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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천주교 남자세례명
4인 목록
디에고 남자세례명 목록
- 디에고 데 아제베도 (2월 6일)
- 디에고 키사이 (2월 6일)
- 디에고 (11월 12일)
- 후안 디에고 (12월 9일)
1. 디에고 데 아제베도
- 세례명 축일
2월 6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Diego de Azevedo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7년 오스마
디에고 데 아제베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다꼬, 디다꾸스, 디다코, 디다쿠스, 디에이고.
디에고 데 아제베도 이야기
에스파냐의 오스마 대성당에 부착된 성직자 중의 한 명인 디에고 데 아제베도는 1201년에 오스마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1206년에 그는 카스티야(Castilla)의 알폰소 9세 국왕으로부터 페르디난드(Ferdinand) 왕자의 신부감을 모셔오라는 명을 받고 이탈리아의 마르케(Marche)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해보니 그 소녀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Roma)로 가서 자신의 지지자 중의 한 명인 성 도미니코(Dominicus)를 만났는데, 이 방문이 궁극적으로 도미니코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에 디에고는 프랑스 시토(Citeaux)에 있는 시토회에 입회하여 랑그도크(Languedoc)의 알비파(Albigenses)를 대항하는 십자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207년 오스마로 귀향하여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디에고 키사이
- 세례명 축일
2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ego Kisai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97년 나가사키
디에고 키사이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기사이, 디다꼬, 디다꾸스, 디다코, 디다쿠스, 디에고, 디에이고,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디에고 키사이 이야기
성 디에고 키사이(Diego Kisai)로도 불리는 성 야고보 키사이(Jacobus Kisai)는 1533년 또는 1534년에 일본의 오카야마(岡山, Okayama) 인근 하가라는 마을에서 토착 신앙을 믿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불교 교육을 받았으나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여인을 만나 혼인하였다. 그런데 아들을 낳은 후 부인이 불교로 돌아서고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자 그는 부인과 별거하고 아들을 식구들에게 맡긴 후 오사카(大阪, Osaka)에 있는 예수회 공동체에 취직했다.
성실하게 공동체 일을 맡아 보던 그의 교리 지식을 눈여겨본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에게 교리교사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예수회의 보조자로서 평수사와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예수회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금교 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 일대에서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가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 결과 1596년 12월에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성 야고보 키사이도 12월 9일부터 예수회의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수사와 고토열도의 어느 섬 출신으로 교리교사였던 성 요한(Joannes de Goto)과 함께 가택 연금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 미야코로 이송되어 6명의 작은 형제회 신부와 수사 그리고 15명의 작은 형제회 일본인 재속 3회원들과 함께 감금되었다. 1597년 1월 3일, 미야코 감옥에 갇혔던 성 야고보 키사이와 23명의 동료는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長崎, Nagasaki)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성 바오로 미키는 서원을 갱신했고, 교리교사로서 예수회 입회를 간절히 원했던 성 야고보 키사이와 성 요한은 마침내 입회 허가를 받고 첫 서원을 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성 야고보 키사이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약 64세로 순교자 중 최연장자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성 야고보 키사이와 25명의 동료는 일본에서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그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야고보 키사이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디에고
- 세례명 축일
11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ego - 신분과 직업
수사,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00-1463년 알칼라
디에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다꼬, 디다꾸스, 디다코, 디다쿠스, 디에이고.
디에고 이야기
성 디에고(또는 디다쿠스 Didacus)는 1400년경 에스파냐 세비야(Sevilla) 근교의 산 니콜라스 델 프에르토(San Nicolas del Puerto)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은수자로서 고적한 삶을 살다가 작은 형제회에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몇 년 후 그는 카나리아제도(Canary Islands)에 속한 란사로테(Lanzarote) 섬의 아레시페(Arrecife)에 있는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문지기 수사의 소임을 받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사랑으로 큰일을 이룩하여 성덕이 탁월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1445년 그는 푸에르테벤투라(Fuerteventura) 섬의 작은 형제회 공동체의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많이 배우지 못한 평수사에게 그런 직책을 맡기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성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450년 그는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가 선포한 희년에 참여하고 같은 수도회 출신인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5월 20일)의 시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갔다. 수많은 순례자가 각지에서 로마로 몰려오면서 예기치 않은 전염병이 발발했다.
아라 코엘리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Basilica Sanctae Mariae de Ara Coeli)에 딸린 수도원에서 머물던 성 디에고는 3개월 동안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돌보았고, 그의 돌봄과 기도를 통해 많은 이들이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 후 에스파냐로 돌아온 그는 여러 수도원을 거쳐 1456년 마드리드(Madrid)에 속한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의 산타 마리아 데 헤수스(Santa Maria de Jesus)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고적함 속에 참회와 관상 생활을 실천하며 여생을 보냈다. 늘 겸손하게 수도원 안에서 정원사와 짐꾼의 소임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실천했던 그는 1463년 11월 12일 병환으로 선종하였다.
그는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작은 형제회의 평수사로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라 작은 형제회 평수사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 있는 샌디에이고(San Diego)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2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기록하며 11월 13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전례력 안에서 11월 12일에는 이미 교황 성 마르티누스 1세(Martinus I)를 기념하고 있었기에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969년 보편 전례력 개정과 함께 교황 성 마르티누스 1세의 기념일이 4월 13일로 변경되면서 성 디에고의 전례적 기념도 선종한 날인 11월 12일로 옮겨졌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11월 12일 목록에서만 그를 언급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문지기였던 이유로 열쇠를 들고 있거나 수도복 위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번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도원의 빵을 가져다주던 그를 누군가 질책하려 했을 때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기적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후안 디에고
- 세례명 축일
12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Juan Diego - 신분과 직업
농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474-1548년 쿠아우티틀란
후안 디에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다꼬, 디다꾸스, 디다코, 디다쿠스, 디에이고, 얀, 요안네스, 요한,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콰우틀라토아친, 쿠아우틀라토아친, 한스.
후안 디에고 이야기
성 요한 디다쿠스(Joannes Didacus, 또는 요한 디다코, 에스파냐어 Juan Diego 후안 디에고)는 1474년 오늘날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Mexico City)의 일부인 쿠아우티틀란에서 태어나 ‘독수리 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쿠아우틀라토아친(Cuauhtlatoatzin)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아나후악(Anahuac) 계곡에서 비교적 문화적으로 성숙한 치치메카족(Chichimeca)의 일원이었다. 평범한 농부였던 그는 50세경에 초기 멕시코 선교를 나온 작은 형제회의 베드로 다 간드(Petrus da Gand) 신부로부터 요한 디다쿠스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뒤 날이 갈수록 더욱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는 에스파냐가 마야 · 아즈텍 문명이 융성하던 멕시코를 정복한 지 꼭 10년 후인 1531년 12월 9일 멕시코시티 근방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 성당의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테페약(Tepeyac) 산을 넘고 있었다.
그날따라 이른 새벽 가시덤불밖에 없던 산 정상에 신비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갑자기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서 한 귀부인이 나타나 성 요한 디다쿠스를 불렀다.
그때 그 귀부인은 자신이 은총을 가득히 입은 하느님의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임을 밝히면서 그 장소에 성당을 세우라는 메시지를 주교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멕시코의 초대 주교인 후안 데 수마라가(Juan de Zumarraga)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성모님께서는 실망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성 요한 디다쿠스에게 다시 발현하시어 내일 주교에게 다시 가서 성당을 반드시 세울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교는 성모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신다면 기꺼이 성모님을 위한 성당을 세우겠다고 말하였다.
성 요한 디다쿠스가 이 말을 다시 성모님께 전하자 성모님께서는 그 징표로써 테페약 산 정상에 올라가서 장미를 담아 주교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때는 12월이라 추웠고 또 돌이 많은 산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산 정상에 가서 보니 정말로 장미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는 이 장미꽃을 자신의 틸마(Tilma, 외투 또는 보자기로 쓰이는 겉옷, 망토)에 담아 주교에게 보여주었다.
그 순간 주교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겨울이라 장미꽃이 필 계절도 아니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성 요한 디다쿠스의 틸마에 새겨진 그림 때문이었다. 바로 그 귀부인의 모습과 귀부인의 옷자락을 한 천사가 받쳐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귀부인은 스스로 ‘과달루페(Guadalupe)의 영원하신 동정 마리아’로 불리기를 원하셨고, 그 성화는 테페약 산 정상에 세워진 성당에 모셔졌다. ‘과달루페’는 ‘뱀을 부순 여인’이라는 뜻이다.
그 후 성 요한 디다쿠스는 주교의 허락을 받고 테페약 산 정상에 세워진 성당 옆 작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과달루페의 성모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성화를 보여주며 성모님의 발현 과정과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수천 명이 넘는 이들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더니, 마침내 성모님의 발현 8년 만에 우상 숭배와 매년 2만 명 이상의 여자와 어린이들을 피의 제물로 ‘뱀신’에게 바치는 인신 제사에 빠져 있던 멕시코 원주민 800만 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의 활동만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709년 4월 27일 테페약 언덕에 과달루페 성모님을 위한 두 번째 대성당을 재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고 과달루페 성모님을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하자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이 자취를 감추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 후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인들의 신앙 속에 깊이 자리하였고, 국가의 중요한 시기마다 당신 백성들을 돌보아 주었다고 신자들은 깊이 믿고 있다.
성 요한 디다쿠스는 성모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로 인정받기보다는 내적인 정화를 통해 하느님을 위한 기도에 전념하며 겸손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는 1548년 5월 30일 선종한 뒤에 과달루페 성모님을 위해 건립한 첫 번째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90년 4월 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그해 5월 6일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시복 승인 기념식을 올렸다.
이어서 그는 2002년 7월 31일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의 축일은 성모님께서 처음 발현하신 12월 9일로 보편 전례력에 올라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2월 9일 목록에서 원주민으로서 가장 순수한 신앙과 겸손과 열정을 지닌 성 요한 디다쿠스 쿠아우틀라토아친에게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테페약 언덕 위에 당신을 기념하는 성당을 건립하도록 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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