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디오니시오는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디오니시오 23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디오니시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디오니시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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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오 남자세례명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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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2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와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그리고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에 대해 알려진 것은 단지 그들이 아르메니아(Armenia) 출신 수사들이라는 것뿐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2월 1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와 성 암모니우스(Ammonius)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그 장소는 아마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여겨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2월 2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경 아우크스부르크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초대주교로 공경을 받는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성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 나르키수스(Narcissus, 3월 18일)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순교 이야기는 성녀 아프라(Afra, 8월 5일)의 순교록에 등장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3월 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경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코드라투스(Codratus)의 부모는 그리스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코린토스(Corinthos)에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갔다가 성 코드라투스를 낳았다. 그래서 성 코드라투스는 어릴 때부터 사막에 살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식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성장한 그는 의학을 공부하여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게 됨으로써 주변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 모두는 수덕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총독은 야손으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적대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손에 체포된 성 코드라투스는 다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고문을 받을 때 인간의 창조에서부터 주님의 죽음과 부활까지의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야손은 그의 이야기를 비웃고 야수들에게 모두 던졌지만 야수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자 참수시켜 버렸다.
다섯 명의 제자들의 이름은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성 아넥투스(Anectus), 성 바오로(Paulus) 그리고 성 크레스켄스(Crescens)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3월 1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4년 아퀼레이아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의 주교인 성 힐라리우스(Hilarius)와 그의 부제인 성 타티아누스(Tatian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펠릭스(Felix), 성 라르구스(Largus),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이들 모두는 누메리아누스 황제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데니스(Deni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3월 2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카이사레아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티몰라우스(Timolaus)를 비롯한 8명의 일행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성 티몰라우스 외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성 로물루스(Romulus), 성 파우시스(Pausis), 두 명의 성 알렉산데르(Alexander)와 성 아가피우스(Agap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4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0?-265년경 알렉산드리아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오리게네스(Origenes)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오리게네스의 후임이었던 헤라클라스(Heraclas) 교장이 232년에 주교가 되자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교리교사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15년 가까이 교장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247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250년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체포되었다가 다행히 탈출하여 리비아 사막의 모처에서 자기 교구를 사목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데키우스 황제가 죽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돌아온 뒤에는 박해 중에 배교한 신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큰 논란이 일었다.
그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 주교와 함께 파문 받은 배교자들이 합당한 참회 절차를 거쳐 교회에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 안에 참회 예식이 뿌리내리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또한 251년 3월에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에 반대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고 가(假)교황이 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이렇게 로마와 지역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중재자로서도 노력하던 그는 257년에 다시금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자 체포되었다. 그는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리비아로, 그다음에는 이집트로 귀양을 갔다.
다행히 261년에 귀양에서 돌아왔으나 전쟁과 정치적 혼란, 빈곤과 페스트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교구를 다스리다가 265년경 연로한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주교직을 수행하는 내내 온갖 시련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는 신앙의 ‘증거자’로서 온갖 고문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교회와 사회 재건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고, 신학과 그리스도교 문학뿐 아니라 이방인 문학에도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생전에 보여준 용기와 믿음, 사목적 열정과 학문적 소양으로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았고, 사후에 ‘대(大, magnus)’라는 칭호를 받아 ‘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Great)라고 불리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7일에 그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8일로 옮겨 그의 신앙 고백과 증거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옛 “로마 순교록”이 10월 3일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념하는 순교자 중에 성 디오니시우스를 포함했는데, 이는 실수로 보인다.
그래서 새 “로마 순교록”에서는 ‘신앙의 증거자’라는 표현과 함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4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년경 코린토스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코린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주교는 2세기의 감동적인 설교가이자 뛰어난 교회의 지도자였다. 오늘날 그는 가르치고 훈계하며 위로를 주려했던 교회작가로 부각되어 기려진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는데, 에우세비우스는 그가 다른 여러 교회에 보낸 교훈적인 편지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로마에서 발생한 사도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의 순교에 관한 기록이다. 코린토스에 신앙을 전파한 후 두 사도는 이탈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피로써 자신들의 증언을 보증했다.
또 다른 편지로는 교황 성 소테르(Soter, 4월 22일)의 재임 기간 중 로마 교회에서 받은 전통적 지원금에 대해 쓴 감사 편지이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초부터 모든 곳에 지원금을 주어 많은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윤택함을 주는 것이 로마 교회의 관습이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교부들의 예를 따라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필요에 적절한 위안을 주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복된 주교 소테르는 그런 점에서 조상들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 위로와 조언을 차치하고라도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식의 보고를 주시며 모든 이가 그에게 다가오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의 날을 함께 경축하며 클레멘스(Clemens)가 우리에게 보내셨던 편지를 읽었던 것과 동일하게 교황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성 디오니시우스는 오히려 성경의 잘못에서 기인하는 그릇된 학설보다 이교도적 철학 원리를 수용하면서 생기는 과격한 이론(異論)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였다.
그는 이교적 오류의 근원과 철학적 분파에서 생기는 각각의 오류들을 지적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성 디오니시우스가 평화롭게 선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싸움을 했기에 순교자로 섬기고 있다.
라틴 교회는 그를 증거자로서 공경한다. 그의 유해는 후에 로마로 옮겨졌고, 121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가 성 디오니시우스의 유해를 파리 근처에 있는 생드니(Saint-Denis) 대수도원으로 보냈는데, 그곳의 수도자들은 그 유해를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우스(10월 9일)로 믿었었다. 하지만 두 성인 중 누구의 유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4월 1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5년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소크라테스(Socrates)와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고대 소아시아 지방인 팜필리아(Pamphylia)의 순교자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칼에 찔려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5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3년경? 비엔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2세기 초 교황 성 식스투스 1세(Sixtus I, 4월 3일)가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한 10명의 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프랑스 남동부에서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는 옛 지방인 도피네(Dauphine)에 있는 비엔의 주교가 되어 성 유스투스(Justus)를 계승하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으나 옛 “로마 순교록”은 ‘증거자’로 기록하였다. 또한 그가 활동하던 시기도 2세기기 아닌 4세기로 보기도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5월 8일에 기념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9일로 옮겨 기념하도록 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5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로마의 아우렐리아(Aurelia) 가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14살의 어린 나이로 고문을 당하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오래된 문서나 비평문 등에 언급된 전설적인 수난기에 따르면, 성 판크라티우스는 290년경 프리기아(Phrygia) 지방 신나다(Synnada)에서 부유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에게 맡겨졌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삼촌을 따라 로마로 와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한창이던 304년경 불과 14살의 나이로 로마의 신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다.
황제는 권력을 약속하며 어린 그를 회유했지만, 성 판크라티우스는 몸은 비록 어린아이지만 마음만은 노인과도 같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의 시신은 옥타빌라(Octavilla)라는 한 로마의 부인이 정성껏 수습하여 로마의 카타콤바에 새로 만든 무덤에 안장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도 이때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삭제했다.
성 판크라티우스의 무덤은 일찍부터 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교황 성 젤라시우스 1세(Gelasius I, 492~496년 재위, 11월 21일)와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590~604년 재위, 9월 3일)의 성무 집전서에 성 판크라티우스 기념 미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공경은 이미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을 500년경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 498~514년 재위, 7월 19일)가 재건축했고,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곳에서 복음서를 강화(講話)하고 그에게 봉헌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 625~638년 재위)에 의해 재건된 성 판크라티우스 대성당은 로마인들이 부활 시기에 주로 찾는 유적지가 되었고, 후대에 추기경좌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을 더욱 널리 퍼졌고, 중세 때에는 서양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특별히 영국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데, 이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가 그의 첫 번째 성당을 성 판크라티우스에게 봉헌했고, 664년에 교황 성 비탈리아누스(Vitalianus, 1월 27일)가 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 오스위(Oswy)에게 그의 유해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 후기 14명의 수호자 중 1명으로 여겨졌고, 신생 국가와 청춘 남녀들의 보호자이자 병자들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로마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의 여러 교회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순교를 상징하는 검이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젊은이나 갑옷을 입은 군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성 판크라티우스가 군인은 아니었지만 같은 날 순교하여 오래전부터 전례 안에서 함께 기념해온 군인 출신의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의 영향으로 보인다.
1969년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는 5월 12일에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순교자 또는 성 판크라티우스 순교자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5월 2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59년경 밀라노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시성조사를 실시하던 몇 명의 주교들 가운데 정통 그리스도교를 끝까지 주장하고, 351년 성 프로타시우스(Protatius, 11월 24일)를 뒤이어 밀라노의 주교직에 오른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에게 제일 큰 공을 돌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 아타나시우스는 그 당시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빠진 황제와 신봉자들로부터 무수한 반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355년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성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단죄를 선언하기 위해 궁중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을 때, 가톨릭 신앙의 열렬한 옹호자이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스스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모든 대표자들이 칙서에 서명을 마치려고 할 즈음, 성 디오니시우스와 베르첼리(Vercelli)의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8월 2일) 주교 그리고 칼리아리(Cagliari)의 루치페르(Lucifer)가 완강히 거부하였다.
결국 그들은 추방되었는데, 성 디오니시우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359년경에 서거하였다. 그 후 밀라노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가 그의 유해를 밀라노로 옮겨와 안장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디오니시오 세부그와워 와스와
- 세례명 축일
5월 2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Ssebuggwawo Wassw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1886년 우간다
디오니시오 세부그와워 와스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세부그와워 와스와 이야기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우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우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푸스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우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우스 세부그와워 와스와(또는 디오니시오 세부그와워 와스와)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티아누스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우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물룸바(Matthias Mulumba)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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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6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3년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는 원래 이방신을 믿던 사제였으나 연만한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체포되어 집정관 실바누스에게 끌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커녕 돌로써 그의 얼굴에 타박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채찍으로 맞고 목이 달리는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여기서 그는 4명의 소년 신자인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히파티우스(Hypatius), 바오로(Paulus),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였다. 결국 그들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7월 2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0-362년경 에페수스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소아시아 지방 서해안 도시인 ‘에페수스의 7인의 잠든 자’로 불리는 성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성 말쿠스(Malchus), 성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us),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성 요한(Joannes), 성 세라피온(Serapion), 성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의 이름은 전설의 여러 전승에 따라 다르게도 나타나지만, 그들은 데키우스(Decius, 249-251 재위) 황제의 통치 때 동굴에 감금당했으나 거의 200년 후에 살아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깨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곧 성인으로 공경받기 시작했다. 장시간의 수면은 신화와 민담의 공통된 주제로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머금고 있는 이 이야기는 이미 6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500년경에 시인이자 신학자인 사루(Sarugh)의 야고보(Jacobus)가 시리아어로 남긴 기록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도미니코회 회원인 바라지네(Varagine)의 복자 야고보(Jacobus)가 “황금 전설” 안에 그들의 이야기를 포함한 후 대중적 인기가 많아졌다.
7인의 잠든 자들은 에페수스에서 태어났다. 데키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처형하러 에페수스에 와서 도시 중앙에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자신과 함께 우상에게 희생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찾아내어 희생 제사를 올리든지 아니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경험하든지 선택을 하게 했다. 그 일로 인해 고통이 너무나 두려웠던 나머지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밀고하고, 아버지가 아들과 인연을 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루카 12,53)라는 말씀처럼.
7인의 잠든 자로 불리는 7명의 그리스도인도 이때 체포되었다. 그들은 우상 앞에서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는 데 앞장선 인물들로 자신들의 집에 숨어 단식하며 기도하던 이들이었기에 많은 군중이 그들의 체포에 대해 매우 슬퍼하였다.
데키우스 황제에게 고발당한 후 그들은 신심이 매우 깊은 신앙인임이 드러났다. 그들에게는 황제 앞에 재출두하기 전까지 배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와중에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고, 모여서 회의한 후 첼리온 산(Mount Celion)에 올라가 비밀리에 긴 시간을 지냈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고 봉사하며, 도시로 내려올 때면 걸인 복장을 하고 내려오곤 했다.
데키우스 황제가 돌아와 그들을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들을 섬기며 식사와 음료를 대접하던 성 말쿠스는 몹시 무서워하며 돌아와 황제의 광포함과 광기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모두 하느님의 뜻대로 깊은 잠에 빠졌고,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그들을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데키우스 황제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그들이 살던 동굴의 입구를 돌로 막아 봉인하여 그들을 굶겨 죽이기로 했다. 지방 장관과 두 명의 신자인 테오도루스(Theodorus)와 루피누스(Rufinus)는 그들의 순교록을 써서 돌 사이에 끼워 놓았다.
데키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2-450년 재위) 황제 재위 30년에 자비로우시며 죽은 이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들은 다시 깨어나게 되었다.
한 에페수스의 시민이 버려지고 별 쓸모없는 산에 목동을 위해 마구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마구간을 만들던 한 벽돌공이 우연히 동굴을 열게 되었고, 그 순간 그들은 잠에서 깨어 서로 인사를 하며 전날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겨우 하룻밤 지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성 막시미아누스는 그들의 종이었던 성 말쿠스에게 시내에 가서 빵을 사 오라고 하며 전날 사 왔던 양보다 조금 더 사 오라고 했다. 그리고 황제의 명령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성 말쿠스는 5실링을 가지고 동굴을 나와 동굴 앞에 있던 벽돌공들을 보고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성 말쿠스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 동굴 앞에 있던 돌무더기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했다.
도시까지 오면서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그는 성문에 도착한 순간 완전히 아연실색했다. 성문 위에 버젓이 세워진 십자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다른 성문으로 가보았지만, 그곳에도 십자가가 달려 있었고, 모든 성문마다 십자가가 달려 있고 도시 전체가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는 잠시 자신을 진정시킨 뒤 얼굴을 숨기고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빵 가게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들은 그는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어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더니 어떻게 오늘은 모든 이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이 도시는 다르게 지어진 에페수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참으로 에페수스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성 말쿠스는 동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돈을 내고 빵을 샀다.
그런데 오래된 동전에 놀란 상인은 빵을 사러 온 젊은이가 보물을 발견했다고 외쳤다. 그리고 옛 황제들의 보물을 보여주면 빵과 돈을 주겠다고 말하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상인은 친구가 되어 비밀을 지키겠다며 그를 보챘다.
성 말쿠스는 너무나 놀라 공포에 질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말을 하지 않자 상인과 주변에서 몰려온 이들이 그의 목을 끈으로 묶어 도시 가운데로 끌고 갔다.
그 도시의 마르티누스(Martinus) 주교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정관인 안티파테르는 이 소식을 듣고 성 말쿠스와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성당으로 소환된 성 말쿠스는 자신이 데키우스 황제에게 넘겨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교와 집정관은 돈을 보고 놀라 알려지지 않은 이 보물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물었다. 성 말쿠스는 그 돈은 어디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과 재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정관은 그 돈이 데키우스 황제 통치 초기의 것으로 현재 통용되는 것과 전혀 다르다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성 말쿠스는 무척 당혹해하며 자신과 동료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부터 도망쳐 있으며, 만약 이 도시가 에페수스가 맞는다면 어제 황제가 에페수스로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주교는 한참을 생각한 후 주님께서 이 젊은이를 통해 무엇인가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성 말쿠스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첼리온 산에 있는 나의 동료들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리고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는 데키우스 황제의 면전에서 도망쳐왔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성 말쿠스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고 도시의 많은 군중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성 말쿠스가 동굴에 먼저 들어가고 주교가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동굴을 막았던 돌들 사이에서 은으로 봉인된 두 개의 편지를 발견했다.
주교는 함께 온 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모든 이들이 놀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굴 안에 앉아있는 성인들을 보았다.
그들의 용모는 꽃피는 장미 같았으며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었다. 성 막시미아누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설명하며 부활을 굳게 믿는다면 영원히 살 것이라 하고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맡겨드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날 밤 성인들은 황제의 꿈에 나타나 그들이 부활할 그 날까지 누워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황제는 동굴을 진귀한 돌로 아름답게 꾸미고 귀한 보물로 그들의 무덤을 장식하였다.
이 이야기는 몇몇 잊힌 묘소를 발굴하던 중 “주님 안에서 잔다”라는 용어를 오해한 데서 나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육신의 부활에 대한 논쟁과 연관되어 기록된 신심 깊은 가공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영웅들은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특히 동방 교회에서 이 성인들은 매우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들이 발견되었던 동굴은 순례자들에게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큰 석관에 담겨 프랑스의 마르세유(Marseille)로 옮겨져 성 빅토르(Victor) 성당에 안장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바로니우스(Baronius)는 이 이야기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들의 이름과 축일은 옛 “로마 순교록”의 7월 27일 목록에 의해 보존되었다.
그러나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이름은 삭제하고 에페수스의 7인의 거룩한 잠든 이들이 순교한 후 평화로운 쉼 속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들은 보통 동굴에서 잠들어 있는 일곱 명의 젊은이들로 묘사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7월 3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성 세쿤두스(Secundus) 그리고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 혹은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와 성 프리바투스(Privatus)는 소아시아 중부 프리지아(Phrygi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순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10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의회 의원,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말 아레오파고스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가 아테네에서 선교할 때 만난 인물이다(사도 17,16-34). 사도 성 바오로는 온갖 우상으로 가득 찬 아테네에 도착한 후 회당과 광장에서 유다인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여러 철학자들과 토론하며 복음을 전했다.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 그들은 사도 성 바오로를 ‘아레오파고스’(전쟁의 신인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라고 부르는 나지막한 돌산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아테네 시민을 향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시작하는 설교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그리스도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선포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어떤 이들은 비웃었고, 어떤 이들은 약간의 관심만 보이며 돌아갔다. 그때 몇몇 사람이 사도 성 바오로의 말을 믿고 그의 편에 가담했는데, 그들 가운데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성 디오니시우스가 있었다. 그 외에 다마리스(Damaris)라는 여자와 몇몇 사람이 더 있었다.
성 디오니시우스와 다마리스라는 여자는 나중에 사도 성 바오로에 의해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한 코린토스(Corinthos)의 성 디오니시우스(4월 8일)의 기록에 따르면, 의회 의원이었던 성 디오니시우스는 개종한 후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되었고,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의 수호성인이자 재판관과 사법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고,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9세기 이후 그는 꽤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파리(Paris)의 성 디오니시우스(10월 9일) 주교 순교자와 동일 인물로 여겨지는 혼동이 있었다.
이는 생드니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힐두인(Hilduin)이 쓴 전기에서 나온 이야기로 파리를 학문의 중심지로 세우려는 노력과 ‘갈리아의 일곱 사도’ 중 하나인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해 지역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중세의 경향이 합쳐진 데서 비롯된 오해로 보인다.
실제로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9일 목록에서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사도 성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되었고,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축복을 받고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몇 년 동안 파리에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후 성 루스티쿠스(Rusticus)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10월 9일) 부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10월 9일에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동료들의 순교를, 그리고 10월 3일에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를 기념하도록 수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활동 시기 또한 3세기와 1세기로 명확히 구분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10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파리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이탈리아 태생의 주교로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무너진 갈리아 지방의 재복음화를 위해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해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인 ‘갈리아의 사도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7명의 갈리아의 사도는 파리에 정착해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된 성 디오니시우스 외에 나르본의 성 바오로(Paulus, 3월 22일), 투르(Tours)의 성 가티아누스(Gatianus, 12월 18일),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11월 29일), 아를(Arles)의 성 트로피무스(Trophimus, 12월 29일), 클레르몽(Clermont)의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Austremonius, 11월 1일),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가 있다. 그중에서 툴루즈의 성 사투르니누스와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자신과 동행한 성 루스티쿠스(Rusticus)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부제와 함께 몇 년 동안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파리 근교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수난과 순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파리 지역에서 선교 활동에 큰 성공을 거둔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이 체포된 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당해 그 시신이 센강(Seine R.)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으로는 성 디오니시우스가 참수당한 후 직접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도 있다. 520년경에 출간된 “성녀 제노베파의 생애”(Vie de Sainte Genevieve)에 따르면, 이미 그 당시에 성 디오니시우스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고 있었고, 성 디오니시우스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걸어갔던 곳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덤 자리로 알려주신 곳으로 오늘날 그를 기념해 대성당이 건립된 생드니(Saint-Denis) 지역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순교 장소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파리 북부에 메르쿠리우스(Mercurius, Mercury) 신을 경배하던 언덕에서 참수되었는데, 그곳은 해발 129m로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순교 이후 ‘순교자의 산(언덕)’(Mons Martyrum)이란 의미를 지닌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순교 후 센강에 던져진 그들의 시신은 곧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고, 12세기에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립하면서 생드니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몽마르트르 정상에는 1875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된 예수 성심 대성당(Sacre-Cœur Basilica)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 거리는 근대 미술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예술의 거리로 조성되었다.
세 번째 전설은 파리의 주교였던 성 디오니시우스의 신원에 대한 혼동과 관련된 것이다. 중세 때 일부 전승은 3세기 중엽에 순교한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1세기에 아테네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에 의해 개종하고 후에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된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우스(사도 17,34; 10월 3일) 그리고 성 바오로가 아테네로 여행할 때 개종한 익명의 신비주의적 저술가 등 세 사람을 서로 혼동하고 있었다.
17세기까지 이런 혼동이 있었으나 이들 간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중세 때에 이들 갈리아의 일곱 사도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하여 지역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영향에서 시작된 오해로 보인다.
실제로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9일 목록에서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사도 성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축복을 받고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몇 년 동안 파리에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후 성 루스티쿠스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 부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10월 9일에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동료들의 순교를, 그리고 10월 3일에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를 기념하도록 수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활동 시기 또한 3세기와 1세기로 명확히 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적 순교 이야기에 근거해 주교 복장을 하고 자신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프랑스와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성 디오니시우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Denis)로도 불리며, 14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14명의 구난 성인’(救難 聖人, Holy Helpers) 중 한 명으로 공경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 세례명 축일
11월 1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Fugishima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4-1622년 시마바라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푸지쉬마, 푸지시마, 후지쉬마.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이야기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Petrus Paulus Navarro)는 1560년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Basilicata)의 라이노(Lain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9년 놀라(Nola)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부터 일본 선교를 희망했던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1884년에 인도의 고아(Goa)로 유학 갔고, 이듬해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인 1586년 8월에 일본 규수 북부 해안의 히라도섬(Hirado Island, 平戶島)에 도착했다.
그는 시코쿠(Shikoku)와 혼슈(Honshu)의 선교부에서 봉사하면서 일본 선교를 위해 언어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에 대해 배우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와 전통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1612년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금교령을 공포하고 1614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령이 시행되자 일본에서 활동하던 80여 명의 예수회 동료들이 해외로 이동했고, 그를 포함해 24명은 일본에 남아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주로 큐슈 서부의 시마바라 지역에서 거지, 장작 장수, 농부 등으로 위장하며 사제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일본인으로 교리 교사였던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Petrus Onizuka Sandayu)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또는 디오니시오 후지시마)의 도움을 받았다.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는 10대 소년이었지만 열심한 신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선교사들과 자주 만나 신앙생활을 했다.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는 결혼했었으나 아내가 그를 떠난 1615년부터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함께 지내며 그를 도왔다.
1621년 12월 말경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그와 함께 활동하던 두 명의 교리 교사와 그들이 데리고 있던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Clemens Kyuemon)이 모두 사제 사냥꾼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을 체포한 아리마(Arima, 有馬)의 다이묘(大名)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호의적이어서 종종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다이묘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다이묘는 그들이 처형될 것을 알고 비밀리에 마카오로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1622년 10월 27일 상부로부터 그들을 화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동료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처형일인 11월 1일,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예수회원이 되기를 청하는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서원식을 거행했다.
오후가 되자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새로 서원한 두 명의 수사와 신심 깊은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은 군인들에 의해 나가사키(Nagasaki) 시마바라의 바닷가 형장으로 끌려가 화형을 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들은 모두 1867년 5월 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다른 201명의 순교자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11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성 바수스(Bassus),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성 아가피투스(Agapitus)를 포함한 43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발칸반도 동부 트라키아(Thracia) 지방의 헤라클레아(Heracle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11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00-1638년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옹플뢰르(Honfleur)에서 베르틀로(Berthelot)가의 10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피에르(Pierr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2살부터 선원 생활을 하던 피에르 베르틀로는 커서 프랑스 선박의 선장이자 상인으로서 활동하던 중 1635년 인도의 고아(Goa)에서 카르멜회의 한 원장을 만나 그 길로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디오니시우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서약을 한 후에 포르투갈계 부원장이 대사를 태우고 가는 배의 조타수로 일할 것을 요청받고 수마트라(Sumatra)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자 카르멜회 장상은 그에게 사제품을 주고 사목자로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평수사인 레뎀투스(Redemptus)와 함께 항해하게 되었는데, 레뎀투스의 세속명은 토마스 로드리게스 다 쿠나(Thomas Rodriquez da Cunha)였다.
레뎀투스는 카르멜회에 입회하기 전에는 인도의 군인으로 활동했었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아친(Achin)에 당도하였을 때 수마트라인들이 대사와 그의 부하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는데,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까지 고수한 디오니시우스는 코끼리에 의해 짓밟혀 순교하였고, 레뎀투스 역시 살해되었다. 탄생의 디오니시우스와 십자가의 레뎀투스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디오니시오
- 세례명 축일
12월 2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192/200-267/268년
디오니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이야기
그리스 사람으로 인정되는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가 259년 7월 22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에 그는 로마(Roma)의 사제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교황선거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하여 거의 1년이나 지체되었던 선거였다.
260년경에 성 디오니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인 디오니시우스의 저서 가운데서 술어를 고치라는 중요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 교서는 하나의 천주성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것이므로 지극히 중요하였다.
또한 그는 고트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카파도키아(Cappadocia) 교회에 거액의 복구 자금을 보내어 그리스도인 포로들의 몸값으로도 사용케 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에 갈리에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으나 그전의 박해로 쓰러질 듯한 교회를 가장 성공적으로 재건한 분으로 손꼽힌다.
그는 박해 시대에 순교자로 기록되지 않은 첫 번째 교황으로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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