와프 코스트카(Stanislaw Kostka)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심플리치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implic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20?-401년경 밀라노

 

 

심플리치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심플리치아누스, 심플리키아노, 심플리키아누스, 씸플리치아노, 씸플리치아누스.

 

 

심플리치아노 자료

성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 또는 심플리치아노)는 320년경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젊어서 사제가 되었고, 성경과 교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374년 갑작스럽게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가 밀라노의 주교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교리교육을 담당하면서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또한 성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 세례를 받게 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와 그의 친구인 타가스테(Tagaste)의 성 알리피우스(Alypius, 8월 15일)의 개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아버지’라 부르곤 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권의 책을 그에게 헌정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성 심플리키아누스의 인품과 성덕을 높이 칭송했고, 그래서 8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결국 성 심플리키아누스는 397년 성 암브로시우스의 선종 이후 그를 계승하여 밀라노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불과 3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교구를 위해 헌신하다가 401년경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날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대에는 8월 15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6일로 옮겨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고대의 전통대로 8월 15일 목록으로 옮겨 그에 대해 언급하였다. 한편 밀라노 교구에서는 성모 승천 대축일과의 증복을 피해 전날인 8월 14일에 그를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아르눌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rn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40-1087년 수아송

 

 

아르눌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르눌, 아르눌뽀, 아르눌뿌스, 아르눌푸스, 아르눌프.

 

 

아르눌포 자료

아르눌(Arnoul)로도 불리는 성 아르눌푸스(Arnulphus, 또는 아르눌포)는 플랑드르(Flandre) 사람으로 프랑스의 앙리 1세와 로베르군의 장교였으나, 세상보다는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 길로 수아송에 있는 생-메다르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손수 협소한 방안에 들어가서 절대 고독을 즐겼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은 전혀 없이 오로지 기도와 보속에만 전념했다. 그는 이런 생활을 원장으로 선출되어 억지로 불려나갈 때까지 계속하였다.

1081년 수아송의 성직자와 주민들의 선거에서 그가 주교로 선출되었음을 알렸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주님, 몇 가지 보속밖에 아무런 공이 없는 이 죄인을 떠나가소서.”

그는 거의 강제에 의하여 주교직을 맡았지만 모든 업무에서 놀라운 지혜와 정열을 보여주었다. 1120년에 소집된 보베(Beauvais)의 회의에서는 그의 생애를 찬양하고, 성인을 위하여 경당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알리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ly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60-430년 타가스테

 

 

알리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리삐오, 알리삐우스, 알리피우스.

 

 

알리피오 자료

성 알리피우스(또는 알리피오)는 360년경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였다. 그는 카르타고(Carthago)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스승을 따라 마니교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의 부친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상종하지 말라고 금지했을 때는 이미 마니교도가 된 뒤였다. 성 알리피우스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Roma)로 갔고, 그곳에서 판사가 되었다. 

용기 있고 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직무를 수행 중에 한 상원의원의 부패와 맞서다가 모든 경력을 잃을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에 도착하자 그는 모든 직책에서 과감히 물러나 친구와 함께 밀라노(Milano)로 갔다.

그곳에서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주교의 설교에 크게 감동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교리를 받고 387년 4월 13일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성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밀라노 근교 카시키아쿰(Cassiciacum)에 머물던 성 알리피우스는 이듬해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는 타가스테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운 일종의 수도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기도와 보속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히포(Hippo)에 세운 수도 공동체로 가서 지내다가 로마에 있을 때 알게 된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만나기 위해 394년에 팔레스티나(Palestina)를 순례하였다. 

베들레헴(Bethlehem)에서 성 히에로니무스와 만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타가스테의 주교가 되었다. 2년 뒤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성 알리피우스는 타가스테의 주교로 헌신하며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us)나 도나투스파(Donatismus)로부터 가톨릭교회의 정통교리를 지키기 위해 힘썼고, 언제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든든한 동지로 함께했다. 그에 대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카시키아쿰에서 쓴 “대화집”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430년경 선종했는데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다.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가 그를 “로마 순교록”에 올리고 8월 15일에 기념하도록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5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서, 처음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였고, 그다음에는 회심의 동반자였으며, 사목의 동료이자 이단과의 싸움에서 확고한 동지로 지내다가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타르시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Tarsi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복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경 로마

 

 

타르시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타르시치우스, 타르시키오, 타르시키우스, 타르치시오, 타르치시우스, 타르키시오, 타르키시우스.

 

 

타르시치오 자료

성 타르시키우스(Tharsicius, 또는 타르시치오)의 행적에 대한 것은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그에게 바친 "성체를 위한 소년 순교자"라는 헌시에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교회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복사의 수호성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소년다운 용기와 신앙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전설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가 살던 3세기 말경에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한번은 미사가 끝난 후 신부가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감옥까지 성체를 모시고 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가는 도중에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어린 성 타르시키우스가 나서서 그 일을 자청하였다. 너무 어린 것을 걱정하는 신부에게 그는 자신이 어리기 때문에 경비병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신부도 이 말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체를 모시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감옥으로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성 타르시키우스에게 같이 놀자고 했지만 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거절하고 서둘러 가려 하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의 손에 있는 성체를 발견하고 빼앗으려 하자, 이를 거부하는 성 타르시키우스와 친구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급기야는 친구들이 돌로 그를 쳤다.

이때 지나가던 군인이 다가오자 친구들은 도망갔고, 그는 온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주교에게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여 주교에게 성체를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며 숨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추기경 와이즈먼(Wiseman)의 소설 "파비올라 혹은 카타콤바의 교회"(Fabiola or the Church of the Catacomb, 1854)의 소재가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성 타르시키우스는 복사와 첫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타르키시우스(Tarcis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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