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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0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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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오래 보다 보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도 그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살아내신 삶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더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이 바라보는 일에 가까운 것 같아요.

 

오늘은 서두르지 않고, 그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싶은 하루입니다.

 

2026년 5월 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3장 44-52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4장 7-14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2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아타나시오 소개 00:06

✚ 교황님 4월 기도지향 01:14

✚ 미사 시작 01:27

✚ 강론 시작 08:2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투명해질 때 보이는 것

“투명 인간”이라는 영화를 보며 처음에는 투명 인간이 되면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면? 아무도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고 생각해 보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완전히 비우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고, 특히 십자가에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찬란하게 비추셨습니다. 고통스러우셨을 테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투명한 유리창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투명한 존재가 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는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빛이 나를 통하여 세상에 비추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내세우려 할 때 하느님의 빛은 가려집니다. 그러나 내가 겸손히 나를 낮출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오늘 복음의 진리를 온 생애로 증언하였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안위보다 진리를 선택하였고,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참된 신성을 지니셨다는 교리를 수호하였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투명한 증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나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나를 내세우기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투명한 존재가 되어 봅시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비추어지도록 기꺼이 투명해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악감정이 있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지요.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이라는 뜻인데 오늘 독서의 장면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느낍니다.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스테파노를 죽이기 전 그 장면과 거의 같습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도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고 사도행전이 전하는데 이번엔 바오로 사도가 그대로 당하는 셈입니다.

어쨌거나 스테파노 때의 유다인이나 오늘의 유다인은 분노와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분노나 시기 질투심은 조금만 있어도 우리 안에서 사랑을 몰아내 우리가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분노나 시기나 질투가 조금 있으면 나머지 공간엔 사랑이 크게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조그만 분노가 사랑을 몽땅 밀어내기도 하고, 분노가 조금만 있어도 사랑이 힘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시기심이 조금 정도가 아니라 가득 차 있었기에 그들 안에 사랑이나 이해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고,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 비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스테파노처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박해하며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나는 것 이런 모습은 참으로 통쾌하고 우리가 참으로 닮고 싶은 점입니다.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은 우리 안에 악감정이란 악감정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탈탈 털고 훌훌 떠나는 행위입니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이 내쫓았어도 사도들은 쫓겨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쫓아내도 쫓겨나지 않는 것 이렇게 되기 어려워서 그렇지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것 참 멋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인간적 수양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고, 찝찝한 감정이 앙금처럼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 오히려 보통입니다.

성령은 악령을 완전히 몰아내고 악감정도 모두 몰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쫓겨난 것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게도 합니다. 그러니 악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악감정이 있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이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강림 사건이 될 것이고, 우리는 승리의 짜릿함(통쾌함)을 느낄 수 있으며 성인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고 말씀하신데 대한, 제자들의 세 번째 반응입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라는 필립보의 반응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의 간청은 마치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과 같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자신이 헤엄쳐 다닐 수 있음이 물이 있음임을 모르고,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 쉬는 줄을 모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눈길’(신앙의 눈길)로 보는 일,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4항).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러니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4장 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주님! 제가 여전히 이루지 못함은 여전히 죽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 뜻을 이루려 한 까닭입니다.

사랑으로 죽게 하시어,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이루소서.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음은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도 늘 저보다 더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성모신심미사 : 성모 마리아께 먼저 동기화 하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8)

찬미 예수님. 성모님의 달 5월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을 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지 묵상하려 합니다. 얼마 전 박진영 씨가 가톨릭을 비판하며 예수님께 직접 아뢰면 되지 성모님이나 성인들을 통하여 기도를 전달하느냐고 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지금은 하느님으로 계시는 데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예수님께 아뢰면 된다는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기적을 거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은 첫 표징을 얻어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 안 될까요? 하늘나라에서 그분들 관계가 바뀐 것일까요? 이것은 동기화의 하나 됨의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무언가와 동기화되어 삽니다. 동기화란 그것에 속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동기화를 이해하기 위해 ‘아바타’란 영화를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인간의 몸을 기계 안에 눕히고 나비족 아바타와 신경을 연결합니다.

핵심은 링크입니다. 그가 아바타와 연결되었을 때, 이전 자기 몸과는 끊어집니다. 아바타가 달리면 그는 자유를 느끼고, 아바타가 다치면 현실의 몸도 비명을 지릅니다. 연결된 대상의 감각이 자기 감각이 됩니다. (출처: 제임스 카메론 감독, 영화 '아바타' (2009))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아라는 좁은 캡슐 안에만 갇혀 있으면 체면과 이익이 전부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동기화 되면 그분에 속하게 되고 그분 감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제이크의 인간 몸은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였지만, 자신이 동기화한 나비족은 사랑이고 하나이기에 그것에 영광을 돌리고 그 감정도 공유하기로 한 것입니다.

동기화 방법은 그것이 원하는 일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광을 드린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아에게 영광을 드립니다. 돈 벌어오라면 돈 벌고 쾌락을 즐기라면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라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동기화를 통해 오는 감정은 순간적인 쾌락과 오랜 불만입니다. 내가 동기화한 자아는 기쁨을 모르는 불만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누구와 동기화되셨습니까? 그리스도와 동기화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성모님의 뜻이 되었고, 예수님의 고통이 성모님의 고통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기쁨이 성모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완전히 맞추어진 사람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동기화의 방법은 먼저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기쁨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영광을 올린다는 말은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 그분의 고통을 완화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바타가 자기 인간들의 탐욕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나비족의 고통을 함께하고 탐욕자들과 맞서 싸우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서 나비족과 완전히 동기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동기화하면 될까요?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모 마리아와 동기화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맞추어지도록 도와주시는 가장 안전하고 부드러운 어댑터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깊은 뜻을 한 번에 다 이해하지 못할 때, 어머니는 그 뜻을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 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과학적 비유로 말하면 전압 어댑터와 같습니다. 작은 기계를 고압선에 직접 연결하면 기계가 타 버립니다. 전기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기계가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댑터가 필요합니다. 전류의 본질을 바꾸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기화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우리 심장이 찔림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그 고통보다는 우리가 접근하기 더 쉽습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성모님을 통해 십자가를 배웠습니다. 1858년, 성모님께서는 가난하고 병약한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 아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캐물었고, 어른들은 수군거렸고, 사람들은 구경거리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샘으로 가서 마시고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맑은 샘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진흙탕 같은 물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어린 소녀가 흙탕물을 마시고, 얼굴에 진흙을 바르는 모습은 세상 눈으로 볼 때 우스꽝스럽고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행동을 죄인들을 위한 보속의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출처: 르네 로랑탱,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루르드 성지 전승)

여기서 성모님의 교육이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한꺼번에 십자가 전체를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채찍질과 못 박힘을 그대로 체험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흙탕물, 조롱, 작은 보속, 순명이라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방식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자녀가 도망가지 않을 만큼, 그러나 반드시 자라날 만큼 십자가를 나누어 줍니다.

베르나데트가 성모님과 동기화되었기에 그 초라한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바로 동기화되었다면 두려워 도망쳤을 것입니다. 성모님과 동기화되었기에 베르나데트는 조롱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동기화입니다. 하와는 뱀과 동기화되었고, 마리아는 말씀과 동기화되었습니다. 하와는 자아에게 영광을 돌렸고, 그 결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반대로 마리아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결과 하느님의 생명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받아들여 죽음을 낳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새 하와이십니다. 뱀의 말에 흔들린 첫 하와의 길을, 말씀에 순명한 새 하와가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감정을 그리스도께 맞추셔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저도 화장실에 대변 봉투를 빠뜨렸을 때 바로 아버지께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중개하시는 분이시고 하늘 나라에서도 이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한 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입니다.

성경에 하느님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사람들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이들은 중개자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카나의 기적의 표징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께 달려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루카 복음 해설』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마리아의 영혼이 여러분 각자 안에 있어 주님을 찬미하게 하십시오. 마리아의 정신이 여러분 각자 안에 있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게 하십시오.” (출처: 성 암브로시오, 『루카 복음 해설』 2,26-2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자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수도자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임종 순간, 그의 머리맡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울음소리에 깨셨는지 지그시 눈을 뜨십니다. 그리고 세 번 웃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임종을 앞둔 스승님께 그 이유를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모두 벗어던지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 웃었소.”

이 말을 마치고 원로 수도자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일화가 크게 다가옵니다. 우선 우리 역시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유쾌할 수 있을까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지금을 잘 준비하는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에, 또 하느님께 대한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서 지금을 잘 살지 못합니다. 후회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하느님 나라를 가고자 하지만, 지금 당장은 가지 않으려는 우리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준비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청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세나 엘리야의 경험처럼,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광이 눈앞에 나타나는 장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늘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압도적인 증거를 통해서만 믿겠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름 속이나 번개 가운데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목수 출신의 초라한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완벽하게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철저하게 지금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이나 확고한 증거만을 요구하게 되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안에서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순간에서 유쾌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참된 의미는 자신이 나무 그늘에서 쉬겠다는 마음 없이 나무를 심는 것이다(넬슨 핸더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멀리서 찾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사람의 얼굴로 드러난 사건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을 설명하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현존으로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사랑 안에서 하나로 일치된 관계적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이 하느님을 보여주는 순간이 됩니다. 이렇듯 진리는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한 존재를 온전히 보면 전체를 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사랑으로 살아지는 우리들 안에 사랑의 일치로 드러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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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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